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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39] 교회, 한 몸 안의 다양한 지체들본문 / 고전 12:12-26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12:4-11절 말씀을 통하여 “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은사, 직분, 사역의 원천에 관해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모든 직분은 주님이 주셨습니다. 은사에 따라 주어진 직분은 여러 가지나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습니다. 직분은 각자의 은사에 따라 주어지는데, 그 은사의 목적은 교회의 유익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 다양한 은사는 교육적 은사, 초월적 힘을 발휘하는 은사, 특별한 의사소통을 위한 은사 등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는 본문 고전 12:12-26절 말씀을 통하여 “교회, 한 몸 안의 다양한 지체들”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한 몸의 다양한 지체는 교회 안의 다양한 지체로 설명하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본질과 특징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성령으로 한 몸이 된 지체들(12-13) 첫째, 한 몸의 다양한 지체가 있듯이 교회도 그와 같습니다(12). 본문 12절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여기 지체라는 단어는 ‘멜로스’(μέλος)라는 단어로서 ‘지체’, ‘부분’을 의미합니다. ‘몸의 일부’로 설명합니다. 또한 ‘음악 구성원’, ‘악기’, ‘노래’, ‘악보’, ‘선율’로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 여러 악기를 통해 하나의 하모니를 내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본문 12절은 다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2) 몸의 지체가 많아도 그것은 한 몸입니다. 3) 그리스도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몸의 지체가 많아도 그것이 다 한 몸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그와 같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성령으로 다양한 은사를 받습니다. 그 은사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이제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설명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몸인 교회의 지체로 설명합니다. 모든 지체와 몸과의 유기적인 상호관계를 설명합니다. 둘째,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3). 본문 13절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한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라는 단어의 의미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세례는 밥티조(βαπτίζω)는 헬라 세계에서 ‘담그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람을 물에 빠뜨리거나 배를 침몰시킴으로 ‘멸망시키다’라는 뜻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그것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인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와 한 몸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세례란 이러한 사실을 설명할 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나도 그 안에서 죽었습니다. 물에 담겨 죽었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염두에 두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다라고 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은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 안에 포함되어 한 인격체(몸)가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28절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대상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오직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에서 ‘마시다’라는 단어는 요엘선지자의 예언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16-17절에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라는 말씀의 성취 개념입니다. 이는 성령을 생명을 주는 ‘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 생명의 유기체(14-18) 첫째, 몸은 많은 지체로 이루어졌습니다(14). 본문 14절에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이미 12절에서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라는 상징적인 표현을 본문에서 다시 언급합니다. 바울은 인간의 몸의 기능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와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몸으로 되어 있지만 많은 기능과 역할이 있어야 합니다. 12절에서는 ‘지체가 많다’라는 점을 강조하지만, 본문 14절에서는 ‘한’ 몸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체는 여럿이지만 결국 몸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인 그리스도 안의 모든 지체는 결국 하나입니다. 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둘째, 몸의 지체는 유기체가 되게 하셨습니다(15-16). 본문 15절에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이어서 16절에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유기체(有機體)라는 단어는 서로 밀접하게 상호의존적 관계를 맺고 있는 개체 혹은 부분들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통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체는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각 부분끼리 상호 간 밀접한 관련이 있고, 전체적으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몸의 지체들이 가진 중요 기능을 설명하면서 ‘손과 발’, ‘눈과 귀’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몸에서 비중이 있는 ‘손과 눈’에 비해 그보다 덜한 ‘발과 귀’가 불평하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설명은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발과 손’ 그리고 ‘귀와 눈’ 등은 각각 다른 은사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고 있습니다. 교회 지체들(구성원들)이 자신이 받은 은사를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여 우월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열등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비유를 통해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불평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교회에 덕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본인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각 지체, 혹은 각자가 받은 은사들의 차서를 정할 수 없습니다. 셋째, 몸의 각 기능을 가진 지체가 되게 하셨습니다(17). 본문 17절에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만일 온 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온 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겠습니까? 각자의 지체는 나름대로 고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에서 각 지체는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합니다. 한 몸 안에는 다양한 지체가 있습니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듣는 귀가 없이 보는 눈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반대로 보는 눈이 없이 듣는 귀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모든 지체는 하나의 몸과 함께 유기적으로 생명의 하모니를 이루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지체 간의 관계 또한 상호 대립과 불평의 관계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넷째,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습니다(18). 본문 18절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시는 뜻대로 한 몸에 여러 가지 다른 지체를 두셨습니다. 여기 ‘원하시는 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델레센’과 ‘두셨으니’의 헬라어 ‘에데토’은 부정 과거로서 하나님의 계획과 창조 행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위해 쓰임을 받게 됩니다. 각 지체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지체로서 불순종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역행한 것입니다. 3. 한 몸의 다양한 지체, 서로 다른 기능으로 조화(19-26) 첫째,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입니다(19-20) 본문 19-20절에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19절 말씀은 17절 말씀에 대한 다시 설명한 내용입니다. 모든 지체가 특정 지체만을 좋게 여긴다면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 몸은 정상적인 몸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를 교회에 적용해 보면 교회 내에서 특정 기능의 지체, 혹은 구성원만을 선호하면서 교회가 온전한 설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미 12절에서 한 몸 안에 지체의 다양성을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설명을 본문 20절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다양한 지체가 있지만, 그 지체들은 다른 지체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한 몸 안에서 각 지체의 역할과 기능이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한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 하나의 몸 안에서 각 지체가 자신들이 받은 은사에 따라 사명을 감당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연약한 지체를 존중하여야 합니다(21-23). 본문 21절에는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한 지체가 다른 지체에게 “너는 내게 필요 없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 지체가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따라서 모든 지체는 서로 유기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각 지체는 한 몸을 이루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지체들입니다. 지체라도 없으면, 혹은 기능이 마비되면 다른 지체들이 자신의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특정 개인이 교회를 장악하여 마치 그 특정인들이 교회를 운영해 가도록 하면 안 됩니다. 본문 22절에는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 몸 가운데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오히려 더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란 23절에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 “아름답지 못한 지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과 생각은 판단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 결과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가치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 각 지체를 평가하여 값을 매깁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사람, 덜 중요한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이런 평가는 교회에 분쟁을 가져올 뿐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다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모든 지체가 함께 해야 합니다(24-26). 본문 24절에는 하나님께서는 하찮은 부분을 더욱 귀하게 여겨 몸의 조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몸의 조화는 곧 교회의 조화를 의미합니다. 모두가 다 존귀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지체인 우리를 존귀하게 해 주셨습니다. 본문 25절에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라고 합니다.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야 합니다. 도움이 아닌 시기와 질투가 임할 때 분쟁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26절에는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라고 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게 되면 다른 지체가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즐거워하면 다른 지체도 즐거워합니다. 4. 교훈과 적용 사도 바울은 몸과 그 지체의 기능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설명합니다. 몸의 여러 기능이 생명의 하모니를 이루며 한 몸을 이루는 것과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로서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하나가 되지 못할 때 이를 우리는 분쟁이라 합니다. 분쟁은 교회의 지체들이 하나 되지 않고 각각 따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몸 안에 다양한 기능의 지체가 있듯이 교회도 다양한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지체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생명이 유지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떨어져 나가면 안 됩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붙어있는 연합된 그리스도인들은 각 지체로서 다른 지체와 연합하고 생명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른 지체를 지나치게 극찬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다른 지체를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각 지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무시하거나 멸시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통해 사명을 감당할 때 그로 인해 피해의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받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들의 부요한 은사에 대한 사명을 감당할 때 연약한 지체들이 도움을 받습니다. 그때 각 지체는 함께 울고 웃는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말씀사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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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1심, 이상원 교수 강의 ‘성희롱 인정’ -'강의 설교 주의'총신대학교(총장 이재서 교수)를 정년퇴임한 이상원 교수가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총신대학교’(이사장 김기철 목사)를 상대로 정직 1개월 징계처분에 대해 ’징계무효확인 등‘의 본안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패소하였다고 재판부는 지난 11월 24일 밝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41민사부(재판장 정봉기 판사)는 이상원 교수의 2019년도 2학기 “인간론과 종말론” 강의 중 발언을 성희롱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상원 교수는 “자신의 언행은 교수 방법의 일환이었을 뿐, 학생들에 대하여 우월적 지위에서 비위행위가 아니고, 설령 그로 인하여 학생들이 불쾌감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일반적, 평균적인 사람이 성적 굴욕감, 혐오감을 느꼈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원고에게 성적인 동기나 의도가 있지도 않았으므로 성희롱에 해당하지도 않는다.”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상원 교수가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상대로 성희롱 사건으로 해임처분한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청구(2020. 11. 27) 소송에서 해임을 취소하라는 이상원 교수의 청구를 인용하는 판결 선고(서울행정법원 2021. 8. 26. 선고 2020구합86071 판결) 내용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인용했다. ① 원고[이상원 교수]가 이 사건 수업에서 기독교 성윤리를 강의하면서 인간의 성기, 성행위 등에 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었더라도, 발언의 내용, 맥락, 경위, 발언이 이루어진 장소와 상황, 원고가 당시 남성의 성기와 남성 간 성관계를 상당히 노골적으로 언급한 데에 이어 연달아 여성의 성기와 이성 간 성관계에 대하여 노골적인 묘사를 동반하면서 ‘여성 성기의 경우에는 여러분들이 그 성관계를 가질 때 굉장히 격렬하게 이거 해도 그거를 여성의 성기가 다 받아내게 되어 있다’고 발언하는 등 수강 중인 학생들을 직접적인 예시 대상으로 삼아 여성을 대상화ㆍ수단화하는 수사를 동반하였다. ② 원고는 매 수업시간마다 성적인 예시를 들어왔는데 수업 개요나 수업 목적에 비추어 그러한 예시가 매번 필요한지 의문인데다가 그동안 수업 중 반복되어 온 성적인 예시의 언급은 위와 같은 노골적인 성적 묘사에 대하여 학생들이 상당한 불쾌감을 느끼게 될 수 있는 단초로서 작용하였다고 보았다. ③ 원고의 제1 징계사유와 같은 언행으로 인해 수강 중인 학생들이 실제로 불쾌감을 느꼈다. ④ 원고는 대학교수로 이 사건 수업을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음에도 부적절한 성적 수사를 동반한 행위를 하여 학생들의 건전한 성적 윤리관 확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⑤ 학생들에 대한 직접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수업현장에서 대학교수에게 요구되는 도덕성과 윤리성이 더욱 요구된다. 위와 같은 이상원 교수가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의 판단을 그대로 채용하였다. 또한 이상원 교수는 자신에 대한 ‘정직처분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학교법인인 총신대학교는 자신에게 정직기간[1개월] 동안 지급받지 못한 임금 7,813,300원 및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 청구를 구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이유 없다며 배척했다. 이상원 교수의 강의 내용은 종교단체인 신학교에서 교리적인 문제로 인한 동성애 반대와 관련한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고 오직 대학교 교수의 도덕성과 윤리성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공교롭게도 총신대학교 기독교 윤리학 교수에게 윤리성, 도덕성이 요구된다며 성의롱 강의가 문제있다며 정직 1개월 징계사유를 인정했다. 이제 신학대학교나 교회에서 목회자의 설교에서 성희롱에 대한 판단의 준거가 될 수 있는 문제라는 점에서 주의가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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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대면예배 금지 취소 소송’ 승소교회는 서울시를 상대로 대면예배 금지 처분 취소 소송을 진행했고 승소하였다. 법원의 판결 취지는 종교 자유에 대한 본질적 부분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헌법 제20조 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고 이어서 2항은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했다. 영국의 국왕이 성공회를 국교로 삼고 청교도들을 박해하자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1620년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북아메리카 대륙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도착한다. 이들을 필그림 파더스(순례자)라고 불렀다. 이들은 미국을 세우고 헌법을 만들었다. 미국의 헌법에는 이 사상을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헌법도 그 영향으로 종교의 자유와 정교 분리를 명시하고 있다. 이 법령은 종교를 일방적으로 국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종교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정치와 교회(신앙)은 분리된다는 것이다. 정치와 교회가 분리된다는 것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국가는 교회를 지배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의 헌법과 대한민국 헌법의 사상이다. 그러나 이것을 오해하여 교회가 국가를 간섭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은 매우 답답한 일이다. 심지어 목사들도 이런 오해를 하고 있다. 성경과 개혁신학은 교회와 국가는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신 두 개의 기관으로 그 역할이 서로 다르다고 본다. 그래서 두 기관은 상호보완적 입장을 취하도록 되어 있다. 국가는 교회를 지배하거나 간섭하지 않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재산과 생명을 보호한다. 또한 교회는 국가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의무를 다하며, 복종한다(롬 13:1-3). 그러나 신앙에 위배된 행위를 강제하거나 신앙을 해하는 경우는 항거하며, 국가가 정의와 공의의 길에서 벗어날 때 선지자적 충고를 해야 한다. 이번 코로나19의 유행으로 정부는 교회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강제하는 정책을 폈다. 대면예배를 금지시키는 행정명령을 내린 것이다. 교회와 시민단체들이 이에 대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냈으나 정부는 듣지 않았다. 이에 교회들은 정부를 상대로 대면예배 금지 취소 소송을 했다. 특히 서울지역 소속의 교회들이 서울시를 상대로 대면예배 금지 취소 소송을 했고 승소하였다. 또한 지방자치단체가 처분한 교회의 대면예배 금지 조치가 위법하다는 판결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7월 22일 서울행정법원 행정 11부(부장판사 강우찬)는 서울 염광교회를 비롯한 예배 회복을 위한 자유시민연대(예자연) 소속 교회와 목회자들이 서울시장을 상대로 낸 대면예배 금지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이 사건 처분은 종교의 자유에 대한 본질적인 부분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비례·평등 원칙에도 반하여 재량권을 일탈·남용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서울시는 2021년 7월 12일부터 2주동안 코로나 확산에 따라 수도권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를 시행했다. 그러면서 교회 등 종교시설에 대한 비대면 예배만을 허용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하여 “사람들이 밀집하는 시설인 교회에 집합을 제한함으로써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종교 단체로 하여금 비대면 예배만을 허용하고 있는데, 인터넷이나 TV방송 등 물적 여건을 갖추지 못한 교회는 비대면 예배를 진행할 수 없어 실질적으로 아무런 예배 활동도 할 수 없게 된다”면서 “이는 종교 행사의 전면적 금지를 명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낳게 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어 “종교 시설의 경우에도 결혼·장례식 등과 같이 참석 인원을 제한함으로써 밀집도를 완화하는 방법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조치는 지자체의 행정편의주의로 이해된다.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지하철이나 백화점, 대형마트는 코로나 유행시에도 행정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교회와 같이 철저히 방역을 하고 국민들이 마스크를 철저하게 착용하였다. 그러나 행정적 제재를 하지 않았다. 유독 종교시설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교회는 성경과 개혁신학이 제시하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 종교의 자유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국가는 헌법이 정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만약 질병의 대유행으로 불가피하게 조치가 필요하다면 교회들과 대화를 통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국가와 교회는 각자의 영역이 있고,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상호보완적이며 동시에 분리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김순정 목사/ 새사랑교회, 말씀사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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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37) 하나님 영의 표징(고전 12:1-3)본문 / 고전 12:1-3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11:27-34절 말씀을 통해 “합당치 않게 성찬에 참여하는 자”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성찬식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찬식이 거룩한 의식인 이유는 그것이 거룩한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은 거룩하게 행해져야 합니다. “합당하지 않게” 참여한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구속 진리와 구속 계시의 내용을 담고 있는 성찬을 왜곡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무례한 태도로 참여하거나, 다른 목적으로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의도와 목적으로 성만찬에 참여한 자들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성찬에 참여한 자들은 먼저 “자기를 살피라”라고 말씀합니다. 성찬식에 참여한 자들은 성만찬에 대한 본래의 목적과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믿고 참여해야 합니다. 결국 자신을 시험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피하려고, 자신을 살피면 판단을 받지 않기 위하여 성찬의 의미를 알고 참여해야 합니다. 올바른 성찬식은 모두 모여 같이 식사하기 위해 기다려야 하고, 부자들 배고파서 가난한 자들이 교회에 도착하여 함께 식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거룩한 성만찬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십자가를 기념하며 이를 전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영의 표징”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역사를 증명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과 답변 1.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성령의 은사에 관한 질문(1) 본문 1절 말씀에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합니다. 여기 “신령한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는 이미 고린도전서 17:1절에서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이라고 합니다. 여기 “너희가 쓴 문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질의를 했습니다. 바울은 그 질의에 대해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답변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령한 문제인 성령의 은사에 대한 문제를 이제 언급하면서 12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즉 긍지가 대단했습니다. 그 긍지가 지나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소중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으로 보람을 느끼고 긍지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긍지가 잘못된 판단에 의한 것이라면 문제가 됩니다. 그 긍지는 오히려 하나 된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를 예배 때에 경쟁적으로 과시합니다. 자랑합니다. 자신이 받은 성령의 은사와 다른 사람이 받은 성령의 은사를 비교하여 자신이 받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우월성을 과시합니다. 그래서 예배가 무질서를 조장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를 언급하면서 가르칩니다. 그 성령의 은사를 말하기 전에 먼저 본문인 1~3절에서 성령의 진정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고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근거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기초를 제공합니다. 이를 기초로 하여 12:4-11절에서는 한 분이신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 그리고 12:12-23절에서는 한 몸의 다양한 지체들에 관해 설명합니다. 이어서 13장에서는 성령의 가장 고귀한 은사로 ‘사랑’을 언급합니다. 모든 은사는 교회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데 있음을 말씀합니다. 본문 1절에서 바울은“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이러한 신령한 은사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바른 성경적 지식은 우리들의 올바른 태도와 자세, 행동을 낳게 합니다. 실천적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과 이해를 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언어와 행위는 그 사람 마음의 표현입니다. 마음으로 신령한 것에 대해 어떤 생각과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행위의 결과는 달라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령한 것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바른 지식에 대해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바른 진리로 무장하지 아니하면 사단의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점도 유의해야 합니다. 착각 2. 잘못된 우상에 빠진 황홀경을 은사로 착각(2) 본문 2절“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신령한 것들에 관해 말하기 전에 잘못된 견해를 언급한 내용입니다. 마치 은사를 거짓 신인 이방인들이 우상으로 인한 영적 황홀경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지역을 포함한 헬라 세계에서 신이 내리면 영적인 황홀경 상태가 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적 황홀경을 높이 평가했으며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영적 가치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 영적 황홀경은 언제나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우위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가치관과 영적 세계관을 가진 고린도인들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그런 이방인의 우상으로 인한 영적 황홀경과 같은 현상은 교회 안에서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서 이런 영적 황홀경이 인정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 우상을 섬기는 방법으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 안에는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예배가 무질서해졌습니다. 신앙에 대한 질서 역시 무질서해졌습니다. 이방 신을 통한 영적 황홀경이 성령의 은사로 둔갑 당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바르게 진단하고 바른 성경적 신령한 영적 은사들에 관해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는 우상은 인간이 나무를 쪼아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우상은 생명이 없습니다. 아무런 활동도 못 하는 ‘벙어리 우상’일 뿐입니다. 시편 115:5절에 “그들의 신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46:7절에“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 우상은 그것을 어깨에 메어다가 일정한 곳에 둡니다. 그 우상은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합니다. 사람이 기도하여도 응답해 주지 못합니다. 환난에서 구해 주지 못합니다. 문제는 사탄의 하수인인 귀신이 인간들의 우상숭배를 이용하여 그들을 황홀경에 빠뜨리게 합니다.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옵니다. 죄악을 조장합니다. 고린도 전서 10:20절에“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라는 말씀에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 제사는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귀신들과 사귀는 것을 금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영적 황홀경이 그 귀신들의 영향이라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음을 언급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마치 이런 귀신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기준 3. 성령의 역사로 인한 신령한 은사(3) 바울은 본문 3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것이 진정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영의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역사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배 때에, 혹은 일반적으로 영적 황홀경에 빠지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역사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과거에 믿기 이전, 우상숭배 시절에 했던 영적 체험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황홀경으로는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합니다. 오직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예수가 주이시다”라는 고백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고백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표징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고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하나님 약속의 말씀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께 구원받은 유일한 길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에 대한 표징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구원을 얻게 하는 고백입니다. 로마서 10:9절에“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초반부에서 언급한 대로 세상의 지혜로는 불가능합니다. 오로지 성령이 사람들의 영적 눈을 뜨게 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복음을 깨닫도록 합니다. 이런 역사로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에게 고백하게 합니다. 결국 본문에서 사도가 언급한“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많은 사람은 예수가 자신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저주는 나와 우리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죽으셨습니다. 이 죽음을 대속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성령의 역사, 혹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올바른 개념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신앙의 혼란이 없습니다. 이단에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1) 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고백한 자들에게 성령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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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 하나님-성령 이해(1) '성령의 약속'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 예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였다.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하였다. 부활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하게 전파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라고 말씀하셨다(눅 24:46-48). 그러고 나서 누가복음 24:49절에서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로마 식민지로 있던 시대에 로마 총독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했다. 자신들의 보호자이며, 변호자인 보혜사였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으니 제자들의 불안과 공포를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공생애 동안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말씀한다(요 14:16). 예수님은 성령의 그냥 보혜사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기도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그가 와서 자신이 했던 일을 하실 것임을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혜사를 약속하시고 그를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이 함께 해 주셨던 것처럼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과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라고 하셨다. 사도 요한은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라고 하셨다. 여기 ‘대언자’란 희랍어 ‘파라클레토스’로서 보혜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는 그가 친히 보혜사였다. 이제 예수님이 부활한 후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라고 말씀하신다(눅 24:51).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떠나시므로 다른 보혜사를 보내사 제자들과 함께 하기며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실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권세와 능력을 주시고 또한 진리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다른 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서 떠나가심으로 오시게 되어 있다. 다른 보혜사가 오시기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야 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제자들의 곁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다른 보혜사인 성령은 영으로 오셔서 영원히 제자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신다. 그리하여 기쁨과 평강이 늘 충만하게 된다. 이제 다른 보혜사인 성령은 영원히 떠나지 않고 함께 하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 그래서 늘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제 성령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영원히 함께 계신다. 이제 약속하신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약속되었다. 그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증거하시고 해석하고 조명하신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계시하신 말씀을 깨닫도록 해 주신다.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복음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보혜사인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므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신다. 복음이 믿어지도록 우리를 깨우치고 감화하신다. 이렇게 하여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계속하시고 적용하시는 일을 하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시다. 이는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자기를 나타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자기를 숨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를 기뻐하셨다. 그래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해 주셨다. 제자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예루살렘에 머물러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다. 거저 받은 것이지 쟁취하여 받은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약속하시고 부활 후 40일 만에 승천하셨다. 승천 후 10일 후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다. (다음 오순절 성령)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말씀사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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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창립 110주년 기념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올해 9월 19일에 제107회 총회로 모인다. 이 총회가 창립된 지 110주년 총회가 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안에 최고 치리회로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이다. 장로회 치리회 제도가 1912년 총회가 창립되므로 완성되었다. 1912년 총회가 조직될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알아본다. 한국선교의 시발점 한국선교의 시발점은 1884년이 아닌 1879년이다. 한국선교의 시작은 선교사의 입국한 날(1884. 9.20)을 선교 시발점으로 삼고 있지만, 사실은 한국인 최초로 만주에서 로스 선교사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파송 받은 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1879년 최초로 백홍준, 이응찬, 김진기, 이성하 등이 세례를 받아 성경 번역과 서북지역에서 전도했던 그해가 한국교회 선교 출발이다. 선교사 공의회 조직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여 피선교지인 한국에 복음을 전했다. 그 복음의 근거가 되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 1907년 6월 30일 현재 지교회는 785개 처였다. 오늘날 기도처에 해당한 회당은 687개 처였다. 세례교인만 18,081명이었다. 이렇게 선교가 폭발적으로 이루어지자 조선인에 의한 독립된 노회가 조직되기 전에는 선교사 중심의 공의회를 조직하여 전국 교회를 관리했다. 선교사만으로 조직한 공의회(1893-1900)를 조직했다. 초대 회장은 이눌서 선교사였다. 한국인 장로와 조사와 함께한 합동 공의회(1901-1906)를 조직했으며 초대 회장은 소안론 선교사였다. 합동 공의회는 한글 공의회와 영어 공의회로 구분했다. 한글을 사용한 공의회 서기는 서경조였다. 합동 공의회(1901)에서는 평양 공의회 위원을 평안 공의회 위원으로 개칭했다. 기관지와 찬성시 본 위원회가 올린 신학교 설립을 허락했고, 신학 위원을 통해 학사 일체를 결의하고 장대현교회 장로 김종섭, 방기창 두 사람의 취학을 예비케 했다. 당시 미북장로회 선교회에 발행한 기독신문을 공의회가 이를 인수하여 기관지로 발행하도록 했다. 1902년 찬성시(贊成時)로 장로교회가 사용할 것을 채용하고 타 교파와 교섭하여 이를 같이 사용할 찬송가를 편찬키로 하고 위원을 선정했다. 1904년부터 <예수교회>라고 했다. 이때 가정과 결혼의 신성성을 보존하기 위해 “婚姻事協議委員”을 선정하고 결혼과 이혼에 대해 결의를 했다. 공의회의 각 지역 7개 공의회 소회 1901년에 이미 존재한 평안공의회위원, 경성공의회위원에 이어 전라공의회위원, 경상공의회위원을 증설했다. 1902년 공의회에서는 함경공의회위원을 증설했고, 1904년에 공의회에서는 현존하는 공의회 위원을 <공의회 소회>로 개편했다. 1907년 공의회에서는 황해공의회위원, 평북공의회위원을 설립했다. 이로써 독노회 조직 이전에 7개 공의회 소회로 전국 교회를 관리하였다. 이로써 평안공의회 소회, 평북공의회 소회, 황해공의회 소회, 함경공의회 소회, 경성공의회 소회, 전라공의회 소회, 경성공의회 소회 등이 존재했다. 공의회 최종 목표는 1907년에 첫 조선 목사가 임직할 때 노회를 창립하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제반 규칙, 헌법 신경 등을 제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독노회 조직전 놀라운 부흥 이렇게 하여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기까지 서북지역 중심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부흥을 역사를 “평양 대부흥”이라 한다. 1901년부터 1910년 사이에 일어난 초기 부흥은 원산에 있는 감리회 하디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회개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서북지역으로 확산하였다. 1907년 서북지역이 중심이 되어 한국에 최초의 독립된 노회인 독노회(1907-1911)가 창설되어 전국 교회를 관리, 감독하게 되었다. 이제 합동 공의회 시대에서 장로회의 치리회인 노회 제도로 출발했다. 국권 상실과 의병활동 1905년 일제가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우리나라는 절망과 실의에 빠졌다. 암흑의 터널을 지나가는 형국이었다. 1907년 6월에 일어난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의 양위를 단행했고 7월에는 조선군대를 해산시켰다. 우리나라는 일제의 손에 넘어갔다. 전국적으로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싸웠다. 교회는 이에 기도하는 데 힘썼다. 1907년 8월부터 1909년 사이에 전사한 의병 수는 16,700명, 부상자 36,770명에 이르렀다. 이런 희생 속에서 1909년 10월 26일, 일본의 조선 합병에 대한 러시아의 양해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러시아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이토오 통감을 하얼빈역에서 천주교 신자인 안중근 의사가 권총으로 민족의 원수를 사살함으로써 그 절정을 이루었다. 한일합방 그러나 1910년에 이르러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제에 우리 의병 군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1910년 8월 29일에 일제 각료회의에서 결의를 끝내고 기다리던 일제는 드디어 한일합방을 대내외에 공포하기에 이른다. 우리 민족은 교회는 충격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영적 각성 운동으로 나갔다. 민족적 위기 때 100만 명 구령 운동과 전도인, 선교사 파송 일제에 의해 한일병탄이 공포된 지 21일 만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제4회 독노회는 1910. 9. 18. 오후 2시-22일까지 선천 염수동 예배당에서 열렸다. 이때 목사 회원 55명, 장로 총대 74명, 합계 129명이었다. 이때 결의사항은 100만 구령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일본 동경에 박영일 씨를 전도인으로 4개월 동안만 파송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김경제 목사를 북간도 본도 목사로 파송했다. 그리고 북평안 대리회에서 김진근 목사를 청국 관동 등지에 동포들을 위해 전도 목사로 파송했다. 나라를 잃은 서러움 속에서도 전도와 선교는 계속되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100만 구령 운동이었다. 제4회 독노회 셋째 날인 20일에 독립협회 평양지부 법무국장을 역임한 길선주 목사가 일어나 작년(1909)에 선교사들에 의해 구호로 내걸었던 백만 명 전도 운동을 우리 조선교회가 다시 해야 한다며 발언했다. 이에 이의가 없이 이 안건이 채택되었다. 게일(L. S. Gale) 선교사는 이 운동에 대해 “그 큰 운동(백만 명 구령운동)은 한국에서 특이한 노력을 요청하는 것이다. 백만 명의 구령이라는 소리는 민족의 실망이 절정에 다다른 이때 널리 울려 퍼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은 결정의 날이다. 우리는 내일을 기다릴 수 없고, 예언할 수도 없다. 오늘이 전도하는 그 날이요, 이곳이 전도할 그것이다. 활짝 열린 전의 문 앞에 겸손하게 서 있는 수많은 백성과 심정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선교사들은 이때가 한국의 중대한 고비라고 확신하고 있다.”라고 했다. 100만 명 구령 운동과 첫 전국 순회전도 집회 이렇게 하여 백만 구령 운동이 진행되었다. 독노회(4회)가 마친 후 마침 동양지역 순회전도 중이던 미국인 부흥사 채프만(J. W. Chapman)과 알렉산더(C. M. Alexander) 등을 청빙하여 백만 명 구령 운동을 위한 부흥회를 인도하게 했다. 이 일행 중 데이비스(G. T. B. Davis)만 남아 계속 지방을 순회하면 부흥회를 인도하였으며, 백만 전도 운동을 독려했다. 이렇게 하여 전국적으로 이 운동이 확산하였다. 100만 구령 운동, 교회수 증가 이 운동이 시작할 당시인 1910년에 교회 수는 1,632개 처였다. 그러나 1913년에는 일제의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2,247개 처로 615개 처가 증가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100만 명 구령 운동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집단화되고 세력화되는 것을 염려했고 긴장했다. 일제는 이 운동을 “100만 명의 기독교 십자가 군병”으로 오해했다. 단순히 종교운동을 보지 않고 정치운동으로 바라보았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하였고 일제는 이를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감시는 압박으로 이어졌다. 일제는 교회를 탄압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100만 구령 운동에 반응하는 일제 일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4회 독노회(1910. 9. 18)가 끝난 후인 1910년 12월 29일에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이 선천을 지나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암살하는 음모가 있었다는 것으로 사건을 날조하여 핍박의 기회로 이용했다. 데라우치는 1910년 5월 조선 총독에 임명되어,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해 1910년 8월 22일에 합방조약을 받아들이도록 한 인물이다. 한국 사람이 그를 싫어했으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그를 역이용하여 음모를 꾸몄다. 105인 사건(3년 동안 재판) 당시 신민회 간부인 윤치호, 영기석, 유동설, 이승훈 등과 기독교인 600명 등 700여 명을 체포하여 그 가운데 123명을 투옥했다. 그중에 사실관계와 증거를 조직하여 105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것이 바로 ‘105인 사건’이다. 105인을 포함한 123명 가운데 98명이 장로교인이었고 이들 가운데 1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선천과 평양의 교회 출신이었다. 이들에 대한 고문을 통해 총독을 살해할 음모를 꾸민 자가 교회 지도자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어 재판을 강행했다. 재판 과정의 심리에서 고문에 의한 자백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길선주 목사의 아들인 길진형도 온갖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일제는 이 재판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골치 아픈 재판으로 평가했다. 일제의 총독 암살 음모, 허구성 폭로 이 재판은 3년 동안 이어졌다. 재판 과정에서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은 그 허구성이 폭로되었다. 서북지역 지도자들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선교사들은 조사 과정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야만적이요, 비문명적”이라는 비판을 했다. 105인 사건이 100만 명 구령 운동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가 마치 애굽에서 히브리 민족을 번창을 막기 위해 핍박한 것과 같은 기독교 운동을 억압하려는 일제는 기독교 세력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5년 2월 13일, 형이 끝나기 전에 투옥된 모든 자를 석방하는 등 유화적인 제스처를 통해 선교사들과 관계 개선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제스처에 불과했다. 기독교의 부흥과 더불어 사탄의 하수인으로 등장한 일제는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105인 사건을 조작했지만 그럴수록 기독교는 내리막길로 가는 것이 성장했다. 이런 가운데 1912년 9월 1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창립되었다. 총회가 창립되기 전후로 날조된 105인 사건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마지막 독노회(제5회) 피선교지인 조선에 독립된 노회가 설립(1907)된 지 5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총회 창립을 1912년으로 계획을 세웠다. 9개 대리회를 7개로 축소하고 1912년 3월 이전에 7개 노회를 모두 조직 완료하기로 결의한 후 총회 창립을 준비했다. 9개 대리회 중 조선 목사 수가 적은 남경상과 북경상, 남전라와 북전라를 각각 하나로 통합하여 최종 결정되었다. 1907년 독노회를 창립한 후 전국에 세워진 교회는 1,100개 처가 넘었다. 그런데도 총회를 창립하지 못했다. 아직 전국 교회를 위한 목회자 수급에 문제가 있었다. 그때까지 졸한 수는 제1회(1907) 7명, 제2회(1909) 8명이 고작이었다. 1904년은 러일전쟁으로 인해 신입생을 뽑지 못했다. 그래서 1908년은 졸업생이 없었다. 제3회(1910) 졸업 예정자는 27명이 쏟아져 나와 안수받은 제4회 독노회 때에 총회가 창립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경북대리회는 아직 조선 목사가 없었다. 그래서 1912년 9월 1일에 총회를 창립했다. 1911년 졸업 예정자 가운데 16명 가운데 경북 출신 2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전국적으로 모든 대리회가 조선 목사가 시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1911년 제5회 독노회(1911. 9. 17. 오전 9시-22, 대구 남문안예배당)에서 목사 회원 46명, 장로 총대 105명, 선교사 46명으로 총합계 197명의 출석으로 독노회의 마지막 독노회가 열렸다. 제5회 독노회에서 총회 창립키로 총회조직을 위해 파송 총대는 “총회를 조직하면 그 회원 될 자는 노회에서 보낸 총대인데 곧 노회마다 다섯 지회에서 목사와 장로를 각 한 사람씩 보낼 것이나 총회 첫해와 그 후 매 3년마다 총회원 될 자는 각 노회에 모든 목사와 각 당회에서 총회 전 노회에 총대로 왔던 장로들이요.”라고 결의했다. 또한 “명년에 총회를 조직키로 하고 7개 노회를 설립하기로 하고, 그 이름은 북평안, 남평안, 황해, 경충, 전라, 경상, 함경으로 함. 노회지경은 전 대리회 지경으로 한다.”라고 했다. 7개 노회 조직 회장은 “노세영(북평안), 주공삼(남평안), 이원만(황해), 원두우(경충), 김필수(전라), 왕길지(경상), 부두일(함경).” 등이었다. 제5회 독노회(1911. 9. 17)에 노회 조직에 관한 세칙보고에서 “일곱 노회를 조직할 회장은 북평안 노세영(선교사), 남평안 주공삼(목사), 황해 이원만(목사), 경기 원두우(선교사), 전라 김필수(목사), 경상(왕길지(선교사), 함경 부두일(선교사) 제씨로 정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들 회장은 그 지경 각 목사와 각 당회에 합당한 광고를 한 후에 작정한 날과 처소에서 노회를 조직할 것인데 마땅히 명년 3월 1일 안으로 모일 것”으로 보고됐다. “내년 총회 모일 일자는 9월 첫 주일로 전하고 지금 노회장과 서기가 총회 조직할 회장과 서기가 될 것이요, 또 각 놓회가 조직한 후에 만일 사고가 있을 것 같으면 이 작정한 날 전이라도 회장이 합당한 광고를 한 후에 모이게 할 수 있사오며.”러고 보고되었다. 노회 지경은 이전 대리회 지경으로 하였다. 총회 조직을 위한 7개 노회 조직 이같은 대리회가 1912년에 각 노회로 조직되면서 7개 노회로 총회가 조직되었다. 1912년 총회조직을 앞두고 각 대리회가 노회로 승격하여 7개 노회 중심으로 1912년 9월 1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1884년 9월 20일에 최초로 평신도 선교사인 알렌 선교사와 1885년 5월 5일에 입국한 최초의 목사 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입국 이래 23년 만에 조선에 독립 노회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 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창립되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28년 만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최고 치리회인 총회가 창립되었다. 총회 조직으로 조선교회의 치리회 제도 완성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창립은 이제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완전한 치리회 제도를 실현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로부터 110년이 지났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110주년을 맞이한 올해 제107회 총회는 2022년 9월 19일 주다산교회(권순웅 목사)에서 열린다. 1912년 9월 1일에 조직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역사적인 정통성, 신학적 정통성을 이어온 합동 측은 1951년 고신 측과 분열, 1953년 기장 측과 분열, 1959년 통합 측과 분열, 1979년 개혁 측과 분열이 있었다. 총회 110주년(합동), 역사적, 신학적 정통성 계승 1980년 9월에 개최된 제65회 총회는 부산 부전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개혁 측이 분열해 나간 후 첫 총회로서 교권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이영수 목사가 총회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3번째 총회장이 되었다. 개혁 측의 분열로 다시 총회를 정상화하며 시작했던 총회가 바로 올해 9월 19일에 개최된 제107회 총회(합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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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36] 합당치 않게 성찬에 참여하는 자본문 / 고전 11:27-34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 전서 11:23-26절 말씀을 통해 “주의 성만찬”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성만찬에 대한 권위의 근거는 주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만찬이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것으로 떡을 찢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은 이 떡이 찢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준 것처럼 예수님의 육체가 십자가 못 박힘으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되는 구원을 받을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 성만찬을 통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식후에 잔을 가지시고 이는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비롯하여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은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되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합니다. 즉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고린도전서 11:27-34절까지 말씀을 통하여 “합당치 않게 성찬에 참여하는 자”라는 제목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성찬식은 거룩해야 합니다. 왜 거룩해야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념할 때마다 주의 사항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합당한 성찬 참여 1. 성찬식 때 합당하지 않게 참여하는 자(27) 본문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호스테)라는 단어는 바울이 27절 이전에서 말한 전승된 성만찬에 대한 말씀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적용해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즉 사도는 성만찬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23-25절)과 자신의 견해(26절)를 밝힌 후 고린도 교인이 처했던 상황에 적용해 고린도 교인의 잘못된 행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먼저 성찬식에 “합당하지 않게” 참여한 자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는 이미 21절에서 언급한 내용과 같습니다. 21절에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이런 식의 성만찬 참여는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씀입니다. 성만찬이 그 본질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구속 진리와 구속 계시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무례한 태도로 참여하거나, 다른 목적으로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의도와 목적으로 성만찬에 참여한 자들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습니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속적 죽음을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진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란 성찬에 참여한 자가 마음속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못되고 죄만 지었기 때문에 나는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마음 자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죄가 있어서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온전한 사람만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문제투성인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죄로 인해 병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예배에 참여하고 성찬에 참여합니다.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대소요리문답 제172문에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혹은 성찬에 합당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의심하는 자도 성찬에 참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자신을 의심하는 행위 자체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아직 확신하고 있지 못할지라도 믿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런 의심을 버리고 강한 믿음을 갖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합당하지 않게”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에 대한 갈망이나 믿음을 갖지 않고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의 비밀을 외면하고 성만찬을 단순히 음식의 상(床)으로 생각한다거나, 자신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성만찬에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시험 2. 성찬식 참여 전에 자신을 시험해 보라(28) 본문 28절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합니다. 본문 28절은 우리 한글 성경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만찬을 합당하게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27절에서 합당하지 않게 참여하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28절에서는 그러면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고린도인들에게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을 ‘시험해 보라’고 합니다. 본문에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에서 살핀다는 말(도키마조)은 시험하다(test)를 의미합니다. 성찬식에 참여한 자들은 성만찬에 대한 본래의 목적과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믿고 참여해야 합니다. 결국 자신을 시험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도덕적 완전성이 성찬식의 합당한 참여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 대한 태도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점검 3. 성찬식에 참여하기 전 자기 점검의 필요성(29-32) 첫째,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29). 본문 29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왜 자기 점검이 필요합니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성찬식 참여가 오히려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분별하지 못하고”라는 단어는 “구별하지 못한다”라는 말로써 ‘판단하지 못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몸을 구별하지 못한 것, 즉 성찬식 때 떡과 잔을 일반적인 음식에서 떡과 잔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떡과 잔으로 상징된 주님의 몸을 경건하게 거룩하게 다루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떡과 잔을 일반 식탁의 떡과 잔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자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30). 본문 30절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성찬에 합당치 않게 참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기 때문에 자신을 점검하고 성찬에 참여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의 병든 자와 죽음의 경우들을 그들의 성찬식에 대한 범죄에 대한 주의 심판의 증거로 봅니다. 본문에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에서 잠자는 자는 죽은 자를 의미합니다. 셋째, 자신을 살피면 판단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31-32). 본문 31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라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피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살피고 성찬식에 참여한다면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며 시험한 후에 성찬식에 참여하게 되면 우리는 주의 심판을 받아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린도인들 중 일부가 병약해지고 죽는 일까지 발생한 것은 그들의 범죄들과 더불어 성찬식을 훼손했기 때문에 당하는 주의 심판이었습니다. 본문 32절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합니다. 이러한 징계와 심판은 영원한 멸망이나 처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돌아오도록 하는 징계의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신다.”(잠 3:12)라는 말씀을 적용합니다. 주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징계를 통하여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에 충실하게 하여 최후 심판에서 멸망 받지 않게 하십니다(히 12:5-10). 올바른 성만찬 4. 결론 : 바울의 올바른 성만찬을 위한 권면(33-34) 본문 33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34절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성찬식이 올바른 거행을 위해 구체적인 권면을 합니다. 첫째, 그들은 모두 모여 같이 식사하기 위해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 부자들 배고파서 가난한 자들이 교회에 도착하여 함께 식사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자기 집에서 미리 먹고 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지금 그들이 행하는 대로 성찬식을 범하면 그들은 축복을 위하기는커녕 심판받으러 모이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거룩한 성만찬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십자가를 기념하며 이를 전해야 합니다. 이를 순종하는 자, 새 언약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주의 은총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성찬식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하는 통로가 될 뿐입니다. 본문 34절 하반 절에서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나머지 다른 문제들은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고린도 방문 때(16:5) 직접 만나 바로 잡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교회에서 거룩한 의식인 ‘성례’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모든 성도는 성만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한 대속의 은혜를 이 우리의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찬에 참여하는 자로 세례를 받은 자로 제한합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자들에게 교회가 공적으로 베풉니다. 대소요리문답 제165조에 의하면 세례란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음을 정하신 신약의 한 성례이다”라고 말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유형 교회에 가입하여 책임 있는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세례를 받는 자들은 성찬에 참여하는 거룩한 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성찬에 참여하여 그 성찬의 의미에 합당한 의미를 묵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누리면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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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35] 주의 성만찬본문 / 고전 11:23-26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 전서 11:17-22절 말씀을 통해 “교회의 분쟁과 인정받지 못한 성만찬”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 분쟁, 즉 파당의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결코 이를 칭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고린도 교인들의 모임은 편당(偏黨)을 이루어서(19절)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22절) 주의 만찬이 왜곡되어 유익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해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만찬”이 아니라 “자신의 만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만찬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주님의 지체들과 교제를 깨뜨리는 만찬은 성만찬이 될 수 없었습니다. 성찬식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지체로서 서로 교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하나 됨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서로에 대한 미움과 갈등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 됨의 파괴되고 주의 만찬이 왜곡되므로 그로 인한 거룩한 의미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고 분쟁으로 혼란을 겪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교회는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번에는 본문 11:23-26절까지 “주의 성만찬”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성만찬을 말하기 위해 이미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11:17-22절까지 잘못된 주의 만찬에 관해서 언급했습니다. 사도는 잘못된 주의 만찬을 언급하고 나서 이제 무엇이 주의 만찬, 즉 성만찬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만찬(23-25) 사도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이 올바른 성만찬인지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 내용은 오늘날 우리 교회가 성만찬에 대해서 바른 의미를 배워야 합니다. 바른 의미뿐만 아니라 그 형식도 배워서 바르게 시행하여야 합니다. 첫째,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23, 상). 본문 23절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 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이러한 주께 받은 것을 전했습니다. 여기 ‘전한 것’과 ‘받은 것’은 전통적으로 전승하여 계승된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주께 받은 것”이란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전승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계시로 직접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갈 1:12). 이 성만찬의 원천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이 성만찬이 자기보다 먼저 그리스도인 된 자들로부터 전승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를 계시로 받았습니다. 이 성만찬은 교회의 신앙생활의 기본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미 이러한 성만찬에 대해 고린도 교회가 시작할 때부터 전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몰랐다는 말로 핑계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성만찬에 대한 권위의 근거는 주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만찬이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라고 합니다(23, 중).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배신을 당하시던 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성만찬 의식은 최후의 밤에 앞으로 일어날 십자가의 죽음을 내다보면서 진행된 의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잡혀서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이러한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대적자들에게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거룩한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성스러운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거룩한 밤이었습니다. 엄숙한 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오시는 그날 밤도 거룩한 밤이었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도 거룩한 밤에 이루어졌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흑암의 권세로 가득한 칠흑 같은 밤에 거룩한 생명의 빛을 바라보는 밤이었습니다. 셋째, “밤에 떡을 가지사”라고 합니다(23, 하) 마태복음 26: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라고 합니다. 여기 “그들이 먹을 때”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상에서 떡을 취하여 들어 보이셨습니다. 그때가 바로 유월절 때였음으로 당시 사용된 떡은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이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예언과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제 거룩한 의식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떡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것으로 떡을 찢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줍니다. 마치 예수님은 이 떡이 찢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준 것처럼 예수님의 육체가 십자가 못 박힘으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되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넷째,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합니다(24). 24절에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기 전에 “축사하시고”라고 합니다. 먼저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셨습니다. 공관복음인 마태복음 26:26절과 마가복음 14:22절에는 “축복하시고”라고 기록됩니다. 누가복음 22:19절에는 본 구절과 같이 “축사하시고”라고 합니다. 축사와 축복은 같은 뜻입니다. 이는 둘 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감사하면서 축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떡을 ‘떼어’라는 말씀은 성찬 의식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고 합니다. 떡을 떼어 나누어 주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을 당하는데 이러한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를 화체설(化體設)로 주장합니다. 화체설이란 성찬식 때 신부가 축도하면 그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주장입니다. 루터에 의한 루터교에서는 공재설(共在設)을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떡 속에 예수님의 살이 있으며, 포도주 속에는 예수님의 피가 같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본문에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식사를 위해 떡을 부수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이는 다음날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몸이 부수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몸’(교회)을 이루게 됨을 의미합니다. 다섯째,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나를 기념하라”라고 하십니다(25). 본문 25절에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신 다음에 잔을 가지사 그것을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마시도록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빨간 포도주가 담긴 잔이 다음날 다가오는 자신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피 흘림)의 의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의 피”는 출애굽기 24:8절에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라는 말씀처럼 이 언약을 성취하는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대한 구속의 은혜를 입어 그 새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회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기념하라”, “나를 기억하기 위해 이것을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기억함’ 또는 ‘기념함’은 유대 전통(출 12:14)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 만찬을 되풀이하면서 그 만찬에서 출애굽기의 기사를 낭독합니다. 그렇게 낭독함으로써 출애굽 사건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기념) 하였듯이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과거 하나님의 구원을 현재화하였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주의 만찬”을 계속 반복하면서 그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기억’(기념)하여 오늘 나에게 ‘현재화’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적 은혜를 날마다 묵상하고 기억하면서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2.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해야 합니다(26). 본문 26절에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26절에서 성찬에 대해 말씀한 이후 성찬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되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합니다. 즉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첫째, 성찬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은 그 십자가를 증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에게 임하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구원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러한 복음을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복음 선포가 바로 성만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찬을 통한 복음 증거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잔은 우리의 배고픔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위대한 복음이며, 이 복음이 성찬의 의미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 성찬에 대한 의식은 일시적으로 주어진 의식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돼야 할 의식입니다. 이 의식을 거룩한 의식이라 하여 ‘성례’라고 합니다. 교훈적 적용 요한복음 6:5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1세기 초대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인들은 식인종으로 오해를 받아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를 오해할 때 주후 3-4세기에 교부들은 변증하였습니다. 이들을 변증가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교를 오해한 자들에게 성경적 진리를 보호하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공격하여 바른 진리를 지키고 계승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는 의미는 거룩한 성찬에 참여하여 떡을 떼어 먹고 포도주의 잔을 마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에 대한 십자가를 믿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주의 만찬”을 행하여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를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러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종들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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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34] 교회의 분쟁과 인정받지 못한 성만찬본문 / 고전 11:17-22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 전서 11:2-16절 말씀을 통해 “예배 때 여자는 왜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입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남자의 영광입니다. 따라서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욕되게 합니다. 반대로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인 남자를 욕되게 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공적 예배 때에 공적인 기도나 예언하는 자, 즉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면 안 됩니다. 그러나 여자는 반드시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합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기 때문에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으면 남자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자가 머리를 미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남자와 여자의 차별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님 창조의 섭리요, 질서입니다. 바울은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자음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자가 남자에게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고 말함과 동시에 모든 것은 하나님에서 났음이라고 합니다. 사도는 이러한 하나님 창조의 질서를 언급하면서 여자는 너울을 쓸 것을 말씀합니다. 이는 모든 교회의 관례라고 합니다. 오늘날 개신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 여자가 너울을 쓰지 않습니다. 너울을 쓰지 않는 대신 여자에게 너울을 쓰지만 남자는 너울을 쓰지 않는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를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여 예배 모범을 규범적으로 관례화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본문인 고린도 전서 11:17-22절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분쟁과 인정받지 못한 성만찬”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교리적인 복음의 내용에 관한 문제가 아닌 규범적인 관례와 전통에 관한 문제를 잘 지켜 온 것에 대해 칭찬을 했습니다(11:2). 그 관례 중의 하나가 바로 예배 때에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11:2-16절까지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부터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인정받지 못한 성만찬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 거룩한 하나님 교회의 무익한 모임(17) 본문 17절에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명하는 이 일”을 언급하면서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칭찬하지 않는 “이 일”은 이미 11:2-16절에서 언급한 예배 때에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인지 아니면 본문 17절 이하에서 언급된 성만찬에 대한 일인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이 일을 명하면서 나는 너희를 칭찬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 일”이 앞의 여자가 머리에 너울 쓰는 문제인지, 아니면 뒤엣것을 언급한다면 그는 ‘이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명하면서 나는 너희를 칭찬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왜 칭찬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이는 너희의 모임이 … 해로움이라”. 이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칭찬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모임은 편당(偏黨)을 이루어서(19절)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고(22절) 주의 만찬에 불경하게 참예하였기 때문에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공적 모임이 유익을 되기보다 오히려 해로움이 되었습니다. 공적 예배가 예배로서 기능이 상실되어 믿는 공동체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유익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해를 줄 뿐입니다. 이 모임은 고린도 교회 구성원이 서로 하나 되어 연합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제각각입니다. 서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서로 이해 당사자들끼리 파당을 짓습니다. 그래서 소란을 일으킵니다. 거룩한 모임은 모두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 됨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으로 하나가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코 그들을 칭찬할 수 없습니다. 칭찬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책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칭찬 일변도로 가면 안 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로 모든 잘못을 합리화시켜주는 칭찬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책망할 때는 책망해야 합니다. 때로는 책망이 칭찬보다 효과가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2. 고린도 교회 분쟁의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18) 본문 18절에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가 고린도 교회 안에 분쟁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있는데, 어느 정도 그것이 사실임을 나는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 분쟁이 있다는 소속을 들었는데 사도 바울은 그것을 사실로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8절을 시작하면서 우리 성경에는 ‘먼저’라고 했는데 이 단어는 ‘첫째’(프로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첫째로, 최초로, 처음에’라는 뜻이 있습니다. 첫째의 이야기는 고린도 교회 분쟁이 있다는 이야기이고, 두 번째는 성만찬 거행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첫째,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라고 합니다(18,상). 사도 바울은 먼저, 첫째로 “너희가 교회에 모임 때에"라고 합니다. 여기 ‘교회’(엔 테 엑클레시아)에서 관사 ‘테’은 공인 본문에는 삽입되어 있으나 고대 사본(A,B,C,D)에는생략되어 있습니다. 관사 ‘테’가 없을 경우, ‘교회에’는 ‘모임의 장소’가 아니라 ‘모임’을 가리킵니다. 이로 볼 때 ‘교회’를 모임의 장소 개념과 모임의 성격에 대한 의미를 다 포함하여 이해해도 무방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의 교회 안에 소규모의 모임과 집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공적 모임은 거룩한 무리의 모임입니다. 이 모임과 집회는 일반 사회에서 모이는 그 떤 회의체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하며, 거룩한 백성들이 성령의 임재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기 위한 모임입니다. 인간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인간을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특정 인사를 일으켜 세워놓고 손뼉 치지 않습니다. 이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과 찬양을 특정 개인에게 돌리는 행위입니다. 손뼉을 치는 교회나 이를 받은 특정 개인에게 절대로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아닌 특정 인간의 영광을 위해 예배가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라고 합니다(18, 하). 사도 바울은 분쟁을 거론합니다. 여기 분쟁은 분파입니다. 분쟁(분파, 1:10)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뜻은 “옷에 생긴 찢어진 틈(마 9:16)”, “의견이 분분함”(요 7:43), “감정상의 소외”, 또는 “내적인 분열”, 교회에 적용되어 교회로부터의 불법적인 이탈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분쟁은 아니었습니다. 믿는 공동체 구성원끼리 서로 교통하기를 거절하고 서로 당을 지어 다투었습니다. 즉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모인 하나님의 백성)로 모일 때에 분쟁이 있다는 사실을 구두로 전해 들었습니다(1:11, 16:17).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되지 못하게 하는 이 분쟁과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르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 계층적 차이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 구성원 중에서는 유대인 중에 회심자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 중에서 회심자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유대인 회심자들은 이방인 회심자들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아 구원을 받는 자들입니다. 모두가 다 한 형제자매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 안에서도 빈부귀천, 출신 지역 등으로 파당을 짓습니다. 그리고 어떤 은사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에 대해 우월감을 가집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교만합니다. 상대를 무시합니다. 이런 식으로 편 가르기가 진행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들의 추태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식을 전달받고 그 소식이 믿을 만한 소식입니다. 그래서 칭찬이 아닌 책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분쟁 가운데 진짜와 가짜가 드러납니다(19). 본문 19절에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서 당파가 있게 될 때 과연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반드시 드러난다는 말씀입니다. 진리와 복음이 선포되면 누가 가짜이며, 진짜인지 갈라집니다. 참과 거짓이 구분됩니다. 누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지,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인지, 성령에 사로잡힌 자인지 드러납니다. 교회 안에 분쟁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즉 분쟁은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라고 피해가지 않습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 사람들의 이해관계로 모인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모였습니다. 그래서 너 중심도 아니요, 내 중심도 아닙니다. 모두가 다 십자가 아래로 모였습니다. 자신의 공로로 십자가 밑에 모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도 악한 날에 하나님의 주권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교회 분쟁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분쟁은 성령의 역사는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그것은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일 뿐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모습이 교회 안에서 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분쟁은 서로 자기주장을 하는 패턴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분쟁은 ‘너 죽고 내 살기’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반드시 너를 죽여야 하는 세상의 비정한 약육강식의 원리가 통할 뿐입니다. 갈라디아서 5:20절에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5:21)라고 합니다. 본문 하반절에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분쟁을 통해 심판하신 이유와 목적을 드러냅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은 시험을 경험했고 인정을 받을 만한 믿음직한 자들입니다. 그 반대의 부류들은 “버림받은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무질서와 불순종한 자들 가운데 있는 그들을 시험하십니다. 결국 분쟁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섭리의 한 방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풍이 바다 속을 정화하듯이 분쟁의 폭풍을 통해서 교회를 정화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분쟁 가운데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이 인내하심을 시험하는 자들은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망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를 보여주십니다. 교회 내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하나님의 종말의 심판 때 최종적으로 갈라질 것입니다(갈 3:13). 현재, 오늘날 교회에서도 누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참되게 신앙생활을 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자인지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분쟁과 분열이 바로 그 알곡과 가라지로 갈라지게 합니다. 결국 교회 분쟁은 피할 수 없지만, 결코 좋은 일은 아닙니다. 3. 인정받지 못한 성만찬(20-22) 첫째, 그것은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20-21). 본문 20절에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먹는 그것은 진정한 성찬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주의 만찬을 먹을 목적으로 모인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참 주의 만찬이 아닙니다. 주의 만찬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보통 식사를 위해서 모인 것뿐입니다. 그것마저도 무질서했습니다. 서로를 안아주고 배려하는 그런 식사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식사는 거룩한 식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너희는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 너희가 모이고 있는 그런 모임일 경우에는 주의 만찬을 기념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이 사람이 제정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제정하셨습니다. 이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는 보편적으로 애찬과는 다릅니다. 만찬을 위해 각자가 자기의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먹는 식사였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떡과 잔을 분배했습니다. 진정한 성만찬이 아니므로 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성원들끼리 상처만 주었습니다. 분쟁을 가져왔습니다. 불법 부당한 성찬이 서로 하나 됨을 파괴했습니다. 아픔을 주었고 고통과 좌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구체적으로 합당하지 못한 성찬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야기가 21절에 기록됩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교인들이 가지고 온 음식을 나눠 먹지 않고 각자 자기 것을 먼저 먹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취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21절은 ‘이는’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만찬이 주의 만찬이 될 수 없던 이유는 ‘이는’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거기에서는 전혀 교제가 없었습니다. 교제가 없는 이유는 함께 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한 떡에 참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10:17). 그들은 서로를 위해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각기 먼저 먹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주의 만찬의 의미를 음미하면서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의미를 음미하기 전에 그들이 가져온 음식을 먼저 먹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되자 어떤 이들은 시장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긴 자들은 누구입니까(22) 본문 22절에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21절에서 언급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행위를 책망한 이유는 첫째, 성만찬이 악용된 것이었습니다. 둘째, 그들의 행위는 가난한 자들에게 무례함과 굴욕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는 거룩한 주의 만찬을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보통 식사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그러한 식사라면 그들은 그러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집이 있습니다. 교회는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주님이 주신 규례를 거행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다음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라고 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동료 지체들에게 경멸을 나타냈습니다. 함께 주의 만찬에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함께 참여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그들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입니다. 중심을 보지 않고 외모로 보았고 판단하였고 실행했습니다. 이는 결국 사도가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긴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라고 합니다. 가진 자들은 부자이고, 가지지 못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성만찬에 참여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칭찬하고 싶었지만, 이런 문제 때문에 결코 그들을 칭찬할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칭찬하리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결코 칭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문제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훈과 적용 사도행전 20:7절에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라고 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다음날인 주일에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고 합니다. 각자 자신들의 음식을 가지고 교회에 모여 함께 식사하고 그 끝에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여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만찬을 “주의 만찬”이라고 합니다. 이는 주를 기념하는 만찬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지체들과의 교제와 연합, 하나 됨을 체험하고 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만찬 하기 위해 모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주의 만찬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과를 끝내고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음식을 가자고 올 여력도 못되었습니다. 그런 가난한 자들, 노예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야 했습니다. 이미 늦게 도착한 가난한 형제들을 기다려 주지 않고 식사를 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각자 “주님의 만찬”이 아니라 “자신의 만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만찬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주님의 지체들과 교제를 깨뜨리는 만찬은 성만찬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분쟁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이미 하나 됨을 파괴되었으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개인주의 신앙이 교회의 참모습으로 대치되고 있습니다. 성찬식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지체로서 서로 교제하며 하나 됨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서로에 대한 미움과 갈등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분쟁으로 이어집니다. 교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투쟁의 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오로지 자신들이 교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투쟁의 연속일 뿐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며, 거짓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바른 복음과 신앙이 유지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가 모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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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31] 우상숭배 잔치에 참여 금지본문 / 고전 10:14-22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지난 시간에 고린도 전서 10:1-13절 말씀을 통해 “출애굽 세대를 통한 경고와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들은 반드시 알아야 함을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그 믿음의 근거가 되는 성경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지식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내려가 430년 동안 많은 고통 속에서 민족적인 단위로 성장하였습니다. 70명이 애굽으로 내려간 후 430년 동안 200만 명으로 번창하였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대로 그들은 애굽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해방을 받은 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았습니다. 이 기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심판받은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교훈이 된다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려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복된 학습이 필요합니다. 이번에는 본문 고린도 전서 10:14-22절 말씀을 통하여 “우상숭배 잔치에 참여 금지”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찬식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마음으로 참여하여야 합니다. 그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상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사도는 분명하게 성찬식과 우상의 잔치를 구별합니다. 그리고 우상숭배에 관해서 계속하여 말씀합니다. 1.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14-15) 본문 14절에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라고 합니다. 여기 ‘그런즉’이라는 단어는 앞 구절과 밀접한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7절에서 언급한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라는 말씀에 대한 경고를 본격적으로 펼쳐갑니다. 바울의 권면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유일한 하나님을 전제하여 자신의 교훈을 이어갑니다. 삼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권면하는 것과 같은 사랑입니다. 사도는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합니다.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경외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반대로 우상숭배나 그를 의식하는 것 조차 피해야 합니다. 마음속뿐만 아니라 외형적으로 우상숭배의 잔치에 참여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경배를 우상에게 드리는 그 어떤 행위도 거부해야 합니다. 15절에서는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런 말씀입니다. 14절에서 우상숭배를 피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후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적어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말씀을 합니다. 한번 판단해 보라고 합니다. 이런 형식으로 사도는 계속하여 우상 숭배하는 일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범죄라는 형식으로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혜를 가지고 있다며 자만하며 뽐내는 고린도 인들은 바울로부터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이러한 경고가 기분이 나쁠지라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 우리들의 자존심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2. 성찬식과 우상숭배 잔치의 다른 점(16-20) 첫째, 성만찬 잔치와 우상숭배 잔치는 전혀 다릅니다(16-17). 16절에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우상숭배는 전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성만찬은 빵과 포도주의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바울은 두 번째 요소인 포도주에 대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포도주를 “축복의 잔”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포도주잔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복을 빌었던 상황을 연상하고 있습니다.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그리스도 속죄의 제사로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에 “참여함”은 그 사건에 덕을 입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만찬에 참여한 자는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그리스도 속죄의 죽음이 가져온 구원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이어서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입니다. 이 참여함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에는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라고 합니다. 성찬식에 참여한 자들은 한 개의 떡을 나누어 먹습니다. 이는 함께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에 참여한 모두가 한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내포되어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과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성찬식에서 떡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몸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둘째, 제사의 예로 성찬식을 성격을 설명합니다(18). 본문 18절에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언급합니다. 이는 유대인을 지칭합니다. 유대인들의 제사를 예로 들면서 성찬식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레위기 7:6절에 ”제사장인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되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라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라“라고 합니다. 제사에서 제물 일부는 하나님께 바치고, 다른 일부는 그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러한 잔치를 통하여 하나님과 잔치의 참여자들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로서 보증됩니다. 셋째,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헛된 행위입니다(19). 본문 19절에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논지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자들,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을 언급합니다. 마치 바울이 우상이 어떤 실체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우상이 어떤 능력을 가진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우상을 비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감히 어떻게 하나님과 우상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성례라는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그에게 연합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에게는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우상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의 마음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상이 아무것도 아님을 말합니다. 넷째, 그러나 사탄은 우상을 이용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20). 20절에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논지를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상은 신이 아니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우상이 어떤 능력을 갖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제사를 드리는 것은 귀신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즉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는가, 귀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있는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어떤 일의 뒤에 숨은 그 동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그들이 사악한 종교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귀신은 우상 뒤에 숨어서 작용합니다. 귀신이 그 자체로서는 목석에 불과한 우상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유혹하고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방인들의 우상숭배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스스로를 귀신의 영향력 아래 밀어 넣는 행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 중에 소위 “강한 자들”의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습니다. 3. 성찬식에 참여한 그리스도인은 우상숭배 잔치 참여 여부(21-22) 첫째, 잔치에 참여는 하나 됨을 의미로 우상숭배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21). 본문 21절에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라고 합니다. 성만찬과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의 잔치에 참여한 자들은 우상숭배의 대상인 귀신과 하나 됨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그리스인은 우상숭배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둘째, 우리의 잘못된 우상숭배의 잔치에 참여하므로 심판을 초래해서는 안 됩니다(22). 본문 22절에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라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가 우리의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면 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주님보다 더 강한 자냐고 묻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싸우는 자들은 스스로 파멸할 것입니다. 더 강하지 않다면 강한 분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상숭배의 잔치에 참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하나님의 요구하신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이를 거부하면서 피해가려는 그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해방을 받아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 일로 하나님의 노여움으로 징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으로 인한 징벌을 피하는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의로움을 받은 우리는 이제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신명기 32:21절에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교훈과 적용 바울은 고린도 교회 분쟁에 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문제로 분쟁합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구성원인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특히 성만찬에 대해서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많이 배우고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의 미사와 성찬식은 우리 개혁교회와 어떻게 다른지도 알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도들이 가르친 성찬식은 교회 분쟁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에 참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구원의 은총을 누립니다. 그리고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숭배의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언급합니다. 이러한 말씀의 교훈은 우리들이 받아야 합니다. 우상숭배의 잔치에서 우상이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허상을 마귀가 귀신을 통해 이용합니다. 장난질을 합니다. 우상숭배의 잔치에 참여한 것은 곧 마귀에게, 그 마귀의 하수인인 귀신을 숭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잔치에 참여한 것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징벌을 받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교훈과 그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떠나 이 세상 것들로만 가득차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의 마음 중심과 생각을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다듬는 일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