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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34] 교회의 분쟁과 인정받지 못한 성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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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 34] 교회의 분쟁과 인정받지 못한 성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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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전 11:17-22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 전서 11:2-16절 말씀을 통해 “예배 때 여자는 왜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입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남자의 영광입니다. 따라서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욕되게 합니다. 반대로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인 남자를 욕되게 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공적 예배 때에 공적인 기도나 예언하는 자, 즉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면 안 됩니다. 그러나 여자는 반드시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합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기 때문에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으면 남자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자가 머리를 미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남자와 여자의 차별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님 창조의 섭리요, 질서입니다. 바울은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자음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자가 남자에게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고 말함과 동시에 모든 것은 하나님에서 났음이라고 합니다. 


사도는 이러한 하나님 창조의 질서를 언급하면서 여자는 너울을 쓸 것을 말씀합니다. 이는 모든 교회의 관례라고 합니다. 오늘날 개신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 여자가 너울을 쓰지 않습니다. 너울을 쓰지 않는 대신 여자에게 너울을 쓰지만 남자는 너울을 쓰지 않는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의미를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여 예배 모범을 규범적으로 관례화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본문인 고린도 전서 11:17-22절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분쟁과 인정받지 못한 성만찬”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교리적인 복음의 내용에 관한 문제가 아닌 규범적인 관례와 전통에 관한 문제를 잘 지켜 온 것에 대해 칭찬을 했습니다(11:2). 그 관례 중의 하나가 바로 예배 때에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11:2-16절까지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부터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인정받지 못한 성만찬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 거룩한 하나님 교회의 무익한 모임(17)


본문 17절에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명하는 이 일”을 언급하면서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칭찬하지 않는 “이 일”은 이미 11:2-16절에서 언급한 예배 때에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인지 아니면 본문 17절 이하에서 언급된 성만찬에 대한 일인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이 일을 명하면서 나는 너희를 칭찬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 일”이 앞의 여자가 머리에 너울 쓰는 문제인지, 아니면 뒤엣것을 언급한다면 그는 ‘이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명하면서 나는 너희를 칭찬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왜 칭찬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이는 너희의 모임이 … 해로움이라”. 이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칭찬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모임은 편당(偏黨)을 이루어서(19절)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고(22절) 주의 만찬에 불경하게 참예하였기 때문에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공적 모임이 유익을 되기보다 오히려 해로움이 되었습니다. 공적 예배가 예배로서 기능이 상실되어 믿는 공동체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유익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해를 줄 뿐입니다.


이 모임은 고린도 교회 구성원이 서로 하나 되어 연합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제각각입니다. 서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서로 이해 당사자들끼리 파당을 짓습니다. 그래서 소란을 일으킵니다. 거룩한 모임은 모두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 됨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으로 하나가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코 그들을 칭찬할 수 없습니다. 칭찬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책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칭찬 일변도로 가면 안 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로 모든 잘못을 합리화시켜주는 칭찬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책망할 때는 책망해야 합니다. 때로는 책망이 칭찬보다 효과가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2. 고린도 교회 분쟁의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18)


본문 18절에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가 고린도 교회 안에 분쟁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있는데, 어느 정도 그것이 사실임을 나는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 분쟁이 있다는 소속을 들었는데 사도 바울은 그것을 사실로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8절을 시작하면서 우리 성경에는 ‘먼저’라고 했는데 이 단어는 ‘첫째’(프로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첫째로, 최초로, 처음에’라는 뜻이 있습니다. 첫째의 이야기는 고린도 교회 분쟁이 있다는 이야기이고, 두 번째는 성만찬 거행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첫째,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라고 합니다(18,상).


사도 바울은 먼저, 첫째로 “너희가 교회에 모임 때에"라고 합니다. 여기 ‘교회’(엔 테 엑클레시아)에서 관사 ‘테’은 공인 본문에는 삽입되어 있으나 고대 사본(A,B,C,D)에는생략되어 있습니다. 관사 ‘테’가 없을 경우, ‘교회에’는 ‘모임의 장소’가 아니라 ‘모임’을 가리킵니다. 이로 볼 때 ‘교회’를 모임의 장소 개념과 모임의 성격에 대한 의미를 다 포함하여 이해해도 무방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의 교회 안에 소규모의 모임과 집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공적 모임은 거룩한 무리의 모임입니다. 이 모임과 집회는 일반 사회에서 모이는 그 떤 회의체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하며, 거룩한 백성들이 성령의 임재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기 위한 모임입니다. 인간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인간을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특정 인사를 일으켜 세워놓고 손뼉 치지 않습니다. 이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과 찬양을 특정 개인에게 돌리는 행위입니다. 손뼉을 치는 교회나 이를 받은 특정 개인에게 절대로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아닌 특정 인간의 영광을 위해 예배가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라고 합니다(18, 하).


사도 바울은 분쟁을 거론합니다. 여기 분쟁은 분파입니다. 분쟁(분파, 1:10)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뜻은 “옷에 생긴 찢어진 틈(마 9:16)”, “의견이 분분함”(요 7:43), “감정상의 소외”, 또는 “내적인 분열”, 교회에 적용되어 교회로부터의 불법적인 이탈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분쟁은 아니었습니다. 믿는 공동체 구성원끼리 서로 교통하기를 거절하고 서로 당을 지어 다투었습니다. 즉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모인 하나님의 백성)로 모일 때에 분쟁이 있다는 사실을 구두로 전해 들었습니다(1:11, 16:17).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되지 못하게 하는 이 분쟁과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르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 계층적 차이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 구성원 중에서는 유대인 중에 회심자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 중에서 회심자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유대인 회심자들은 이방인 회심자들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아 구원을 받는 자들입니다. 모두가 다 한 형제자매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 안에서도 빈부귀천, 출신 지역 등으로 파당을 짓습니다. 그리고 어떤 은사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에 대해 우월감을 가집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교만합니다. 상대를 무시합니다. 이런 식으로 편 가르기가 진행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들의 추태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식을 전달받고 그 소식이 믿을 만한 소식입니다. 그래서 칭찬이 아닌 책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분쟁 가운데 진짜와 가짜가 드러납니다(19).


본문 19절에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서 당파가 있게 될 때 과연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반드시 드러난다는 말씀입니다. 진리와 복음이 선포되면 누가 가짜이며, 진짜인지 갈라집니다. 참과 거짓이 구분됩니다. 누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지,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인지, 성령에 사로잡힌 자인지 드러납니다.


교회 안에 분쟁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즉 분쟁은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라고 피해가지 않습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 사람들의 이해관계로 모인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모였습니다. 그래서 너 중심도 아니요, 내 중심도 아닙니다. 모두가 다 십자가 아래로 모였습니다. 자신의 공로로 십자가 밑에 모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도 악한 날에 하나님의 주권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교회 분쟁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분쟁은 성령의 역사는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그것은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일 뿐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모습이 교회 안에서 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분쟁은 서로 자기주장을 하는 패턴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분쟁은 ‘너 죽고 내 살기’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반드시 너를 죽여야 하는 세상의 비정한 약육강식의 원리가 통할 뿐입니다.


갈라디아서 5:20절에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5:21)라고 합니다.


본문 하반절에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분쟁을 통해 심판하신 이유와 목적을 드러냅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은 시험을 경험했고 인정을 받을 만한 믿음직한 자들입니다. 그 반대의 부류들은 “버림받은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무질서와 불순종한 자들 가운데 있는 그들을 시험하십니다. 결국 분쟁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섭리의 한 방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풍이 바다 속을 정화하듯이 분쟁의 폭풍을 통해서 교회를 정화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분쟁 가운데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이 인내하심을 시험하는 자들은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망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를 보여주십니다.


교회 내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하나님의 종말의 심판 때 최종적으로 갈라질 것입니다(갈 3:13). 현재, 오늘날 교회에서도 누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참되게 신앙생활을 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자인지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분쟁과 분열이 바로 그 알곡과 가라지로 갈라지게 합니다. 결국 교회 분쟁은 피할 수 없지만, 결코 좋은 일은 아닙니다.


3. 인정받지 못한 성만찬(20-22)


첫째, 그것은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20-21).


본문 20절에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먹는 그것은 진정한 성찬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주의 만찬을 먹을 목적으로 모인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참 주의 만찬이 아닙니다. 주의 만찬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보통 식사를 위해서 모인 것뿐입니다. 그것마저도 무질서했습니다. 서로를 안아주고 배려하는 그런 식사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식사는 거룩한 식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너희는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 너희가 모이고 있는 그런 모임일 경우에는 주의 만찬을 기념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이 사람이 제정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제정하셨습니다. 이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는 보편적으로 애찬과는 다릅니다. 만찬을 위해 각자가 자기의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먹는 식사였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떡과 잔을 분배했습니다. 


진정한 성만찬이 아니므로 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성원들끼리 상처만 주었습니다. 분쟁을 가져왔습니다. 불법 부당한 성찬이 서로 하나 됨을 파괴했습니다. 아픔을 주었고 고통과 좌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구체적으로 합당하지 못한 성찬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야기가 21절에 기록됩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교인들이 가지고 온 음식을 나눠 먹지 않고 각자 자기 것을 먼저 먹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취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21절은 ‘이는’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만찬이 주의 만찬이 될 수 없던 이유는 ‘이는’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거기에서는 전혀 교제가 없었습니다. 교제가 없는 이유는 함께 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한 떡에 참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10:17). 


그들은 서로를 위해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각기 먼저 먹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주의 만찬의 의미를 음미하면서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의미를 음미하기 전에 그들이 가져온 음식을 먼저 먹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되자 어떤 이들은 시장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긴 자들은 누구입니까(22)


본문 22절에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21절에서 언급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행위를 책망한 이유는 첫째, 성만찬이 악용된 것이었습니다. 둘째, 그들의 행위는 가난한 자들에게 무례함과 굴욕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는 거룩한 주의 만찬을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보통 식사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그러한 식사라면 그들은 그러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집이 있습니다. 교회는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주님이 주신 규례를 거행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다음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라고 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동료 지체들에게 경멸을 나타냈습니다. 함께 주의 만찬에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함께 참여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그들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입니다. 중심을 보지 않고 외모로 보았고 판단하였고 실행했습니다. 이는 결국 사도가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긴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라고 합니다. 가진 자들은 부자이고, 가지지 못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성만찬에 참여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칭찬하고 싶었지만, 이런 문제 때문에 결코 그들을 칭찬할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칭찬하리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결코 칭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문제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훈과 적용


사도행전 20:7절에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라고 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다음날인 주일에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고 합니다. 각자 자신들의 음식을 가지고 교회에 모여 함께 식사하고 그 끝에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여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만찬을 “주의 만찬”이라고 합니다. 이는 주를 기념하는 만찬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지체들과의 교제와 연합, 하나 됨을 체험하고 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만찬 하기 위해 모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주의 만찬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과를 끝내고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음식을 가자고 올 여력도 못되었습니다. 


그런 가난한 자들, 노예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야 했습니다. 이미 늦게 도착한 가난한 형제들을 기다려 주지 않고 식사를 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각자 “주님의 만찬”이 아니라 “자신의 만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만찬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주님의 지체들과 교제를 깨뜨리는 만찬은 성만찬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분쟁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이미 하나 됨을 파괴되었으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개인주의 신앙이 교회의 참모습으로 대치되고 있습니다. 성찬식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지체로서 서로 교제하며 하나 됨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서로에 대한 미움과 갈등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분쟁으로 이어집니다. 교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투쟁의 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오로지 자신들이 교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투쟁의 연속일 뿐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며, 거짓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바른 복음과 신앙이 유지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가 모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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