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 맑음속초21.3℃
  • 맑음27.4℃
  • 맑음철원25.2℃
  • 맑음동두천24.0℃
  • 맑음파주22.6℃
  • 맑음대관령22.4℃
  • 맑음춘천26.9℃
  • 구름조금백령도12.8℃
  • 맑음북강릉24.1℃
  • 맑음강릉26.3℃
  • 맑음동해20.7℃
  • 맑음서울23.6℃
  • 맑음인천18.6℃
  • 맑음원주25.6℃
  • 맑음울릉도18.0℃
  • 맑음수원20.7℃
  • 맑음영월25.9℃
  • 맑음충주26.1℃
  • 맑음서산21.2℃
  • 맑음울진18.5℃
  • 맑음청주25.2℃
  • 맑음대전25.3℃
  • 맑음추풍령25.2℃
  • 맑음안동27.5℃
  • 맑음상주27.0℃
  • 맑음포항24.7℃
  • 맑음군산18.0℃
  • 맑음대구29.2℃
  • 맑음전주23.2℃
  • 맑음울산20.0℃
  • 맑음창원23.0℃
  • 맑음광주25.1℃
  • 맑음부산20.3℃
  • 맑음통영18.8℃
  • 맑음목포19.3℃
  • 맑음여수21.0℃
  • 맑음흑산도14.2℃
  • 맑음완도23.8℃
  • 맑음고창20.5℃
  • 맑음순천24.0℃
  • 맑음홍성(예)23.1℃
  • 맑음23.4℃
  • 맑음제주22.0℃
  • 맑음고산18.3℃
  • 맑음성산20.0℃
  • 맑음서귀포20.9℃
  • 맑음진주24.0℃
  • 맑음강화16.0℃
  • 맑음양평25.1℃
  • 맑음이천25.3℃
  • 맑음인제26.1℃
  • 맑음홍천26.6℃
  • 맑음태백23.3℃
  • 맑음정선군27.7℃
  • 맑음제천24.9℃
  • 맑음보은25.0℃
  • 맑음천안23.1℃
  • 맑음보령19.4℃
  • 맑음부여25.8℃
  • 맑음금산25.2℃
  • 맑음24.8℃
  • 맑음부안18.0℃
  • 맑음임실23.8℃
  • 맑음정읍22.3℃
  • 맑음남원25.9℃
  • 맑음장수23.9℃
  • 맑음고창군23.5℃
  • 맑음영광군19.7℃
  • 맑음김해시20.8℃
  • 맑음순창군24.8℃
  • 맑음북창원25.6℃
  • 맑음양산시24.1℃
  • 맑음보성군23.3℃
  • 맑음강진군26.2℃
  • 맑음장흥23.6℃
  • 맑음해남22.5℃
  • 맑음고흥24.2℃
  • 맑음의령군28.3℃
  • 맑음함양군28.3℃
  • 맑음광양시25.1℃
  • 맑음진도군20.3℃
  • 맑음봉화24.4℃
  • 맑음영주25.4℃
  • 맑음문경25.1℃
  • 맑음청송군26.1℃
  • 맑음영덕21.9℃
  • 맑음의성28.1℃
  • 맑음구미26.2℃
  • 맑음영천27.3℃
  • 맑음경주시25.0℃
  • 맑음거창25.9℃
  • 맑음합천27.6℃
  • 맑음밀양26.7℃
  • 맑음산청27.1℃
  • 맑음거제21.6℃
  • 맑음남해23.9℃
  • 맑음22.8℃
[삼일절 105주년 기념] 1919년 삼일운동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설⦁논단

[삼일절 105주년 기념] 1919년 삼일운동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

조선총독부.png

 

역사학계(민경배, 서정민)에서는 일제강점기의 각 시대별 관계 구도에서 제1기 : 선교사와 일제의 제휴-한국기독교 배타시기(1905- 1919), 제2기 : 선교사와 한국교회의 제휴-일제 배타 시기(1919- 1938), 제3기 : 일제와 한국교회의 제휴-선교사 배타 시기(1938- 1945) 등으로 구분하였다.

 

치열했던 과거 한국과 한국교회 역사는 한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소용돌이치는 역사였다. 그 역사 한 중앙에 교회가 있었다. 1919년 삼일운동은 일제에 의해 잃어버린 나라의 국운을 되찾기 위한 목숨을 건 일제에 저항운동이었다. 

 

1910년 일제에 강제로 병합된 한국은 일제의 무력통치로 독립을 시도하지 못하자 독립에 뜻을 품은 이들은 해외로 나가 독립을 모색했다. 대표적인 움직임이 미국과 중국 러시아연해주 등지에서 일어났으며 미국에서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조직되었다. 대한인국민회가 벌인 대표적인 항일운동으로 1908년 친일파인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었다. 통감부 고문관이었던 스티븐스는 친일 반한 성향인물이었다. 그는 미국에 도착하자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는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여 미국에 있는 한국교민들에게 분노가 일어나게 하였다. 

 

그는 한국인을 향해 ‘한국은 독립을 유지할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일본이 아니었으면 한국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였다. 이에 장인환과 전명운은 스티븐스를 제거하기로 결의하고 스티븐스가 오클랜드 항구에 도착했을 때, 정명운이 권총을 쏘았으나 불발이었다. 다시 장인환이 권총을 발사하여 스티븐스를 쓰러트렸다. 결국 스티븐스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죽었다.

 

국내에서는 한일병탄으로 울분으로 통탄하며 많은 이들이 교회로 찾았다. 이들은 자주성과 자존성을 되찾으려는 새로운 힘을 얻으려 했고 민족애에 대한 새로운 구국운동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일제는 이러한 교회와 기독교를 일본의 식민통치를 위협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위협감을 느꼈다.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된 후에 그들이 중심이 된 ‘신민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에서는 신문, 잡지, 서적을 통하여 백성들을 일깨웠고 국외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에 대비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한 애국사상을 바탕으로 했고 독립운동단체로 한국 유일의 비밀 결사대였다.

 

민족학교로 알려진 평양 숭실학교, 대성학교, 선천 신성학교, 정주 오선학교, 정주 선천교회는 반일감정과 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신민회와 항일운동에 적극 하였다. 엄청난 성장과 반일감정에 대해 일제는 교회와 기독교가 식민지지배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다.

 

민족운동 교육에 앞장선 선천 신성학교와 강제로 해산된 독립협회의 지도자들이 조직한 신민회야말로 일본에게는 기독교와 더불어 식민통치를 방해하는 상당한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105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일제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국을 영구적인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반일 세력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세웠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11년에 일어난 105인 사건으로 알려진 ‘데라우치총독모살미수사건’이다. 일제는 전혀 있지도 않은 데라우치 총독 살해 음모사건을 날조하여 반일 세력 수백 명을 체포했다.

 

체포된 123명을 기소했고 그 중 98명이 기독교인이었다. 98명 중 장로교인은 89명이었고 그 중에 88명이 서북지방인 선천과 평양지역 출신이었다. 이 사건은 합법을 가장한 불법 재판, 국내 반일민족세력, 신민회, 서북 출신 기독교 제도자를 제거하려는 음모의 사건이었다. 특히 이 사건으로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 된 후 신민회를 조직하여 여기에 참여한 인사들을 말살하려는 음모였다.

 

105인 사건 관련자들이 대거 3.1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이 발흥할 때 장로교만 아니라 이들 지역의 감리교 지도자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1919년 삼일운동은 처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하여 빠른 속도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삼일운동이 어느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지역과 신분과 연령을 초월하여 한국인들 모두가 참여하는 거국적이고 거민족적인 운동이었다.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3.1운동으로 인해 7,509명이 사망했고, 46,306명이 투옥되었다.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 내용이 국내에 전달되었고 국내에서는 학생과 모든 종교계 인사들로 하는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이 결의되자 일은 빠르게 발전되었다. 2019년 2월 18일까지 독립선언서가 완성되었고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통고서도 작성되었다.

 

2월 27일에는 이미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고 각 종교의 교단 조직을 통해 적국으로 배포되었다. 학생들은 군중 동원 방법과 시위 방향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전국적인 배포 등의 계획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지도자들은 시위 날짜를 3월 2일로 다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날이 주일(일요일)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측에서 반대하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결정한 날짜는 또 다시 하루가 앞 당겨진 3월 1일로 결정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가 되자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였다.

 

원래 계획에는 학생들과 함께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긴급하게 열린 전날 밤 회의를 통해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 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자신들은 따로 태화관에서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태화관에 모인 종교지도자들은 한용운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일제 경찰에게 자신들이 독립선언을 하였다고 자진해서 알렸다. 

 

이를 보고받은 일제 경찰은 기다렸다가 이들을 연행하여 체포하였다. 이 시간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오기만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자 할 수없이 모인 시민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고종의 장례식 참관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지역 사람들은 자연스레 3.1운동을 목격 하게 되었고, 살포된 인쇄물을 몰래 주워 자기들의 지역으로 돌아갔다.

 

다음날인 3월 2일 정오가 되자 서울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한 종로거리에 400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들은 만세를 부르며 종로경찰서를 향하여 나갔다. 일제경찰은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약 20명의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다수는 노동자였고, 여러 명의 학생들이 함께 하였던 시위였다.

 

드디어 3월 5일 서울역 앞에서 학생들이 주도하는 대규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오전 8시부터 각 학교 학생들이 서울역 앞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시민들이 함께 모여들기 시작했다. 9시경에 이르자 이들 모임은 수만 명의 대군중을 이루었다. 이 때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인력을 타고 등장했다. 연희전문학교생 강기덕이 나타나 ‘조선독립’이라고 크게 쓴 깃발을 높게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를 계기로 모였던 수만의 군중이 호응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시위는 2일에는 함흥, 해주, 수안, 강서 등으로 번져나갔다. 3일에는 예산과 개성, 곡산과 통천 등으로 확산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3월20일부터 4월9일까지 지속된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절정에 달했다. 곳곳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은 학교와 교회, 천도교의 종교시설을 근거지로 하여 시위를 펼쳐 나갔다.

 

농민들은 마을과 장터를 근거지로 하여 시위를 벌였고 이것을 본 시민들과 노동자층이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한국에는 5일장이라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이때는 인근 도시와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장터에 모인다. 장터는 일부러 사람들을 모으려 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기회였다. 지역의 만세운동은 주로 장터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이러한 역사 가운데 한국의 교회를 관리감독하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미국 선교사들과 함께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디. 이런 가운데 1919년 삼일운동 직전 해에 제7회 총회가 열렸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7회 총회(2018. 8. 31)에서 김선두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부총회장은 창립 독노회에서 노회장이었던 마포삼열 목사가 부총회장이 되었다. 이듬해인 제8회 총회(2019. 10. 4)가 평양부선문밖교회에서 소집되었다. 이때 “회장이 미참”하여 마포삼열 선교사가 개회를 공포했다.

 

회장의 서간 낭독 : 회장[총회장] 김선두 씨가 본년 3월1일에 조선 독립사건으로 경성대문감옥에 수금되어 본 총회로 보낸 편지에 문암함과 축복함과 회장 직무를 부회장 마포삼열 씨에게 위임한 말씀을 서기가 낭독하매 회중이 슬픈마음으로 받고 부회장이 회장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다.

 

제8회 총회에 보고한 평남노회는 평양부시찰 보고에서 길선주 목사와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경성 감옥에 구금되어 예심중에 있다고 보고했다(제8회 총회록, 2019, 86)

 

김선두(金善斗, 1876~1949) 목사는 평안남도 평양 출생,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길선주 목사가 시무하는 장대현교회 장로로 임직하였으며, 1909년 장로로서 평양 서문밖교회 목회를 하면서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 1913년에 졸업(제6회)하였다. 곧이어 평양 서문밖교회의 청빙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김선두 목사는 총회장 재임 시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 삼일독립만세운동을 직접 지휘하였으며, 독립만세 주모자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선교사들은 가석방이라도 얻어 그가 총회를 개회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9월 초에 모이는 총회를 1개월 늦추어 10월 초에 개회하기로 공고되었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해방을 맞자 그는 곧 월남하여 박형룡 박사와 함께 서울 남산에서 장로회신학교를 재건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평양의 만세시위는 일경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3월 2일부터 3월 5일까지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일제 헌병 경찰은 3월 2일 새벽부터 주동자 체포에 들어갔으며, 3월 8일까지 검거한 인원수만 해도 400명이 넘었다.

 

그 가운데 154명은 태형 혹은 즉결로 처분하고, 주동자로 여긴 48명은 기소하기 위해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넘겼다. 이날 평양 숭덕학교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에는 모펫(S. A. Moffett), 모우리(E. M. Mowry), 번하이젤(C. F. Bernheisel) 등 네 명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가 참관하였다. 그중 한 사람인 번하이젤(한국이름, 편하설 선교사)은 이날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이날은 이 나라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날이다. 전 대한제국 황제 이태왕(李太王, 고종)이 최근에 죽었으며, 모레는 장례식 날로 예정되었다. 그 장례식은 일본제국의 황족의 자격으로, 국장(國葬)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그 장례식은 신도의식(神道儀式)에 따라 엄수되어질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이에 매우 분노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장례식이 자기 나라 의식에 따라 치러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례식 때에 서울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 많은 소문이 떠돌고 있다.

 

고(故) 고종 황제를 애도하는 봉도회(奉悼會)가 이 도시에서 열릴 것이라고 며칠 전에 발표되었다. 한 모임은 숭덕학교(기독교계 남학교), 다른 모임은 감리교회, 그리고 세 번째 모임은 천도교 본부에서 각각 열릴 것이다. 천도교는 전국에 널리 퍼져있는 반(半) 종교적이고, 반(半) 정치적인 조직이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요 며칠 동안 분명히 억누른 흥분이 감돌고 있고, 우리는 그때에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을 많이 들었다. B(S. A. Moffett) 씨와 C(E. M. Mowry) 씨, 그리고 나(C. F. Bernheisel)는 그 모임에 직접 참가해서 우리 눈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기로 했다. AA(선천)의 F(S. L. Roberts) 씨도 후에 늦게 와서 운동장 뒷켠에 서 있었다. 운동장은 3,000명의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는 아주 앞쪽의 한쪽 열 옆으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모든 교회학교와 대부분의 공립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참석했다.

 

입구 정면에는 강단이 있었고, 그 주위와 뒤에는 몇몇 목사들과 이 도시의 장로교 임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에는 제5교회(서문외교회)의 목사이며 장로회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4교회(산정현교회)의 강규찬 목사는 이미 고종황제의 생애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친 후 김선두 목사는 이제 송영가를 부르고 축도를 하며 봉도회를 마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에게 다음 순서가 남았으니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어 달라고 말했다.

 

축도를 한 후, 김선두 목사는 베드로전서 3장 13-17절, 로마서 9장 3절의 두 성경 본문을 봉독했다. 그가 이 말씀을 엄숙하게 읽는 것을 볼 때, 심각한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4교회(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있는 정일선이 연단에 올라서서, 읽어서 알려드려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이 그의 평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날이며,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읽지 않고는 못배기겠다고 말했다. 청중들은 굉장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자 그는 사실상 한국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낭독이 끝나자, 한 사람이 올라가 사람들이 지켜야 할 것을 설명했다. 불법적인 짓을 해서는 안 되고, 모두 주어진 지시에 따를 것이며, 관헌에게 저항하지 말고 일본인 관리나 민간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강규찬 목사가 민족 독립에 대한 연설을 했다. 연설이 끝날 때 즈음에 몇 사람이 태극기를 한 아름씩 건물에서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커다란 태극기 하나가 연단에 걸리자,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태극기가 물결쳤다. 그러고서 우리 모두가 대열을 지어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자고 그들에게 설명했다.

 

한국교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2024년 시대 속에서 나라와 민족과는 별개의 선교운동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함께 가야하는 공동운명체인가? 정교분리의 원칙은 교회가 국가와 분리된 선교 정책을 펼치는 것인가?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2024년 4월 10일은 총선이 있는 날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국회의원 300명을 선출한다. 어떤 국회원의원을 선출해야 하는가? 아니면 교회는 이러한 민주적 절차의 행위에 무관심 해야 하고, 관심을 두지 않아야 하는가?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