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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42] 사랑의 본성(사랑이란?)본문/ 고전 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13:1-3절 말씀을 통하여 “사랑이 없는 은사는 무익”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13장은 세 단락으로 구성돼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단락(1-3)은 사랑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둘째 단락(4-7)은 사랑의 본성에 관해 말씀합니다. 세 번째 단락(8-13)은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부분에서 첫째 단락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12장에서 말씀한 은사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 구제에 대한 은사에 관해서 말씀하셨는데 13장은 구체적으로 이 은사들은 사랑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말씀합니다. 가치의 혼란 시대에 사랑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를 묵상하면서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13장의 두 번째 단락인 “사랑의 본성(사랑이란?)”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가치의 혼란 시대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사랑이란 무엇인가? 고전 13:1-3절 말씀에서 사랑이 없으면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소리 나는 구리와 꽹과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예언하고 믿음이 있더라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내게 있는 모든 것과 내 몸을 내어준들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제 4절에서부터 7절 말씀까지에서 ‘사랑’을 주어로써, 15개의 동사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첫째, 사랑은 무엇을 하는가? 둘째, 사랑은 무엇을 하지 않은가를 말씀합니다. 우리가 에스더서에서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죽을 마음이 없어도 이 말씀은 대개 좋아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말씀한 사랑을 좋아하면서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4-7절 말씀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겠습니다. 사랑은 본문 4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1) 오래 참음(13:4a) 2) 사랑은 온유하며(13:4b) 3)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13:4c) 4)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면(13:4d) 5) 교만하지 아니하며((13:4e) 본문 5절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6)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13:13:5a) 7)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13:5b) 8) 성내지 아니하며(13:5c) 9)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13:5d) 본문 6절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10)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13:6a) 11)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13:6b) 본문 7절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12) 모든 것을 참으며(13:7a) 13) 모든 것을 믿으며(13:7b) 14) 모든 것을 바라며(13:7c) 15)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13:7d) 2. 사랑은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본문 4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긍정적인 어구로서 ‘~하다’와 부정적인 어구인 ‘~하지 않는다’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무엇을 실천해야 합니까? 첫째, "오래 참음"이라고 했습니다(13:4a).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했습니다. ‘오래 참음’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오래 참는다는 말씀입니다. 오래 참음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자에게 친절과 선을 베푼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참습니다. 4절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하여 7절에서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로 끝을 맺습니다. 여기 ‘오래 참고’라는 헬라어 단어는 ‘마크로뒤메이’(μακροθυμέω)입니다. 이는 ‘체념’, ‘수락’ 등을 의미하였으나 후에는 ‘포기하고 받아들임’, ‘참고 견딤’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헬라 세계에서 사용된 이 단어를 사도 바울이 본문에 채용할 때는 내 모든 자아를 포기하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인내와 참음, 견딤이 이루어집니다. 보복의 마음을 포기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참는 것입니다. 이때 진정한 사랑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둘째, “사랑은 온유하며”라고 했습니다(13:4b). 여기 ‘온유’를 사랑의 본성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 ‘온유’는 ‘탁월한’, ‘유용한’, ‘친절한’의 뜻을 가집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며 죄를 짓는 자에 대하여 단순히 참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선의의 봉사, 친절과 선을 배푸는 것을 뜻합니다. 즉 ‘오래 참는 것’이 사랑의 수동적 측면이라면 ‘온유한 것’은 능동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시기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13:4c). 시기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높아지는 것을 질투하는 것을 말합니다. 언제나 자신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시기라는 말은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여기서도 강한 질투의 감정을 뜻한다고 볼 수 있는 사랑과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넷째,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13:4d). 여기 ‘자랑’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페르페류에타이’로써 ‘교만’, ‘과장’, ‘무익한 잡담’이라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고무풍선처럼 부풀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허풍 떨다, 자랑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언제나 자기 자랑은 자신의 열등한 부분을 가리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입니다. 따라서 자랑을 일삼는 자는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 보다 잘났다는 착각합니다. 자기 과시, 자기 자랑은 결코 사랑의 본성에서 이탈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섯째,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13:4e). 헬라어 단어에서 퓌시오오(φυσιόω)는 ‘교만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부풀리다, 부풀게 하다, 부풀어 오르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이 부풀게(득의양양하게) 하다, 자만하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를 신약성경에서 사용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한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자기 이해를 겸손이라 합니다. 그러나 정반대 개념을 교만이라고 합니다. 교만은 언제나 자신을 부풀려 무언가 된 줄로 착각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님의 긍휼과 자비심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2.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5). 본문 5절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첫째,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13:5a).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는 헬라어 ‘아스케모네이’는 ‘수치스런 행동을 하다, 수치스러운 것을 느끼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비열하게 행동하다, 보기 흉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느끼다’라는 의미인데 이런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이러한 무례한 행동이 나올 것입니다. 둘째,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13:5b). 상대를 배려함이 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행동이 어떻게 사랑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자기 희생에서 출발합니다. 희생하지 않고는 사랑의 고귀함을 지켜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랑은 자신의 의견만 고집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셋째,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13:5c). ‘성내는 것’은 ‘분노케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원래 ‘날카롭게 하다’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계속하여 재촉하고 자극합니다. 화나게 하고 분노케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런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이런 것들을 버리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너무나 쉽게 성내는 것은 사랑이라 할 수 없다. 성내지 않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넷째,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13:5d).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할 때 ‘악한 것’에 해당한 헬라어 ‘카콘’은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본래의 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저속하고 비열한 행위를 뜻합니다. 그리고 ‘생각지’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제타이’는 ‘악한 것’을 보복하려는 심리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는 결코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악을 저지른 사람에게 악에게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3. 불의가 아닌 진리를 기뻐한다(6). 본문 6절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첫째,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13:6a). '불의한 행위'나 '불의'를 의미한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부정(불공정)한 행위’나 ‘위반, 범죄’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절도, 사기 등과 같은 특정 범죄를 지칭하여 적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진실, 정직함에 반대된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피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둘째,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했습니다(13:6b). 여기서 사랑이란 ‘함께 기뻐하다’인데 무엇과 함께 입니까? 그것은 진리와 함께입니다. 여기서 ‘진리’(알레데이아)는 ‘불의’(아디키아)의 반대 개념으로 ‘옳은 것’이란 의미를 지닌 의인화된 표현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살후 2:10, 12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살후 2:10절에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12절에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합니다. 사랑은 불의 편에 서지 않고 진리편에 서는 것입니다. 4. 모든 것을 참는 것이 사랑이다(7). 본문 7절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합니다. 첫째,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합니다(13:7a). ‘참다’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모든 것을 덮어서 숨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보복하지 않고 용서해 주고 참는 것입니다. 숨겨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보복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에게 주는 지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모든 것을 믿으며”라고 합니다(13:7b). ‘믿으며’라는 단어는 '신뢰하다, 의지하다, 순종하다, 믿다, 위탁하다, 신임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셋째, “모든 것을 바라며”라고 했습니다(13:7c). ‘바라며’라는 의미는 ‘기대하다, 바라다, 소망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이런 희망이 있게 됩니다. 넷째,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했습니다(13:7d). 어려운 가운데 낙담하지 않고 인내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견디다, 참다, 버티다’를 의미에 맞게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버티는 것입니다. 참는 것입니다. 사랑의 이런 본성, 속성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자세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속성을 보여주는 사랑 목록은 사랑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목록입니다. 교훈과 적용 고린도 전서 13장은 믿는 자나 믿지 아니한 자들 모두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이 좋아하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좋아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사랑은 인간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이 모든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주신 은사는 이러한 사랑에 근거하여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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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갑신정변(1884년)과 김옥균의 능치처참“알렌 의사가 온 시점, 그 얼마 후 사건(갑신정변)의 발생, 중상자(민영익)의 성공적 치료 등은 모두 이 땅에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열고 확고한 선교의 기초를 놓기 위한 특별한 섭리였다고 생각합니다.” 헤론 선교사가 요코하마-나가사키-부산-제물포를 거쳐 1885년 6월 21일 주일 저녁 서울에 도착했다. 다음해인 1886년 헤론은 서울 도착 한지 5일 째되는 날인 6월 26일, 뉴욕 북장로교선교회 엘린우드 총무에게 보낸 편지다. 헤론은 이 편지를 통해 의료 선교를 통해 개화와 선교의 문이 열리고 있다고 했다. 알렌이 갑신정변으로 인한 민영익을 성공적으로 치료함으로써 이 땅에 선교의 문이 열리고 확고한 선교의 기초를 놓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갑신정변을 통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는 이땅에 복음이 확산되고 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또는 갑신혁명(甲申革命)은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ㆍ박영효ㆍ서재필ㆍ서광범ㆍ홍영식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무력 정변(쿠데타)이다. 갑신정변의 원인은 청국의 조선 자주독립의 침해와 조선 개화당의 자주근대화정책에 대한 청국 및 민씨 수구파의 저지와 탄압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개화당은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정책과 개화 정책에 대한 탄압에 대하여 단호하게 무장 정변의 방법으로 대항해서 나라의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달성하려 했다. 서구 사회에 관한 문명 서적을 통해서 실학 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 정세의 흐름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평균 나이 25도 안 되는 그야말로 엘리트 열혈 청년들이었다. 김옥균이 유일하게 30대였으며, 서재필은 19세. 이들은 자신들을 개화당으로,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세력을 수구당이라고 불렀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청군을 몰아내고 나라의 완전 독립을 이루기 위해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기로 하고, 1883년부터 무장 정변을 모색하며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개화당의 독자적인 계획 하에 정변을 준비하는 즈음에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郎)는 종전 개화당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인 호의를 보이면서 접근해 왔다. 이에 김옥균 등 개화당은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고 청군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측의 호의에 응하였다. 그래서 일본측으로부터 공사관 병력 150명과 일화 3백만 엔을 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개화당은 마침내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홍영식(洪英植)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사전에 준비한 폭탄으로 혼란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폭탄이 불발되자, 이웃집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킨 다음 사전에 포섭한 자객들로 사대당 요인 암살을 시도했지만 정작 민영익만 중상을 입히는 수준으로 끝났다. 결국 미국에 보빙사로 함께 가기까지 했던 홍영식은 사사로운 정을 저버릴 수 없어 부상 당한 민영익을 묄렌도르프와 함께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옮긴다. 그리고 묄렌도르프는 민영익을 미국인 의료 선교사의 집에 데리고 간다. 당시 민영익은 과다 출혈로 사경을 헤메이고 있던 터라 알렌이 없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을 했다. 그는 외국인 정치 망명객 1호였지만 일본에서도 김옥균은 골칫거리였다.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오가사와라 섬과 홋카이도 등지로 유배 아닌 유배를 보내며 해결 방안을 찾고 있었다. 그런 김옥균이 상해에 가서 청나라 거물 이홍장을 만나 조선 독립과 개혁을 담판하겠다며 1894년 양력 3월 23일 김옥균은 고베 항에서 청나라 상해로 가는 배를 탔다. 일본에서 친해진 조선인 홍종우도 동행했다. 홍종우는 조선의 최초로 프랑스 파리의 최초 유학자이다. 그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 서양 문물의 본질을 알기 위해 자기 힘으로 공부한 유학파였다. 1894년 3월 27일 상해 동화양행 호텔에 투숙한 다음 날 옆방에 있던 홍종우가 '자치통감'을 읽고 있던 김옥균에게 권총을 쐈다. 세 발을 맞은 김옥균은 즉사했다. 프랑스 유학파인 홍종우는 일찌감치 병조판서 민영소가 밀정 이일직을 통해 포섭한 자객이었다. 수구 근왕파인 홍종우는 2년여 김옥균과 친분을 쌓은 끝에 ‘역적 처단’에 성공하였다. 김옥균이 처단됐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졌다. 1894년 4월 12일 홍종우는 김옥균 시신을 중국식 관에 넣고 '大逆不道玉均(대역부도옥균)'이라 적은 천을 덮은 뒤 청나라 군함을 타고 인천에 도착했다. 홍종우는 관과 함께 배를 갈아타고 다음 날 양화진에 도착했다. 4월 14일 검시관을 보내 김옥균임을 확인한 조정에서는 전ㆍ현직 대신들이 연명해서 고종에게 이렇게 상소했다.(고종실록)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규홍(金奎弘)의 장계(狀啓)를 등보(謄報)한 것을 보니, ‘중국(中國) 병선(兵船)이 월미도(月尾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역적 김옥균(金玉均)의 시체를 싣고 왔으므로 즉시 한양(漢陽) 배에 옮겨 싣고 이어서 경강(京江)으로 출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시체를 검사하는 것은 원래 일의 체모가 그러한 만큼 경조(京兆)와 형조(刑曹)에서 형전에 따라 당일로 거행하게 하고 검험(檢驗)한 사정을 부(府)에 보고하도록 품처(稟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천하 고금에 없는 흉악한 역적으로서 누군들 그 사지를 찢고 살점을 씹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외국에서 목숨을 부지하여 천벌을 받지 않았으므로 여론이 갈수록 들끓었는데 이제 귀신과 사람의 격분이 조금 풀리게 되었습니다. 김옥균이 비록 죽었지만 소급해서라도 목을 잘라 두루 돌리고 법을 밝힐 수 있게 되었나이다.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에서 역적 신치운이 능지처사를 당했듯 김옥균에게도 능지처사형을 내려달라고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렸다. 고종은 “간절한 경들 청은 피를 뿌리고 눈물을 머금고 징계하고 성토하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다. 귀신과 사람이 공분하고 여론이 더욱 격화되어 그만둘 수가 없다. 윤허한다.”라고 했다(1894년 음력 3월 9일 '고종실록'). 이렇게 하여 김옥균은 살해당한 후 시신을 능지처참(陵遲處斬, 즉 대역죄를 지은 죄인을 머리, 몸뚱이, 팔, 다리를 토막 쳐서 죽이는 극형을 이르던 말)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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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과 역선택역선택(adverse selection)은 경제학과 정치학에서 사용한 용어이다. 경제학에서 역선택은 시장거래에서 많은 정보를 가진 자와 정보가 부족한 자가 거래를 하는등 바람직하지 못한 거래가 되는 상황을 말한다. 이러한 역선택은 시장에서 높은 상품은 사라지고 질이 낮은 상품만이 시장에 남을 수 있다. 역선택으로 인한 현상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역선택 개념은 여론조사 등에서 상대방이 지지하는 후보를 떨어뜨리기 그 반대의 후보를 지지하는 응답을 말할 수 있다. 이로써 본선에서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행해지는 응답을 역선택이라 한다. 경제학과 정치학에서의 역선택을 달리하는 개념이다. 국민의힘은 3월 8일 당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에서 ‘역선택’을 막기 위해 당 대표를 선출하는 규정을 변경했다. 그동안 당 대표를 국민힘 당원의 70%와 불특정 국민투표를 30% 반영했던 것을 ‘당원’만의 100%로 선출하기로 했다. 또한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자의 득표율이 당원 반수인 50%를 넘지 못하면 1·2위 득표자를 대상으로 결선투표를 실시하는 결선투표제를 도입했다. 종전 투표방식으로 할 경우, 국민의힘 당원들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 대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원 이와의 사람들에 의해 당선자가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불합리’로 판단한 것이다. 일단 당 대표자는 당원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후보를 선택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즉 당원 외에 사람들에 의해 역선택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논리였다. 이렇게 개정 핵심은 100% 당원 선거인단 투표로 당 지도부를 선출하고 “당원들의 총의를 확인하고 당 대표의 대표성을 제고하기 위해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안을 담았다”라는 것이 개정의 변이다. 이는 “정당 민주주의의 원칙을 분명히 하는 것”과 “정당은 이념과 철학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정권 획득과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목적으로 모인 집합체”라는 전제에 터를 잡았다. 이러한 터를 잡아 “이념과 철학, 목표가 같은 당원들이 당 대표를 뽑는 것은 당연하다. 당 대표는 당원이 뽑고 당원이 당의 의사결정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원칙을 부정하거나 폄훼해서도 안 된다”라는 것을 강조했다. 현재 국민의힘이 이러한 이념적 실천을 위해 당 대표를 선출하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국민의힘이 자유 민주주의 정당 정책을 표방하고 있다면 투표과정은 물론 그 과정에 이르는 후보 결정 과정에서 기본이념인 자유와 공정에 의해 자유로운 경쟁이 담보되어야 한다. 정당의 특정인이나 그룹에 의한 간섭이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정치적인 의사를 형성ㆍ발표할 수 있는 정치적인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정당의 자치법규에 의한 후보의 자격요건에 따라 누구든지 피선거권이 위협이나 침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피선거권 행사의 자유ㆍ공정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 가사 당원들의 당심에 의해 대표가 선출되었을지라도 전 국민을 상대한 내년 4월에 있을 총선에서 책임당원만으로 의원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기에 한계가 있다. 국민의힘은 자파 정당 대표자를 선출하는 절차를 진행하면서 발전적인 정책대결로 인한 자유로운 경쟁이 아닌 상대 후보의 약점을 폭로하는 방법으로 특정 후보를 당선시키려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되며, 독이 될 것이다. 특정 지역에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에서 과연 의식 있는 유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지금 국민의힘은 마치 ‘루비콘강’을 건너는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로지 국회의원의 차기 총선에서 공천을 받기 위한 과열 충성이 계속되어 목적을 이룰 경우, 무소속 바람이 불 가능성이 크다. 무소속 연대가 성사되고 그 힘을 발휘할 경우, 국민의힘의 과반수 의석은 보장할 수 없다. 국민의힘은 의석수 과반수에 미치지 못한 일이 있더라도 공천 혁명을 이루기 위해 과도한 분열 양상을 보이며, 서로의 약점을 폭로하는 폭로전을 일삼는다면 비록 그것이 의도적이라 할지라도 대다수 국민은 국민의힘과 결별하고 말 것이라는 점이다. 적극적인 아군만 남고 모든 우군과 관망자들은 마음의 등을 돌릴 수 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16,394,815표(48.56%)로 이재명 후보의 16,147,738표(47.83%)보다 겨우, 247,077표 차이로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총 유권자(선거인 수)는 4,419만7692명이었으며, 그중에 1천만 명이 넘게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의 성향에 대한 자료도 없다. 같은 당에서 너 죽고 나 살자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이는 여당이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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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동영상] 박병선 장로, ‘순천세계수석박물관’ 세우다박병선 장로, 그는 인간에게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인간의 변화무쌍(變化無雙)한 마음은 분초를 넘기지 못하고 변한다. 변질의 가변성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과격한 행동으로 변한다.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으로 변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으로 변한다. 믿을 수 없는 인간 본성에 내재한 마음의 가변성에 소위 ‘불변’, ‘존재의 불변’ 등을 동경하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변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불변의 존재가 있다면 그 불변의 존재는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한 존재가 될 것이며, 존재의 근원이 될 것이다. 박 장로는 그의 성격상 무가치한 인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의 가변적 마음과 그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한 인생을 마치고 이 땅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존재의 근원으로 변하지 않는, 그래서 영원히 유지되고 이어지는 생명의 세계를 그리워했다. 그래서 찾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었다. 그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라는 말씀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약 1:17).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을 믿었다. 그 하나님은 불변의 하나님이시다. 불변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그 불변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했다. 그리고 그는 장로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실들이 신약성경을 통하여 확인하고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함께한 결과였다. 박병선 장로는 이런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특히 내가 구원받은 은혜의 감격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한 전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진돗개 전도’라는 독특한 전도 방식을 갖게 되었다. 진돗개는 주인과 가족에게 매우 충실하다. 특히 주인에게 깊은 애정을 가진다. 용맹하고 민첩하며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주인이 바뀌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주인에 대한 충성심도 매우 높고 매우 용맹스럽다. 전해진 일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키운 진돗개 이야기가 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매일 박정희 대통령과 얼굴을 마주 대할 만큼 가까운 관계였는데도 이 진돗개는 주인 박정희 대통령 말고는 차지철 경호실장도 안중에도 없었다고 한다.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 진돗개,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진돗개 성격을 통해 ‘진돗개 전도’를 창안한 것이다. 주인에게 복종하는 진돗개의 특성에서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복종하는 전도 방법은 박병선 장로의 성격적인 특성을 잘 반영해 주기도 했다. 그는 성경을 읽다가 전도 방법의 다양성을 찾았다. 복음을 전할 때에 말로만이 아닌 시각적으로 복음을 전하기로 한 것이다. 수석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돌은 견고성을 유지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다는 상징성이 있다. 추위와 더위에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이는 박병선 장로가 고안한 ‘진돗개 전도’ 방법과도 유사했다. 변질하지 않고 주인에게 충성한 진돗개나 그 어떤 상황에서 변치 않는 돌의 특성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기괴한 형상을 한 바위나 돌은 신비한 힘을 드러내는 존재로 여겨져 숭배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미신이며, 우상이라며 하나님을 소개하는 전도로 활용했다. 인간의 종교성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바꾸도록 복음을 전하는 재료로 삼았다. 물에 씻긴 돌들은 사람에게 고난의 현실 표상으로 삼았다. 수석을 전도의 재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수석의 특성 때문이었다. 한 개의 작은 돌에 산수 경치의 어떤 양상이 상징적으로 축소되어 나타나 있다. 즉, 깊은 골짜기나 낭떠러지, 하나의 산봉우리를 이룬 것, 여러 개의 봉우리가 산맥으로 이루어진 것 등이 있다. 폭포와 계류, 호수와 평야, 눈 덮인 광경 등 가지가지 산수 미의 형상이 돌에 응축되어 있다. 아무렇게나 생긴 돌이 어쩌면 무슨 짐승이나 곤충ㆍ새ㆍ사람 또는 탑 같은 옛 유물 등 온갖 삼라만상의 형상을 닮은 것 같아 오래 볼수록 더욱 그러한 영상을 짙게 풍기는 돌이다. 형태가 우스꽝스럽고 유머가 있으며 아름다운 동경과 추억을 느끼게 한다. 사람ㆍ고목ㆍ새ㆍ짐승ㆍ꽃ㆍ수풀ㆍ달ㆍ별 등 온갖 자연 만상이 무늬로써 뚜렷이 아로새겨져 있다. 우아하고 화려한 색깔이 자연스럽게 돋보이고, 무엇을 닮았다 하는 개념과 사실성에서 벗어나 형언 못 할 강렬한 인상과 깊은 감동을 안겨주는 추상성을 지닌다. 수석은 어떤 형상을 단순하게 상징하고 또 구체적인 실상이 생략된 상태로 엇비슷이 닮은 묘한 느낌이 들게 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이 예언한 성전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선포하였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을 말씀하셨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라고 하셨다(마 24:2). 또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라고 했다(눅 19:40).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평화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되심을 고백한 제자들을 책망해 달라고 했다. 그때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고 했다. 박병선 장로는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실 때 이 돌을 활용하셨다는 사실을 감명 깊게 살폈다. 우리 주변에 있는 흔한 돌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복음 전도와 선포의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세계를 다니며 일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박병선 장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의 여정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입성할 때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12지파에 한 사람씩 모두 12명을 뽑아 요단강을 건널 때 한복판, 바로 제사장들이 서 있는 곳에서 12개의 돌을 메고 오라고 했다. 이 돌을 볼 때마다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이 돌들을 볼 때마다 여호와의 법궤가 요단강을 건널 때 흐르던 강물이 갑자기 멈추었다는 사실을 이 돌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기적을 영원히 상기시켜 주는 기념비로 삼기 위해서이다.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수 4:9) 이 돌이 기념석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을 후손들에게 전해주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된 돌들이었다. 박병선 장로는 여기에서 감동을 받았다. 돌의 진기한 형태, 성경의 사건과 의미가 투영된 수석을 통해 성경에서 말씀한 복음의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설명할 수 있는 진기한 수석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수집한 수석은 ‘순천세계수석박물관’을 탄생시켜 집대성했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수석 박물관이 세워지기까지 인고의 세월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과 복음 전파에 있었다. 미국의 북장로회해외선교부는 한국에 알렌, 언더우드, 헤론 선교사 등을 파송했다. 최초의 선교사는 1884년 9월 20일에 헤론 선교사가 입국했으며, 이듬해인 1885년 4월 5일 오후 3시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했다. 1892년에 미국 남장로회선교부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순천을 포함한 호남지역은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의 선교지역이었다. 순천지역은 전라노회에 소속되었으며, 그 전라노회가 전남노회와 전북노회로 분립될 때에 전남노회에 소속했다. 1922년에 전남노회에서 순천노회가 분립되었다. 1922년 9월 10일 제11회 총회시 전남노회가 순천노회 분립을 청원하여 순천노회와 전남노회가 분립되었다. 순천노회 조직일시는 1922년 10월 3일 하오 3시, 장소는 순천읍 남성경학교, 순천노회 조직회장은 곽우영 목사였다. 그 순천노회가 1951년 고신 측과 분열, 1953년 기장 측과 분열, 1959년 합동 측과 통합 측과 분열, 1979년에는 합동 측 내에서 주류 측과 비주류 측이 분열되어 2005년에 다시 합병하여 합동 측이 되었다. 순천시는 장로회의 4개 교파 중심으로 선교활동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박병선 장로의 수고와 땀과 희생으로 세워진 ‘순천세계수석발물관’은 순천시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매김하여 순천시의 기독교 복음이 더욱 활발하게 확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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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41] 사랑이 없는 은사의 무익본문/ 고전 13: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12:27-31절 말씀을 통하여 “다양한 은사들과 교회의 직분들”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다양한 은사가 교회 어떤 직분을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은사는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선하신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은사를 받은 인간의 태도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그 은사가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은사가 무엇인가? 직분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묵상하면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은 본문 13:1~3절 말씀을 통하여 "사랑이 없는 은사는 무익"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꾸준히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고전 1:2)를 세우십니다. 사도 바울은 12장에서 은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13장에서는 사랑에 관해 말씀합니다. 14장에서는 12장에서 언급된 예언과 방언에 관해 더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13장을 구분하면 첫째 단락(1-3)은 사랑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둘째 단락(4-7)은 사랑의 본성에 관해 말씀합니다. 세 번째 단락(8-13)은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앞으로 13장은 세 시간에 걸쳐서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랑이 없으면 방언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1) 본문 1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합니다. 사도는 13장 1절에서 ‘방언’, 2절에서 ‘예언’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런데 14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이 방언과 예언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미 12: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하고 13장에서는 사랑에 관해 말씀합니다. 제일 좋은 길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은사 자체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모든 은사에 있어서 사랑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1절을 깊이 묵상해 보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천사의 말은 방언이 곧 천사들의 언어로 생각했습니다. 소리가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는 헬레 세계의 신비 종교 광란의 의식 때 쓰이는 도구들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방언 문제였습니다. 황홀경의 경지에 이르는 사람에게서 보이는 방언은 외형적으로 신비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방언이 사랑이 없다면, 무익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로서 구약의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셔서 그들을 위해 행하시는 행위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신 7:6-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해 주셨으니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지칭할 때 사용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아니하신 하나님이라 하셨다면 그 말씀 역시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행위를 사랑으로 표현합니다(요 3:16).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는 사랑의 열매가 갖게 됩니다(갈 5:22). 우리가 비록 천사의 말이라 하더라도 소리 나는 구리에 불과합니다. 시끄러운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다. 사랑이 없는 방언은 시끄러운 소리에 불과하여 그리스도 공동체에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방언이란 무엇인가를 논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한 은사로서 방언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 필요한 방언이라고 한다면 그 방언을 통해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방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고 한 사람을 염두하고 바울은 이 부분을 지적합니다. 사랑의 실천 없이 오로지 신비한 방언에만 집착하여 자신은 높은 신비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교만한 자들에게 경고하고 권면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나름대로 사명을 감당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한 환경 속에서 주신 은사에 따라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 은사와 사명은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섬깁니다. 그런데 이러한 핵심 가치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은사를 통한 자기 의를 드러냅니다. 온통 자기 자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면 그런 교만함으로 은사를 활용하지 않습니다. 2. 사랑이 없으면 예언의 능력도 아무것도 아닙니다(2). 본문 2절에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합니다. 2절은 이미 12장에서 바울이 언급한 예언의 은사에 관한 문제를 다시 거론합니다. 예언의 은사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의미합니다. 비밀스러운 지식은 신비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로 얻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지식입니다. 믿음의 은사, 곧 이적 행하는 은사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예언하고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비한 신의 계시에 대한 예언의 은사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사랑의 열매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예언의 은사, 즉 신비한 예언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은사는 이러한 사랑에 근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한 후에 그 사명이 하나님과 무관한 사명이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한 자가 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에 앞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무관하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헛것“이 되어 버립니다. 회사 직원이 너무나 의욕이 앞서서 밤을 지새우며 일을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상사가 이 일을 보았습니다. 그때 상사가 “너는 꼭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느냐”고 책망하면 그게 어떻게 되겠습니까? 혹 우리가 이런 경우가 아닌지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3. 구제의 은사 역시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3). 본문 3절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사랑의 낮은 단계에서 남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랑 없이 구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제와 희망은 사람의 관점에서 칭찬해 줄 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이런 행동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익이 없습니다. 비록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은사의 대전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은사는 본인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무익한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를 대하는 방법과 태도가 문제입니다. 이 은사는 성령의 나타남으로 가능합니다(12:7). 주님의 몸이 성전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은사의 목적을 나에게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찾아야 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라고 이미 고린도전서 12:4-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복수의 은사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도 모든 은사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은사를 성령을 통해 주어졌으므로 모두가 다 귀합니다.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은사는 부분적이고 단편적입니다(13:9). 즉 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은사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 그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구원의 조건으로, 혹은 공로 사상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은사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봉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꼭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4. 교훈과 적용 교회는 여전히 오늘날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왜 희망입니까? 그것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영양분을 공급받기를 거절한 자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에서 구성원들과 원수를 맺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다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 은사가 자기 자랑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은사는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웃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없으면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명을 감당한 후 하나님이 결산하실 때 하나님과 무관한 은사, 사명이었다고 판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은사가 헛되지 않고 오로지 유익한 은사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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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법연구소 월간 교회법 2월호 발간(통권21호© 리폼드뉴스 © 리폼드뉴스 교회는 본래의 목적을 위해 일정한 조직과 다스림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정치를 필요로 한다. 교회의 기본 통치권은 교회의 머리이시며, 설립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다스릴 때 사람과 사람들의 기관을 활용한다. 교회는 말씀선포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교회를 다스리시며 인도해 가신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면 교회는 일반 시민단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교회는 여러 정치 형태로 감독정치, 대의정치, 회중정치 등의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고대교회는 감독정치를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와 영국교회는 감독이 곧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막강한 권세를 누려왔다. 종교개혁교회 중에 루터교회와 감리교회는 감독제도를 채택해 왔다. 그러나 대의정치 제도를 도입한 장로교회는 감독정치는 종교개혁 정신에 맞지 않다고 한다. 교인의 대표자와 교회의 대표자를 세워 그들로 교회를 운영하는 정치제도이다. 대의정치는 교회 구성원의 의사에 따라 선택한 직원으로 하여금 교회를 다스릴 수 있도록 권세를 주셨다. 선택된 교회의 직원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를 남용하면 안 된다. 그 남용의 현장이 오늘날 지교회의 분쟁이다. 성경적 근거 위에서 공정한 집행이 중요하다. 한국교회법 학술 월간 <교회법> 2월호 원문 파일 바로가기 교회법 제21호 김포등록1.hwp (churchla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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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무엇이냐?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이 증거하고 선포한 복음에서 이탈하여 유대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가는 현실을 교정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보낸다. 유대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혼란이었다. 아브라함 자손의 복을 누리려면 율법을 준수해야 하고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가르침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울은 구약성경의 아브라함의 자손의 복이란 하나님의 성령의 약속과 그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자라고 한다.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한다(갈 3:16). 본문 갈라디아서 3:19-22절 말씀에서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율법은 무엇이냐 라고 질문한다. 자신이 질문하고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한다. 율법은 무엇을 위해 있느냐에 대한 질문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고 한다(19).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특별한 자손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서 율법이 필요한 것이지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21)라는 질문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하면서 만약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율법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었을 것이다. 바울은 성경은 온 세상이 죄에 갇혀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믿음을 통한 약속을 주시기 위한 것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 받을 수 있다(22).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그들을 정죄하지만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은 우리를 저주하지 못한다. 율법은 죄가 없는 인간을 죄를 덮여 씌워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하여 죄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율법이 오기까지, 혹은 율법으로 인해 그 죄가 죄로 드러난 것이다. 율법은 그 죄로 인한 정죄를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정죄의 상태에서 구약의 약속으로 성취 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의롭다고 하기고 구원해 주셨다. 바울은 이러한 복음을 갈라디아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고 있고 설득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들어야 할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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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헌종(1839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순조의 친손자이자 효명세자의 하나뿐인 외아들로 아버지 효명세자가 1830년 22시에 갑작그럽게 요절하고 할아버지 순조마저 1834년 44세에 건강 악화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헌종(이름은 환(奐), 자는 문응(文應))은 왕세손의 신분으로 8살 어린 나이에 국왕이 되어 조선 왕으로 최연소로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순조의 정비이자 할머니인 대비 군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헌종이 즉위한 시기는 서양 세력이 조선에 침투하기 시작한 때였다. 18세기 이후 영국, 프랑스 등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군함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해 왔다. 그들은 무역과 포교를 빌미로 동양에 대한 침략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잦은 이양선의 출몰에도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의 조정은 쇄국 정책으로 일관했다. 특히 정권을 장악한 풍양 조씨 세력은 척사 정책의 일환으로 천주교 박해를 주도했다. 물론 헌종도 이에 동조했다. 헌종은 1839년(헌종 5)에 조인영이 지어 올린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전국에 반포했다. 〈척사윤음〉은 유학을 정학(正學)으로 규정하고 그에 반하는 서학(천주교)은 사학(邪學)이므로 배척해야 한다는 척사귀정(斥邪歸正)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1839년(헌종 5)에 시작해 1840년(헌종 6)까지 프랑스 인 신부 모방과 샤스탕을 비롯해 천주교도 70여 명을 처형한 기해박해(己亥迫害)는 이러한 척사귀정의 원칙이 적용된 것이었다. 풍양 조씨 세력은 천주교 탄압을 통해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안동 김씨 세력을 함께 제거하고자 했다. 이때 이러한 정치적 목적 때문에 천주교 박해 때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도 많았다. 이후에도 헌종과 풍양 조씨의 천주교 탄압은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1846년(헌종 12)에 프랑스 해군 함장 세실(Cecille)이 군함 3척을 이끌고 나타나 충청도 홍주에 위치한 외연도에 정박했다. 그들은 조선의 왕에게 전달할 국서를 가지고 있었다. 국서의 내용은 기해박해 때 프랑스 인이 처형된 것에 대한 항의와 자국민에 대한 탄압이 계속된다면 본국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에 대한 협박이자 문호 개방에 대한 압력이었다. 세실은 국서를 조선의 왕에서 전할 것을 요구했으나 외연도의 지방관과 주민들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자 세실은 국서를 두고 떠나면서 다음 해에 다른 군함이 답변서를 받으러 올 것이라고 했다. 헌종은 당시 체포되어 옥에 갇혀 있던 사학 죄인 김대건(金大建)을 효수에 처할 것을 명했다. 김대건은 기해박해 때 처형된 모방 신부에게 발탁되어 마카오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사제로서 포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헌종은 세실 제독의 군함 출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김대건과 여러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천주교는 고단한 조선 백성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조선왕조실록(헌종실록 6권, 헌종 5년 10월 18일 경진 1번째기사 1839년 청 도광(道光) 19년척사 윤음을 경외에 내리다) 〈척사윤음(斥邪綸音)의 번역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윤음: 헌종이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 전국의 백성에게 내린 임금의 말씀). 척사 윤음(斥邪綸音)을 경외(京外)에 내리기를(庚辰/下斥邪綸音于京外曰) "아!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한다.’ 하였고,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거룩하신 상제(上帝)께서 온 세상 백성에게 선(善)함을 내려 주셔서 고유(固有)의 성품(性品)을 순하게 하셨다.’ 하였다. 그 동일한 근원의 성품을 부여한 시초를 논하기를, ‘하늘’이라 이르고 ‘상제(上帝)’라고 하였는데, 하늘은 형체(形體)를 말하는 것이고, 상제는 주재(主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하셨다.’ 하고, ‘선함을 내려 주셨다.’ 한 것은 정성스럽게 실제로 가르쳐 고하신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니, 한 이치가 일어나는 바에 이기(二氣) 가 운행되고 사서(四序)가 운행되어 만물(萬物)이 생육(生育)하는 것이다. 이에 사람들이 그 이치를 얻어 성(性)으로 삼는 것인데, 그 덕(德)에 네 가지가 있으니, 인(仁)·의(義)·예(禮)·지(智)이고, 그 윤(倫)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부자 유친(父子有親)·군신 유의(君臣有義)·부부 유별(夫婦有別)·장유 유서(長幼有序)·붕우 유신(朋友有信)이다. 이는 모두 당연히 그러한 것이요, 안배(安拜)하여 포치(布置)하거나 힘써 억지로 작위(作爲)함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내시니 만물이 있고 법칙이 있다. 이를 좇으면 하늘에 순종하는 것이 되고, 이를 어기면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하였으니, 무릇 하늘을 받들고 상제를 섬기는 것이 어찌 사단(四端) 과 오륜(五倫)에서 벗어나겠는가? 아! 복희씨(伏羲氏)·신농씨(神農氏)·요제(堯帝)·순제(舜帝)로부터 천위(天位)를 이어받아 대중 지정(大中至正)한 도덕의 표준을 세우니, 그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조심해서 받들고 돈독하게 질서를 세워 삼가서 편 것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또한 우리 공부자(孔夫子)께서 헌장(憲章)을 조술(祖述)하신 후로 송(宋)나라 군현(群賢)에 이르기까지 그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착하게 인도한 것도 오직 이것뿐이었다. 털끝만한 차이가 있어도 오히려 이단(異端)이라고 말해 왔는데, 더구나 음려(陰&#27828;) 와 황탄(荒誕)하여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기괴한 외도(外道)이겠는가? 국가에는 상형(常刑)이 있으므로, 반드시 죽이고 용서함이 없어야 하니, 이는 이른바 죄를 줌으로써 죄를 그치게 하는 방법인 것이다. 아! 우리 나라는 문명(文明)한 고장에 처하여 어질고 현명한 교화(敎化)와 미풍(美風)·선교(善敎)를 계승해 온 지 오래 되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성조(聖朝)에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강역(疆域)을 처음 구획(區劃)하시고는 이륜을 밝혀 인기(人紀)를 세우고 도학(道學)을 숭상하여 국속(國俗)을 바로잡으셨는데,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경계(警戒)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크게 하늘에 보답하니, 아름다운 국운(國運)이 영원히 보전(保全)되고 유현(儒賢)이 배출(輩出)되어 위로 공경 대부(公卿大夫)로부터 아래로 여항(閭巷)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 수사(洙泗)090) 의 행실을 좇아 행하고 낙민의 글을 외면서 남자는 충효(忠孝)를 근본으로 삼고 여자는 정렬(貞烈)을 소중하게 여겼으니, 관혼 상제(冠婚喪祭)에는 반드시 예(禮)를 준수(遵守)하였고, 사농 공상(士農工商)은 각각 그 업(業)을 이루어서 지금까지 서로 바르게 살아왔고 나라에서도 의지하여 왔다. 더구나 우리 정종 대왕(正宗大王)께서는 하늘이 내신 빼어난 성덕(聖德)으로 백왕(百王)의 대통(大統)을 이어 성명(聲明)과 문물(文物)을 찬연히 구비하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흉적(凶賊) 이승훈(李承薰)이라는 자가 서양(西洋)의 책을 사가지고 와서 천주학(天主學)이라고 일컫고는 선왕(先王)의 법언(法言)이 아닌데도 몰래 서로 속여 유인(誘引)하자, 성인(聖人)의 정도(正道)가 아닌데도 자연히 탐혹(耽惑)되어 점차 이적(夷狄)·금수(禽獸)의 지역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에 정종 대왕(正宗大王)께서 오랠수록 더욱 치성(熾盛)해질 것을 근심하셔서 그 괴수를 다스리고 나머지는 용서하시었다. 이는 그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미루어 스스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니, 더할 수 없는 후은(厚恩)이요 성덕(盛德)이다. 비록 어리석기가 돼지와 물고기 같고 흉악하기가 효경( 梟) 같다 하더라도 마땅히 느끼고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인데, 이미 본성(本性)을 상실하여 구습(舊習)을 고치지 않으니, 신유년[1801 순조 원년] 사학(邪學)을 토죄(討罪)한 옥사(獄事)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던 것이니, 얕은 재예(才藝)를 가진 자가 그 새로운 것을 선망하여 창도(唱導)하면, 몽매하여 지각(知覺)이 없는 자가 그 탄망(誕妄)함을 좋아하여 따르니, 경재(卿宰)의 지위에 있는 몸으로 스스로 소굴을 만들어서 가정에 전해 오던 전통적인 교훈(敎訓)이나 예법(禮法)까지 오염(汚染)된 바가 있었다. 주문모(周文謨)는 깎은 머리 모양을 바꾸어서 감히 도시(都市)로 활보하였고, 황사영(黃嗣永)은 백서(帛書)를 마련하여 해양의 선박을 불러들이려고 하였으니, 그들의 흉도(凶圖)와 역절(逆節)이 이에 이르러 다급해졌던 것이다. 진실로 우리 순종 대왕(純宗大王)과 우리 정순 대비(貞純大妃)께서 이 도깨비 같은 무리의 간교함을 죄다 통촉(洞燭)하셔서 크게 부월(斧鉞)(형벌)의 위엄을 떨치시어 시원하고 통렬하게 제거하지 않으셨더라면, 나라가 나라답고 사람이 사람다운 도리를 지켜왔을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 이제 신유년으로부터 40년이 되어 금망(禁網)이 점차 해이(解弛)해지자, 사교(邪敎)가 다시 치성(熾盛)해지면서 독한 물여우 같은 무리는 모습을 감추고 허다한 가라지 같은 종자를 바꾸어서 역수(逆竪)는 성(姓)을 바꾸어 출몰(出沒)하고 요망(妖妄)한 역관(譯官)은 재물을 싣고 가서 교통하여 몰래 양인(洋人)을 불러들인 것이 두세 번에 이르니, 성기(聲氣)가 이역(異域)까지 접속되고 맥락(脈絡)이 동당(同黨)에 두루 통한 바가 신유년에 견주어 거의 더함이 있다. 이에 나 소자(小子)는 삼가 황조(皇祖)의 모유(謨猷)를 준수하고 공경히 자성(慈聖)의 명(命)을 받들어 감히 천벌(天罰)을 시행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혼미(昏迷)하여 돌이킬 줄 모르고, 깊이 빠져들어 건질 수 없게 되어 머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스스로 대륙(大戮)의 형장으로 나가고 있으나, 내가 오직 백성의 부모(父母)가 되어 애통(哀痛)하고 측달한 마음이 가슴속에 없을 수 있겠는가? 아! 내가 듣건대, 가르치지도 않고 형벌하는 것은 백성에게 재앙(災殃)을 주는 것이다.’라고 한다고 하니, 내가 마땅히 사교(邪敎)의 원위(源委)094) 를 조목마다 변명 분석하여 그대 조정의 신하들과 우리 팔도(八道)의 사녀(士女)들에게 포고(布告)하여 각각 분명히 알게 하니, 그대들은 공경히 받들라. 아! 저 천주학(天主學)을 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이 학문은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을 존숭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하늘은 본시 공경할 만하고 존숭할 만하다. 그러나 저들이 공경하고 또 존숭하는 것은 죄를 씻고 은총(恩寵)을 구하는 여러 가지 비사(鄙事)[천한 일]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이는 스스로 하늘을 속이고 하늘을 업신여기는 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공경하고 또 존숭하는 것은 곧 앞에서 이른바 사단(四端)과 오륜(五倫)의 하늘이 명하신 성(性)을 밝히고 상제(上帝)께서 내려 주신 선(善)에 순종하여 날마다 하는 일이 이치에 합당하여야 한다는 것이니, 그 사정(邪正)을 구분함에 있어 두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저 야소(耶蘇)라고 이르는 자는 사람인지 귀신인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지 못하겠는데, 저 무리가 말하기를, ‘처음에 천주(天主)로 내려오셨다가, 죽어서 다시 올라가 천주가 되어 만물(萬物)과 민생(民生)의 큰 부모[大父母]가 되셨다.’ 한다. 그러나 하늘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사람은 몸도 있고 껍질도 있으니, 결단코 서로 섞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하늘이 내려와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고, 사람이 올라가서 하늘이 되었다고 하니, 무슨 어렴풋하게 의혹할 만한 단서가 있어서 이와 같이 거짓 속이고 있는 것인가? 그대들은 시험삼아 생각해 보라. 고금(古今)을 통하여 이런 이치가 있었던가? 아! 아비 없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미 없이 어떻게 양육(養育)될 수 있겠는가? 그 은덕(恩德)을 갚으려면 높은 하늘같이 그지없어서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소멸될 수 없는 대본(大本)인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곧 나를 낳은 이는 육신(肉身)의 부모(父母)가 되고 천주(天主)는 영혼(靈魂)의 부모가 된다고 하여, 친애(親愛)하여 숭봉(崇奉)함이 저 천주에 있고 이 부모에게 있지 않아서 스스로 그 부모를 절연(絶緣)하고 있으니, 과연 혈기(血氣)의 천륜(天倫)으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제사(祭祀)의 예(禮)는 조상(祖上)을 추모하며 근본에 보답하는 것이니, 효자(孝子)가 그 어버이를 차마 죽었다고 생각할 수 없음은 신리(神理)·인정(人情)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곧 신주(神主)를 부수고 제사를 폐지하고는 죽은 자는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저들이 말하는 영혼은 또 무엇에 의거한다는 말인가? 앞뒤를 제멋대로 결단을 내려 조리가 맞지 않는 말이다. 범과 이리는 포악한 짐승이지만 오히려 부자(父子)의 정(情)이 있고, 승냥이와 수달은 미물(微物)이지만 오히려 제사를 지내는 의리가 있는데, 저들이 비록 둥근 꼭두머리와 모난 발꿈치를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찍이 범·이리·승냥이·수달만도 못하여 사람으로서 양심(良心)이 없음이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단 말인가? 아! 군신(君臣)의 의리는 천지(天地)에서 도피할 곳이 없는 것인데, 저들은 곧 교황(敎皇)·교주(敎主)라고 칭호(稱號)를 만들어서 융적(戎狄)의 추장(酋長)과 적도(賊盜)의 괴수 같을 뿐만이 아니다. 이는 사목(司牧)[군주]의 권병(權柄)을 훔쳐서 정화(政化)가 미칠 곳이 없고 명령을 시행할 곳이 없게 하려는 것이니, 화란(禍亂)의 근본이 어찌 이보다 심함이 있겠는가? 아! 음양(陰陽)이 있으면 반드시 부부(夫婦)가 있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이치인데, 저들은 시집가고 장가들지 않는 것을 망령되게 정덕(貞德)으로 가탁(假托)하면서 아랫사람들은 남녀가 섞여 살면서 풍교(風敎)를 더럽혀 어지럽히고 있으니, 앞의 것으로 말미암으면 인류가 진멸(殄滅)할 것이고, 뒤의 것으로 말미암으면 인륜(人倫)이 더럽혀질 것이다. 아비를 업신여기고 임금을 업신여김이 곧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부부의 관계를 또 어떻게 논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성모(聖母)·신부(神父)·영세(領洗)·견진(堅振) 등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명색이 나올수록 더욱 변환(變幻)이 심하니, 요컨대 마귀에 홀린 무격(巫覡)이 부적이나 정화수로 신(神)에게 빌면서 저주하여 세상을 현혹시키는 것인데, 조금이라도 식견(識見)을 갖춘 자라면 어찌 혹시라도 의심하거나 현혹되겠는가? 그리고 천당(天堂)·지옥(地獄)에 대한 이야기는 어리석은 사람은 쉽게 속일 만한 일이다. 이는 석씨(釋氏)의 진부(陳腐)한 이야기로서, 이전 사람들이 이미 남김없이 변해(辨解)하였으므로, 거듭 일을 설파(說破)할 것도 못되는데, 이를 전에 누가 보고 누가 전하였다는 말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황당한 말이다. 저들 또한 고루 천성(天性)을 받아 함께 인류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곧 오상(五常)을 무너뜨리고 삼강(三綱)을 멸절시키고는 황홀하고 어두운 곳에서 그 자신이 죽은 후의 복(福)을 구하려는 것은 또한 미혹됨이 심하지 않은가? 복을 구하는 도리가 진실로 있으니,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영원히 하늘의 명에 배합되게 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추구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온화한 군자(君子)는 복을 구하되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늘의 명에 배합한다[配命]’ 함은 이치에 합당함을 말함이고, ‘어기지 않는다[不回]’ 함은 ‘간사한 행위를 하여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복이 저절로 이르겠지만,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복을 구하고자 해도 도리어 화(禍)만 얻게 될 것이다. 나는 듣건대, 야소(耶蘇)는 가장 참혹하게 죽은 자라고 하니, 그 학문이 복이 되고 화가 되는 것을 이에서도 증험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를 보고 징계(懲戒)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처형되어 죽는 것을 즐거운 장소로 여기며 도거(刀鋸)[칼과 톱. 모두 형구(荊具)임.] ·항양(桁楊)[칼과 차꼬.]을 견디어 내며 혼몽하게 두려움조차 알지 못한 채 취한 듯이 미친 듯이 하여 꺼내어 깨우칠 수가 없으니, 이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망령된 자이다. 아! 불쌍하도다. 이것이 만약 광명 정대(光明正大)한 교(敎)라면 어찌하여 반드시 어두운 밤에 밀실(密室) 가운데에서 강론(講論)하고, 심산 궁곡(深山窮谷) 사이에서 불러 모으며, 폐고(廢錮)된 종족(種族)의 서얼로 뜻을 잃어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와 지극히 어리석은 하류(下流)로서 재물을 탐내고 음란한 짓을 하는 무리가 서로 교우(敎友)라고 부르면서 각각 사호(邪號)를 베풀고는 머리를 감추고 꼬리를 숨긴 채 한편이 될 것인가? 이러한 자취만으로도 이미 지극히 흉악하고 지극히 요사한 것임이 판명되었으니, 그들이 최후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황건적(黃巾賊)099) ·백련교(白蓮敎)100) 등의 포장(包藏)하려는 뜻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저들이 이 나라에서 생장(生長)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 나라에서 먹고 산단 말인가? 이 나라의 풍속은 단지 사단(四端)을 확충하고 오륜(五倫)을 배식(培植)하는 것이니, 부조(父祖)가 서로 이어오고 사우(師友)가 서로 의뢰하는 것이 모두 이에 있는데, 무엇 때문에 이 나라에서 함께 좇는 평탄한 길을 버리고 거의 만 리 밖의 이류(異類)의 사설(邪說)을 달갑게 여겨 스스로 함정으로 나아간단 말인가? 아! 저 점차 물들어서 깊이 금고(禁錮)된 자와 반핵(盤&#35208;) 죄상이 다 드러난 자는 이미 복죄(伏罪)되었으나, 미처 드러나지 않은 자는 또 규결(糾結)을 어떻게 하고 자만(滋蔓)101) 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죽은 자는 불쌍히 여길 것이 못된다고 하나, 살아 있는 자는 아직 크게 변개(變改)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저들도 모두 나의 적자(赤子)인데, 차마 한결같이 미혹에 빠졌다고 해서 어둠을 깨우쳐 밝은 길로 나아가게 할 방도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마음속을 포고해 보이는 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바로 하늘이 사람을 다스리는 법이며, 옛 성인(聖人)들의 교훈(敎訓)이니, 아! 그대 신료(臣僚)와 백성들은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아비는 그 아들을 훈계하고 형은 그 아우를 훈계해, 그릇된 자는 반드시 개도(開導)할 것을 생각하고, 미처 빠지지 않은 자는 반드시 권계(勸戒)할 것을 생각하도록 하라. 또 혹 개도(開導)하고 권계해도 끝내 따르지 않는 자는 반드시 진멸(殄滅)하여 징계할 것을 생각해서 이러한 일종(一種)으로 하여금 감히 다시 용서받을 수 없게 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으며,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상도(常道)가 바로잡히면 서민(庶民)에게 선한 기풍(氣風)이 일어나고, 서민에게서 선한 기풍이 일어나면 이에 사특함이 없어진다.’ 하였다. 오늘날을 위한 방도는 오로지 행의(行誼)를 돈독히 하여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의 길을 닦고, 경술(經術)을 독실히 하여 시(詩)·서(書)·역(易)·예(禮)를 익히게 하고, 방종(放縱)을 추향(趨向)하여 전성(前聖)의 법도를 위배하지 말게 하고, 잗단 것을 참고하고 의거하여 선현(先賢)의 훈고(訓 )를 업신여기지 말게 하여 우리 장보(章甫)와 금신(衿紳)으로 하여금 순수하게 천덕(天德)·천이(天 )의 자연스런 법칙에서 한결같이 나오게 한다면, 우리의 도(道)는 부식(扶植)을 기필하지 않아도 부식될 것이며, 이학(異學)은 배척을 기필하지 않아도 배척될 것이니, 저 감발(感發)하여 스스로 분기(奮起)하는 자와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스스로 후회하는 자가 어찌 사학(邪學)을 버리고 정도(正道)로 돌아올 리가 없겠는가? 아! 《서경(書經)》에, ‘백성에게 허물이 있는 것은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지금 이 사교가 제멋대로 횡행(橫行)하고 있는 것은 실로 과매(寡昧)한 내가 거느려 인도하지 못한 허물에 연유하므로, 스스로 돌아보며 자책(自責)하고 있었는데, 그 아픔이 내 몸에 있는 것 같다. 곧 그대들의 춥고 따뜻함과 굶주리고 배불리 먹는 세절(細節)까지 생각하면 나 소자(小子)가 밤낮으로 안타까워하지 않음이 없는데, 그대들의 성명(性命)이 유지되는 바와 사람과 짐승의 한계가 나뉘어지는 일에 내가 어찌 거듭 되풀이해서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애통(哀痛)해 하면서 유시(諭示)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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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민주주의 정당 대표자 선출, 자유 경쟁 보장돼야!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다. 청년 예수가 등장하여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같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유대 종교지도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오히려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예수 중에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다. 예수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약이 예언한 그 메시아면 종교지도자들, 예컨대 대제사장과 서기관 등은 가짜가 된다. 반대로 종교지도자들이 진짜이며 예수는 가짜가 된다. 많은 이스라엘 민중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정치적인 상황에서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해방해 줄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찾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청년 예수는 이러한 정치적인 메시야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예수는 진정한 메시야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민중들은 예수를 따랐다. 그가 전한 말씀은 권위가 있었다. 또한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죄를 사해주는 권세를 행사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구원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길이요 진리인 자신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고 전했다.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러한 예수를 핍박한 이유는 자신들이 가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인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제거하려고 했다. 당시 로마 식민지로 있는 이스라엘은 사형집행권은 로마에 있었다. 로마의 손을 빌려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 예수를 구약이 예언한 메시야로 믿고 그를 따르고 추종하는 그의 제자들과 민중들을 예수에게서 차단하는 방법은 예수를 죽이는 일밖에 없었다.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 성경에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를 받았다는 말씀을 이용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여 죽이므로 예수는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그 이유는 제자들과 민중들이 예수에 대한 환멸을 갖게 하여 예수 중심의 구원 운동을 종식 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은 예수님의 자기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죄 때문에 우리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 죽음이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은 두 세력 간의 다툼으로 뜨겁다. 그 두 세력은 좌파와 자유 우파이다. 공교롭게도 더불어민주당은 좌파, 국민의힘은 자유 우파로 특정하여 이슈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왜 이런 등식이 성립되었는지 사실확인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 후보인 이재명을 누르고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제20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좌파 정권에 대한 자유 우파 정권의 승리라고 주장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247,077표라는 근소한 차이인 16,394,815표(48.56%)로 당선됐다. 상대 이재명 후보 역시 16,147,738표(47.83%)를 획득했다. 윤석열 정부는 국민 가운데 상대 이재명 후보를 지지한 1,600만 표가 있다는 것을 의식할 것이다. 물론 이 중에서는 적극적인 지지자들도 있겠지만 특별한 경우 지지를 철회할 수 있는 자들도 있을 수 있다. 이제 이재명 후보를 지지했던 1,600만 표가 결집 되지 못 하게 하는 것이 일명 자유 우파 진영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각종 불법 혐의를 받는 이재명 국회의원이 무혐의, 혹은 무죄처분을 받을 경우, 그를 지지했던 1,600만 명이 결집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불법 혐의가 입증되어 사법부의 단죄를 받는다면 일부 적극적인 지지자들을 제외한 많은 민중이 지지를 철회할 수도 있다. 이제 이재명 개인에 대한 문제를 떠나 더불어민주당의 존폐와도 연결된 상황이 돼 버렸다. 소위 자유 우파 진영은 과거 광화문 촛불 혁명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문재인 정부를 탄생했던 세력으로 평가된 광화문 촛불 혁명을 재현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학습된 상황에서 여기에 맞서 죽기 살기로 덤벼든 자유 우파를 표방한 전광훈 목사의 광화문 집회는 촛불 집회에 대항하고 있다. 그러면서 좌파 세력으로 무너진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구호로 여론화에 앞장서고 있다. 이 시대 자유 우파 진영은 전광훈 목사를 영웅적인 투사로 만들어 가고 있다. 현 국회가 여소 야대가 되어 윤석열 정부의 발목을 붙잡는다는 현실정치는 1년 3개월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서 사활을 걸 수 있다. 이제 여당이 몇 석의 의석을 확보할 것인지 사활이 거린 문제로 변해 버렸다. 여소 야대는 윤석열 정부 때 굳어진 것이 아니다. 2024년 4월에 진행될 총선은 윤석열 정부의 중간평가 성격의 투표가 될 것이다. 단지 평가를 넘어 국정 운영을 위해 국회의원 몇 석을 확보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국민의힘 당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과연 누가 당 대표가 될 것인지가 관건이다. 당 대표자는 국회의원 공천권과 연동되어 총선을 국민적인 지지 속에 관리해야 하는 엄중한 자리이다. 문제는 당 대표 자리를 놓고 아직 후보 등록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민의힘은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공천권과 연동된 당 대표자에 누가 입후보할 것인지 관심이 많다. 예상 후보자에 대한 내부 이해관계는 첨예한 대립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자유 민주주의 정당 정치에서 특정 인물을 인위적으로 피선거권까지 제한하려는 인상은 절대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자유로운 경쟁 체제가 보장되지 못할 때 반작용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여성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한다면 여성 유권자에게 치명적이다. 공천권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당 대표의 선거가 자유 민주적인 경쟁 체제 속에서 우군과 구경꾼을 아군으로 투표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칫 잘못하면 우군과 구경꾼이 집단으로 떠날 수도 있다. 아군만으로 투표에서 승리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을 두 정당은 실패의 원인과 성공의 원인에 대해 동시적으로 찾아야 한다. 언제나 문제는 과열 충성자들이 문제인 경우들도 많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중에 패한 원인을 찾는 형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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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총회(1940년), 경기노회, 경성노회 총대 파송 거부 '총회 분열 실패'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7개 대리회를 노회로 승격하여 1907년 9월 17일에 창립되었다. 경충대리회는 경충노회로 1911년 12월 4일 조직되었다. 경충노회는 서울, 경기, 충청권을 그 대상 관할로 1911. 12. 4.에 서울새문안교회에서 조직노회로 회집되어 제1회 경충노회가 회무를 처리하였다. 경충노회는 1924년 12월 19일에 경기노회와 충청노회로 분립되었다. 경기노회 조직은 1924. 12. 19.에 이루어졌다. 경기노회는 경성노회와 분립하고 총회 결의에 따라 경성노회는 1932년 10월 11일 새문안교회에서 조직(분립예배)하였다. 경기노회와 경성노회는 1940년 제29회 총회에 총대를 파송하지 못했다. 두 노회 뿐만 아니라 충청노회와 경동노회 역시 총대를 선출하지도 않고 총회에 총대를 파송하지 않았다. 이는 총회에서 대회 문제와 관련하여 노회간의 갈등문제 때문이었다. 규모가 적은 함북노회와 순천노회는 4인을 파송할만한 당회의 수에 미달한 노회는 총회 총대 4인을 파송해 달라고 제20회 총회(1931년)에 청원했다. 그러나 부결되었다. 규모가 컸던 의산노회는 제21회 총회(1932년)에 성찬 참여 교인 1,500명당 목사 장로 1인씩 총회 총대를 파송하게 해 달라고 청원하여 노회 수의 절차를 진행했지만 부결되었다. 그러나 소규모 노회가 된 경기노회는 모든 노회가 공히 동수의 총대로 파송하자고 헌의했지만 부결되었다. 제23회 총회(1934년)에 경성노회, 경기노회, 전남노회, 순천노회, 전북놓뢰가 대회 설치를 헌의하였다. 제24회 총회(1935년)에 경성노회는 총대수를 각 노회 동수로, 함북노회는 각 노회당 다섯 명으로 동일하게, 의산노회는 세례교인 2천명 당 1명씩 파송하기로 헌의하였지만, 모두 부결되었다. 그러나 총회 총대를 15당회 당 1인씩 파송하던 것을 20당회 당 1인씩 파송하자는 평북노회의 청원안을 받아들여 노회에 수의하여 이 역시 부결되었다. 경성노회는 제27회 총회(1938년)에 다시 총회 총대를 각 노회 동수로 해 달라고 헌의했지만 이 역시 부결되었다. 교세가 강한 평안도, 황해도 지역의 노회들이 총회를 계속 주도하였다. 그러나 교세가 약한 남부지역 노회들은 불만이 컸다. 이러한 불만으로 대회(大會) 설치를 가지고 나왔다. 총회는 4년에 한 번씩 개최하고 매년 지역별로 대회를 개최하자는 헌의가 있었다. 대회 설치안은 본회에서 부결되거나 각 노회에 수의를 해도 부결되었다(제24회 총회). 제25회 총회(1936년)에서 함남노회와 함북노회가 대회 설치를 헌의하였으며, 순천노회는 3년에 제1회 총회를 소집하고 대회는 매년 시행하는 수정안을 내놓았지만 노회 수의에서 또 부결되었다. 주로 서북지역 노회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빈번히 대회 설치가 무산되었다. 이로 인해 구모가 작은 남주지역의 노회들이 반감이 일기 시작했다. 제29회 총회(1940년 9월)가 소집되기 전인 1940년 2월에 경성노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총회를 세우려는 움직이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자체 분쟁과 분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앞서 설명한 것 같이 경성노회, 경기노회, 충청노회, 경동노회가 제29회 총회 총대를 파송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29회 총회 회의록에 의하면 4개 노회 총대 기록이 없다. 평양노회는 뒤늦게 생각을 바꾸어 대회 설치를 결의하였지만, 총회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 대회 문제는 지금도 본 교단 총회 안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이듬해인 1941년 제30회 총회(1941. 11. 21.)에 총대를 파송했다. 경기노회와 경성노회는 일제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폐쇄하기 전 마지막 해인 1942년 5월 춘계 정기회에서 양노회가 합병기로 결의했다. 이를 그해 10월에 소집된 제31회 총회에 청원했다. 이에 제31회 총회는 정치부에서 본회에 보고한 내용은 “경기노회장 및 경성노회장의 노회병합 청원건은 허락하고 신 노회조직에 관해서는 소집장에 평강미주씨를 임명하고, 소집일시 및 장소는 소집장에게 일임함”을 보고하여 승인되었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