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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갑신정변(1884년)과 김옥균의 능치처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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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갑신정변(1884년)과 김옥균의 능치처참

한국에 개신교 선교의 기초를 놓기 위한 특별한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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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 직후 양화진 형장 사진. 참수된 머리에 내걸린 '대역부도옥균' 글자는 암살범 홍종우가 썼다. 원안은 김옥균.

 


“알렌 의사가 온 시점, 그 얼마 후 사건(갑신정변)의 발생, 중상자(민영익)의 성공적 치료 등은 모두 이 땅에 개신교 선교의 문을 열고 확고한 선교의 기초를 놓기 위한 특별한 섭리였다고 생각합니다.”

 

헤론 선교사가 요코하마-나가사키-부산-제물포를 거쳐 1885년 6월 21일 주일 저녁 서울에 도착했다. 다음해인 1886년 헤론은 서울 도착 한지 5일 째되는 날인 6월 26일, 뉴욕 북장로교선교회 엘린우드 총무에게 보낸 편지다. 

 

헤론은 이 편지를 통해 의료 선교를 통해 개화와 선교의 문이 열리고 있다고 했다. 알렌이 갑신정변으로 인한 민영익을 성공적으로 치료함으로써 이 땅에 선교의 문이 열리고 확고한 선교의 기초를 놓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갑신정변을 통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는 이땅에 복음이 확산되고 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또는 갑신혁명(甲申革命)은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ㆍ박영효ㆍ서재필ㆍ서광범ㆍ홍영식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무력 정변(쿠데타)이다. 

 

갑신정변의 원인은 청국의 조선 자주독립의 침해와 조선 개화당의 자주근대화정책에 대한 청국 및 민씨 수구파의 저지와 탄압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개화당은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정책과 개화 정책에 대한 탄압에 대하여 단호하게 무장 정변의 방법으로 대항해서 나라의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달성하려 했다. 

 

서구 사회에 관한 문명 서적을 통해서 실학 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 정세의 흐름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평균 나이 25도 안 되는 그야말로 엘리트 열혈 청년들이었다. 김옥균이 유일하게 30대였으며, 서재필은 19세. 이들은 자신들을 개화당으로,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세력을 수구당이라고 불렀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청군을 몰아내고 나라의 완전 독립을 이루기 위해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기로 하고, 1883년부터 무장 정변을 모색하며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개화당의 독자적인 계획 하에 정변을 준비하는 즈음에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郎)는 종전 개화당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인 호의를 보이면서 접근해 왔다. 이에 김옥균 등 개화당은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고 청군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측의 호의에 응하였다. 그래서 일본측으로부터 공사관 병력 150명과 일화 3백만 엔을 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개화당은 마침내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홍영식(洪英植)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사전에 준비한 폭탄으로 혼란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폭탄이 불발되자, 이웃집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킨 다음 사전에 포섭한 자객들로 사대당 요인 암살을 시도했지만 정작 민영익만 중상을 입히는 수준으로 끝났다. 

 

결국 미국에 보빙사로 함께 가기까지 했던 홍영식은 사사로운 정을 저버릴 수 없어 부상 당한 민영익을 묄렌도르프와 함께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옮긴다. 그리고 묄렌도르프는 민영익을 미국인 의료 선교사의 집에 데리고 간다. 당시 민영익은 과다 출혈로 사경을 헤메이고 있던 터라 알렌이 없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을 했다. 그는 외국인 정치 망명객 1호였지만 일본에서도 김옥균은 골칫거리였다.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오가사와라 섬과 홋카이도 등지로 유배 아닌 유배를 보내며 해결 방안을 찾고 있었다. 그런 김옥균이 상해에 가서 청나라 거물 이홍장을 만나 조선 독립과 개혁을 담판하겠다며 1894년 양력 3월 23일 김옥균은 고베 항에서 청나라 상해로 가는 배를 탔다. 

 

일본에서 친해진 조선인 홍종우도 동행했다. 홍종우는 조선의 최초로 프랑스 파리의 최초 유학자이다. 그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 서양 문물의 본질을 알기 위해 자기 힘으로 공부한 유학파였다.

 

1894년 3월 27일 상해 동화양행 호텔에 투숙한 다음 날 옆방에 있던 홍종우가 '자치통감'을 읽고 있던 김옥균에게 권총을 쐈다. 세 발을 맞은 김옥균은 즉사했다. 프랑스 유학파인 홍종우는 일찌감치 병조판서 민영소가 밀정 이일직을 통해 포섭한 자객이었다. 수구 근왕파인 홍종우는 2년여 김옥균과 친분을 쌓은 끝에 ‘역적 처단’에 성공하였다.

 

김옥균이 처단됐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졌다. 1894년 4월 12일 홍종우는 김옥균 시신을 중국식 관에 넣고 '大逆不道玉均(대역부도옥균)'이라 적은 천을 덮은 뒤 청나라 군함을 타고 인천에 도착했다. 홍종우는 관과 함께 배를 갈아타고 다음 날 양화진에 도착했다. 4월 14일 검시관을 보내 김옥균임을 확인한 조정에서는 전ㆍ현직 대신들이 연명해서 고종에게 이렇게 상소했다.(고종실록)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규홍(金奎弘)의 장계(狀啓)를 등보(謄報)한 것을 보니, ‘중국(中國) 병선(兵船)이 월미도(月尾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역적 김옥균(金玉均)의 시체를 싣고 왔으므로 즉시 한양(漢陽) 배에 옮겨 싣고 이어서 경강(京江)으로 출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시체를 검사하는 것은 원래 일의 체모가 그러한 만큼 경조(京兆)와 형조(刑曹)에서 형전에 따라 당일로 거행하게 하고 검험(檢驗)한 사정을 부(府)에 보고하도록 품처(稟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천하 고금에 없는 흉악한 역적으로서 누군들 그 사지를 찢고 살점을 씹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외국에서 목숨을 부지하여 천벌을 받지 않았으므로 여론이 갈수록 들끓었는데 이제 귀신과 사람의 격분이 조금 풀리게 되었습니다. 김옥균이 비록 죽었지만 소급해서라도 목을 잘라 두루 돌리고 법을 밝힐 수 있게 되었나이다.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에서 역적 신치운이 능지처사를 당했듯 김옥균에게도 능지처사형을 내려달라고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렸다. 고종은 “간절한 경들 청은 피를 뿌리고 눈물을 머금고 징계하고 성토하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다. 귀신과 사람이 공분하고 여론이 더욱 격화되어 그만둘 수가 없다. 윤허한다.”라고 했다(1894년 음력 3월 9일 '고종실록').

 

이렇게 하여 김옥균은 살해당한 후 시신을 능지처참(陵遲處斬, 즉 대역죄를 지은 죄인을 머리, 몸뚱이, 팔, 다리를 토막 쳐서 죽이는 극형을 이르던 말)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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