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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좌우익 갈등과 이승만 대통령의 좌익 전쟁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 8. 15) (리폼드뉴스) 1945년 8월 15일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을 받았다. 해방(解放; 풀어 높다)이라는 의미는 “구속이나 속박을 풀어 자유롭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하여 하나님이 죄에 얽매여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해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아 그들에게 억압을 받은 상태에서 그 속박으로부터 풀어 자유롭게 된 날이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지만, 한반도는 독립국가로서 자치권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혼란이 있었다. 해방 전에 일본은 우리의 적이었으며, 일본의 적은 우리 편이기도 했다. 미국이 일본의 적이었으므로 미국은 우리 편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해방 후 사회주의를 표방한 좌익 공산주의는 미국을 적으로 삼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좌익인 공산주의자들은 1945년 9월 8일에 남한에 진입한 미국의 하지 장군의 군정 때문에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미국이 적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 하지 중장이 지휘하던 제24 군단은 1945년 11월로 예정된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하여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 장군을 해방 후 38도 이남 남한지역 미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본이 항복할 당시 그 부대가 가장 빨리 한국으로 이동해 올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양 지역 미군 총사령관 더글라서 맥아더 장군은 1945년 8월 27일에 하지 장군을 주한 미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45년 8월 29일 하지는 맥아더로부터 소련군이 미군보다 먼저 서울지역을 점령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 대해 통보를 받았다. 9월 1일부터 수일 동안 미군 비행기들은 서울과 인천지역에 수십만 장의 전단을 공중에 살포하여 “한국인들의 분별없고 경솔한 행동은 다만 불필요한 인명의 손실과 아름다운 한국 땅의 황폐화와 재건 기간을 연장시키는 사태만을 초래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1875-1965)은 맥아더(1880-1964) 장군의 주선으로 임정 요인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한국을 떠난 지 33년 만에 도쿄(東京)에서 맥아더의 전용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돌아왔다. 서울 도착 이튿날 오전 10시 중앙청 광장에 5만 명을 헤아리는 환영 군중이 몰렸다. 하지 장군은 이승만에 대해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일생을 바쳐온 ‘위대한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이에 이승만은 답사를 통해 38도선과 소련을 맹렬히 비난한 후, 한국민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했다. 이때 그 유명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구호가 회자되였다. 이승만은 이미 1945년 12월 17일에 방송 연설을 통해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모국이라고 부르면서 한반도를 소련의 일부로 만들려고 한다.”라고 하면서 “우리가 이 문제를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돌로 쪼개져 내전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1950년 6·25 전쟁으로 그대로 적중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 취임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남한 단독으로 실시되었다. 198명의 제헌의원을 선출했다. 제헌국회는 5월 31일에 소집되어 188표를 얻은 이승만을 초대 국회의장으로 뽑혔다. 북한에서 선출될 대의원을 위하여 의석 100석을 공석으로 남겨 두었다. 해방이 된지 5개월째가 되던 1946년의 새해가 밝았다. 1월 14일에 경북궁에서 태극기 게양식이 거행되었다. 1945년 9월 8일에 미군의 진주 이후 관공서에 태극기 게양을 금지했던 규정을 풀고 이날 해방 후 처음으로 애국가가 울러퍼진 가운데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1946년 해방 후 처음으로 맞게 된 제27주년 삼일절 기념식은 해방된 조국에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그러나 좌우가 각각 남산과 보신각에서 별도로 기념식을 개최했다. 38선 이북에서도 삼일절 기념 행사가 있었다. 그러나 항일 운동에 가장 큰 민족적 성과를 기념하는 날 삼일절 기념식은 김일성에 대한 찬양으로 시종일관 진행되었다. 반탁을 주장한 조만식을 제거한 북한은 이미 김일성 체제를 굳혀놓고 있었다. 1946년 5월 15일 미군정은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 공산당이 당비를 조달하는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만들어 시중에 유통 시켰다며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에 관련자 공판이 있던 날 좌익 진영에서는 미군정에 조작극이라고 항의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일으켰다. 미군정은 강경하게 대했고 이날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중 한 명이 사망했고 50여 명이 검거되었다. 미군정은 이를 계기로 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반면 공산당 활동을 전면 불법화 시켰다. 당시 경찰 집계에 의하면 이 무렵 약 1년 동안 경찰에 검거된 좌익이 12만 명 사상자가 750명에 달했다. 이때부터 좌익은 지하 활동으로 전환했다. 얼마 후 박헌영은 월북했다. 1946년 이전에 남한 인구는 19,369,000명이었다. 해방 1년 만에 200여 만 명이 증가했다. 1946년 8월 15일에는 첫 해방 기념일이 있었다. 좌우익은 기념일마저 별도로 진행되었다. 미군정의 탄압에 직면한 좌익은 9월을 기해 총 파업에 들어갔다. 10월 1일에는 대구 폭동이 일어났다. 공산당의 불법 투쟁 노선에 의해 시작된 폭동은 식량 배급 문제와 맞물려 순식간에 경상도와 전라도 일원으로 확산 되었고 이 사건으로 200여 명의 경찰, 천여 명의 관리와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내세워 미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김구와 여운형은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자신들의 통합의지만으로는 역부족임을 느꼈다. 좌우의 갈등은 신탁통치 문제로 더욱 심해졌고 그 여파는 남한 사회의 전체에 파급되었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영역에서 그 갈등은 대립으로 어수선했고 불안한 사회는 해방의 기쁨과 희망을 빼앗아 갔다. 1947년 3월 1일 제28회 삼일절 기념식이 열렸는데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좌익은 남산에서 각기 따로 가졌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이제 좌우익의 갈등은 언제 폭발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 연령 측이 신탁통치 문제로 소용돌이 쳤다. 양 측이 시가행진에 들어갔으며, 결국 남대문에서 충돌하였다. 서로를 불신하고 증오감으로 서로 맞서서 갈등하고 있을 때 최초로 좌와 우, 남과 북이 함께 부르는 노래가 등장했다. 그것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안석규 작사, 안명원 작곡)이라는 노래였다. 1947년 4월 21일에 이승만이 도미외교 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1946년 연말에 미국으로 출국하여 외교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미 국정 사령관 하지의 중도세력 육성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돌아왔다. 4월 29일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의 환영대회가 8만여 명의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그는 “총선을 통해 남북통일을 위한 남한 과도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좌우 합작을 추진하던 몽양 여운형이 유력한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15분 여운형은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 청년에 의해 피살되었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좌우 합작 동력은 힘을 잃었고, 중도 노선은 설 자리를 잃었다. 1947년 8월 15일은 해방 2주년 기념일이 있었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은 100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다. 우익계 인사들만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1948년 5월 10일에 유엔의 감시단에 의해 남한만의 총선이 실시되었고 그 이후 7월 20일 국회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형이 당선되었다. 7월 24일에 대통령, 부통령에 취임하였다. 해방된 지 만 3년만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이승만은 “오늘 거행하는 이 식은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족이 새로 탄생하는 것을 겸하여 축하하는 날입니다. 이 날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 40여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 온 결실이 표현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최초로 대통령 국군 사열식을 거행했다. 만 3년의 미군정 시대는 막을 내렸다. 1948년 7월 24일 북한에서는 태국기가 내려지고 인공기가 게양되었다. 인공기로 전면 교체하기 시작했다. 남과 북을 이어주던 태국기는 그 후 북한 땅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래전에 통치체계를 갖춘 김일성은 자신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는 선언만은 남한 정부 수립 뒤로 미루어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를 선언했다. 정부 수립의 기쁨이 채 끝나기도 전인 10월 20일부터 27일까지 여수 순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여순반란 사건이라 한다. 제주도의 4ㆍ3 사건 이후 한라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있는 남로당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 예정이었던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 중이었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반란군은 여수를 점령한 뒤 순천으로 이동했으며 이후 전라남도 일대를 점령했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한 뒤, 5개 연대를 투입해 여순 지역 탈환에 성공했다. 진압 과정 중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당했으며, 1714명의 반군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그 중에 866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1949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을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1949년 5월 20일에 국회프락치 사건이 검찰에 의해 발표되었다. 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소장파 의원 13명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고 있다는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소장파 의원이 중심이 된 반민특위는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급기야 6월 6일 반민특위가 경찰에 의해 무력으로 강제 해산되어 친일파 문제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49년 6월 26일 12시 50분 경 백범 김구가 안두희라는 포병 소위에 의해 피살되었다. 안두희는 김구가 이끌고 있는 대동청년단 소속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장례는 최초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6월 29일 미군은 철수를 모두 끝냈다. 미군은 떠나면서 500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겨 두었다. 미군 철수로 파장을 최소화 하기 위한 조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되었지만 독립국가로서는 멀고도 먼 여정이었다. 좌우 대립은 독립국가로서 미래가 암담했다. 좌익의 출현은 민주주의 체제를 파괴하고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이미 북한에서는 이러한 국가 수립이 소련의 군정으로 착실이 준비되어 왔었다. 그러나 남한은 미국이 있었고 이승만이 있었다. 결국 제헌국회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였으며, 대한민국이 독립국가로서 독립정부가 들어섰다.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을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았다. 그때가 바로 1949년 12월 12일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해방후 좌우익의 갈등 양산이 재현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함을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 누가 이 나라를 지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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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아침에 한국교회 선교역사를 묵상하다고요한 아침의 나라인 조선에 많은 선교사가 거쳐 갔다. 한국 개신교는 1884년 알렌 이전에 많은 선교사들이 거쳐 지나갔다. 심지어 토마스 선교사와 같이 순교하는 선교사도 있었다. 특히 알렌과 언더우드 이전에 이미 중국에 파송한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한국인과 함께 선교를 시작했다. 선교뿐만 아니라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기도 했다. 한국 개신교의 선교 출발을 왜 1884년 9월 20일에 입국한 알렌과,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한 언두우더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는가? 그 이전에 순수한 한국인이 전도를 받고 시작한 선교를 출발로 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 선교부가 한국을 선교 대상으로 하여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날을 한국 개신교 선교의 출발로 삼는 것은 순전히 그들의 선교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교 열매로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미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신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한국에 로스 선교사의 선교 열매로 복음이 전해졌고 세례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한국선교의 시발점을 북장로회 선교사인 알렌과 언더우드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한 것은 그들의 선교 실적과 열매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역사 기록을 그대로 답습한 한국장로교회는 선교의 출발을 1884년 9월 20일 알렌으로 입국으로 삼는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한국에 상주하는 선교사가 아니었기에 이들 중심으로 한국선교의 시발점으로 기록하지 않고 오직 미국북장로회(PCUSA) 상주하는 선교사의 입국으로부터 한국교회 출발로 삼아 역사 기록은 그들 중심의 선교 역사였을 뿐이다. 미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중국에 파송되었으나 파송지를 조선으로 옮긴 의료선교사인 알렌(Horace N. Allen)이 상주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이름을 올렸다. 1884년 9월 20일에 가족을 중국에 두고 먼저 알렌이 홀로 한국에 입국하였다. 이듬해 4월 5일 오후 3시경에 같은 선교부 소속 원두우(Horace G. Underwood) 선교사가 입국했다. 이어서 1885년 6월 21일 의료선교사인 헤론(J. W. Heron)은 그의 아내와 함께 입국했다. 의사인 알렌은 광혜원을 세워 의료를 통해 복음을 증거하는 사역을 시작했다. 1883년 3월 호톤(Lllias Horton, 후에 원두우 아내가 됨)이 입국했고 1888년 12월에 기일(J. S. Gale), 1890년 1월 25일 마포삼열(S. A. Moffett)이 각각 입국했다. 언더우드는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에 있는 개혁신학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기일은 토론토대학, 마포삼열은 시카고의 맥코믹신학교 출신으로 건전한 신학을 공부한 선교사들이었다. 1890년까지 안수 받은 목사는 3명(언더우드, 기일, 마포삼열)이 한국에 입국하여 상주하는 선교사가 되었다. 한국에서 32년 동안 선교 사역을 위해 활동했던 언더우는 인도선교를 꿈꾸고 있다가 선교지를 조선으로 바꾸었다. 그는 뉴브런즈윅 시에 있는 네덜란드 장로회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여 1884년까지 신학과 함께 별도로 의학을 공부했다. 그가 신학과 의학을 공부하였다. 언더우 선교사는 이미 결혼하기로 한 약혼녀와 파혼했다. 그 이유에 대해 전해진 이야기가 있다. “조선이란 나라는 어디 있나요?”, “인도 북쪽의 아시아 대륙 끝에 있다고 하오.”, “그 나라의 주식(主食)은 무엇인가요?”, “모르오.”, “병원은 있나요?”, “그것도 모르오.”, “그럼 당신이 조선에 대해 아는 건 뭔가요?”,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그곳에 주님을 모르는 1,000만의 민중이 살고 있다는 것뿐이오.” 언더우드는 약혼녀에게 파혼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조선에 대한 선교 열정은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모교의 관할 신학교인 네덜란드 장로교회를 찾아가 조선 선교 후원을 요청하였지만 조선은 위험지역이라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 그는이에 굴복하지 않고 북미 장로교회(Northen Presbyterian Church)의 선교 본부에 조선 선교사로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아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 3시 경에 입국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 수많은 한국선교에 참여했던 거룩한 복음의 증거자들을 외면하면 안 된다. 이제 그들 중심의 한국교회 선교의 시발점으로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 한국 천주교회는 상주하는 신부 선교사의 입국으로 역사의 출발을 삼지 않고 그들 신자가 중국에서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에게 영세를 받는 날을 역사의 출발로 삼는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는 한국인의 최초 세례와 선교를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오직 상주하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의 입국을 선교 출발로 삼는 것은 다분히 한국선교의 열매를 그들 중심의 선교 역사로 그림을 그려 왔다. 언더우드 선교사 부활주일에 최초로 입국하여 복음이 유입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전해졌고, 순교와 성경이 전해졌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무명의 신자들의 헌신적인 복음전래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성장을 이룩하는 뿌리였다. 해방 이후 이 땅에 다시 찾은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한국 장로회, 즉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자신들과 같은 친 WCC 총회를 만들기 위해 분열을 획책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세대 선교사들은 순수한 복음의 열정으로 이 땅을 거쳐 갔지만 2세대 선교사들은 이 땅에 그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분열을 가져왔다. 이제 한국교회는 그들 중심의 교회 역사가 아닌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해야 하는 그런 시대를 맞이했다. 이 부활주일 아침에 이제 다시 초기 선교사들의 순수했던 그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소재열 목사 / 김포기독자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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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아침에] 육체 부활부활은 영의 부활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었다. 그의 부활의 가장 큰 특징은 육체의 부활이었고, 제자들은 이미 보고 만져 보았던 적이 있다. 주님은 부활 시에 더 나은 몸으로 나타나셨는데,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셨고 다시는 죽지 않는 몸으로 거듭나신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사람의 특징은 육체성에 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사람으로 계신다는 것은 그의 육체의 부활을 뒷받침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예표이다. 고린도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인정하면서도 죽은 성도들이 육체로 다시 산다는 것은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도 사람이었으므로 사람이 다시 몸으로 사는 법이 없다면 그도 다시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한다면 우리들의 몸의 부활도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부활의 첫 열매이다. 이제 곧 그를 뒤이어 성도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살전 4:16).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의 부활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그의 부활의 양식과 특징을 보면 우리의 부활이 어떠할지를 정확히 알게 하는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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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마 28:1-17의 기록 마 28:1-17에 보면 안식일 즉 토요일이 지난 후 안식 후 첫날 즉 현대의 일요일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3시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라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다. 3일이 지난 일요일 새벽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보기 위해 갔다. 그런데 그 무덤에는 큰 지진이 나고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다. 그 천사들의 모습을 보고 무덤을 지키던 자들이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 그때 나타난 천사가 여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5-7)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여자들을 만나주셨다.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하셨다.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몇 사람이 성에 들어가 모든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린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제자들이 밤에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을 하여 갔다고 퍼뜨리게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말씀하신대로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른다. 그러자 그곳에서 예수님을 뵙고 경배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한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주님의 부활의 날=예배일 이 기록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일요일 새벽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교회는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지켜 예배하였다. 즉 안식일의 예배가 일요일(주님의 날)의 예배로 바뀐 것이다. 행 20:7절에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라고 한다. 즉 한 주일을 시작하는 첫날인 일요일에 교회가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 날이 일요일이고, 주님의 부활의 날이다. 이 날을 예배일로 지켰다. 부활의 증인들-여인들 또한 주님의 부활에서 증인들이 여럿이 등장한다. 일요일 새벽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그 증인들이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마 28: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막 16:1-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눅 23:55-24:10)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요 20:1) 어떤 이들은 성경과 성경의 저자들이 여인을 비하하고 남녀차별을 하여 여인들을 증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다고 우겨댄다. 그러나 성경과 성경 저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여인들을 가장 먼저 언급한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한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부활의 증인들-제자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을 열거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1-8) 여기에 보면 부활의 증인이 게바 즉 베드로, 12명의 제자들, 500여 제자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그 후에 모든 사도들 즉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 사도 바울이 증인이다. 모세5경에 의하면 법정에서 어떤 사실에 대해 필요한 증인의 수는 한 명으로는 안되고 두세 명으로 정하고 있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신 19:15) 예수님의 증인의 명단을 보면 이 법을 충분히 만족하고도 남는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신조 제7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 제7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인류의 죄와 부패한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고자하사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그의 영원하신 독생자 주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으니, 그로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이루었고 또 그로만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 영원한 아들이 참사람이 되사 그 후로 한 위에 특수한 두 성품이 있어 영원토록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라.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하사 동정녀(童貞女) 마리아에게 났으되 오직 죄는 없는 자시라.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복종하시고 몸을 드려 참되고 온전한 제물이 되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십자가(十字架)에 못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사 하나님 우편에 승좌하시고 그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시다가 저리로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세상을 심판하려 재림하신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즉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 조항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신앙 조항으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52조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52조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에서 어떻게 높아지셨는가?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에서 높아지심은 그가 사망에게 매여있을 수 없어 사망중에 썩음을 보지 않으시고 고난 받으신 몸이 본질적 특성들을 가졌으나 사망성과 기타 현세에 속하는 공통적 연약성이 없이 바로 그 같은 몸이 그의 영혼과 실지로 연합되어 자기 자신의 권능으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사망과 사망의 권세 잡은 자를 정복하심으로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심을 친히 선포하셨다. 그가 공적 인물로서, 자기 교회의 머리로서 하신 모든 것은 그들을 칭의하시고 은혜로 살리시고 원수들에 대항하여 지원하시어 마지막날에 그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신 것이었다.(행 2:24, 시 16:10, 눅 24:39, 골 1:18, 요 10:18, 롬 1:4, 4:25, 히 2:14, 롬 14:9, 고전 15:21∼22, 엡 1:22∼23, 롬 4:25, 엡 2:56, 고전 15:25∼26, 고전 15:20, 살전 4:13∼18).”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되셨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실제로 그분의 영혼과 육체가 연합되어 3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확실히 선언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8장 4조 개혁파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8장 4조에 보면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언급한다. “주 예수는 그 직분을 가장 기꺼이 떠맡으시고(21) 이것을 수행하기 위하여 율법 아래 나시고(22), 율법을 완전히 수행하셨다(23). 그 영혼에 극심한 괴로움을 직접적으로 참으시고(24), 그의 신체에 가장 아픈 고난을 견디시고(25),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26), 장사되어 사망의 권세 아래 머물러 계셨으나 썩음을 보지 않으셨다(27), 삼일 만에 그는 고난을 받으신 그 동일한 몸으로(28),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29), 또 그 몸을 가지고 하늘에 오르사그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셔서(30), 간구하시는데(31), 세상 끝에 사람들과 천사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32). (21) 사 40:7, 8, 빌 2:5∼8 (22) 갈 4:4 (23) 마 3:15, 요 17:4 (24) 마 26:37, 38, 눅 22:44, 마 27:46 (25)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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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허탄한 듯 보이는 부활기독교는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던마크 철학자 키엘케고르는 기독교 신앙을 역설로 가득차 있는데 그 역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요, 그 역설 때문에 거리껴 넘어지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파라독스”라고 하는 이 역설이라는 말은 표면상 논리적인 모순인 것 같은데 사실은 아주 높은 차원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이런 역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낮은 자가 높아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자가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같은 것들은 꼭 정반대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같은 이야기의 이면에는 더 깊은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설적인 진리를 우리는 믿는다. 주후 2-3세기에 살았던 로마의 법률가요, 평신도 신학자였던 터툴리안은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모순되기 때문에 믿는다”, 즉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논리적이면 오히려 믿을 가치가 별로 없지만, 그것이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믿을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것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이것은 엄연한 진리입니다. 이같은 부활의 복음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는 부활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부활을 허탄한 이야기로 믿지 않는 사도들 오늘 읽은 누가복음 24장에는 부활 사건을 역설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가보니 무덤은 비어있고 천사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여자들이 처음에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나중에 제자들에게 가서 보고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이 24:11절에 기록된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그 여자들이 말하는 것이 허탄하게 들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허탄하다”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서 여기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무의미하다, 난센스다’, 혹은 ‘쓸데없는 소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 시대에서는 의학 용어로 어떤 사람이 열병에 걸려 병이 너무 심해서 중얼중얼 헛소리 하는 것을 이 ‘허탄’이라는 말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소리를 제자들은 마치 열병 걸린 사람이 제정신을 잃고 헛소리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결코 허탄한 이야기가 아니다 ① 제자들이 여자들의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리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직접 보았고 그 무덤밖에 큰 돌을 갖다 놓고 심지어 거기에 봉인하는 것을 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무시하고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의 기준을 자신들이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한 번도 경험해 본 일이 없으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② 이 ‘허탄하다’는 말은 “난센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무의미한 말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빈 무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렸다.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은 헛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그 헛소리가 나중에 가장 말이 되는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의미의 근원으로 나타났다. 예수님의 부활을 허탄하다고 말하는 그 소리가 허탄한 말이었습니다. 부활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큰 의미를 제공해 준 우리 삶의 모든 의미의 바탕이 되는 의미입니다. ③ 허탄하다는 말은 “쓸데없는 소리,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소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에게 무엇이 쓸데 있는가 또는 없는가의 표준을 정해 놓고 그 표준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쓸데없는 소리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사실로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쓸 데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무 소용없는 것 같이 들렸을지 모르지만 사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고전 15:14절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요,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입니다. 3. 사도들은 왜 허탄한 행동을 하고 있는가? 눅 24:5절에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합니다. 이들의 행동이 허탄한 짓입니다. 본문 24:6절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라고 했습니다. 7절에서는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은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허탄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허탄한 짓을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는 그 사실 자체를 허탄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부활을 믿지 못했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생각의 기준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때 출세하려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천군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를 다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려는데 한몫 참여해야겠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경험과 자기들의 생각으로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얼마나 허탄한 생각인가? 자기 나름대로 생각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은 어리석음을 범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자꾸 잊어버리니까 기억하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세상적으로 너무나 똑똑해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허탄한 이야기로 듣는 허탄한 사람이 되면 안 되겠다. 세상의 똑똑함이 오히려 나에게 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허탄한 사건으로 돌림으로 인생의 참된 삶을 살지 못한 자들이 되면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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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은 이념 전쟁 중|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 “윤석열의 불장난과 한국의 자살” |서민 단국대 교수, “대통령 외교를 번번이 ‘참사’로 만드는 저들의 흉계” "좌파, 우파"로 인한 이념 논쟁이 한창이다. <뉴스와 종교>에서 엄무환 국장은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진 보수정권을 단숨에 무너뜨리고 청와대를 장악한 문재인 대통령은 5년 재임기간 동안 진보좌파들에게 날개를 달고 훨훨 나는 세상을 만들었으며, 북한과 춤을 추는 세상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익히 아는 바다. 오즉하면 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까지 했을까."라고 지적한다. 계속해서 "이때 진보좌파들은 국회와 언론, 교육계를 장악하고 각 지자체까지 손안에 넣은 다음 국민들의 뇌에 저들이 신봉하는 진보 좌파이념으로 세뇌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가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도에 고스란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윤 대통령이 정책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엔 관심이 없다. 무조건 싫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윤석열 정부가 진보좌파 진영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정책수행에 애를 먹고 있는 것도 사사건건 태클을 걸기 때문이다. 현재 진보좌파들은 윤석열 정부 흔들기에 총력을 기울인 모양새다."라며 "이번 윤 대통령의 한일정상회담에 대한 여야의 반응은 물론 지식인들의 칼럼에서도 이념전쟁을 실감하게 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두 인사의 칼럼을 통해 이념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출처: 대한민국은 현재 치열한 이념전쟁 진행 중 …진보좌파들, '윤석열 정부 흔들기 총력전'-뉴스와종교 - http://www.newsnr.net/1436) ◆ 이병천 강원대 교수, “윤석열의 불장난과 한국의 자살” 3월 20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된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의 칼럼과 자유일보에 게재된 서민 단국대 교수의 칼럼이 이를 대변한다. 이 교수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윤석열의 불장난과 한국의 자살”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윤석열 정부가 위험한 불장난을 하고 있다. 과거사를 지우고 미래를 죽이고 나라를 죽이는 무책임하고 위험한 권력의 타락으로 우리들의 나라, 모두를 위한 나라의 길은 간데없고 인권과 평화, 민생과 민주 모두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느 나라 대통령인가? 다른 나라 대통령 아닌가?”(중략) “윤석열 정부는 과거사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그런데 그 미래란 어떤 것일까? 지금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적 진영구도가 조성되면서 미·중 간, 남북 간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미·일 동맹을 주축으로 삼고(이른바 ‘미·일 일체화’) 한국을 ‘봉’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미국이 제3자 변제안에 크게 박수치는 이유다. 이 괴물 패권국은 ‘반도체 깡패’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이 교수는 칼럼에서 미국을 괴물 패권국이라고 썼다. 이른바 진보좌파들이 외치는 반미 사상이다. 그리고 경향신문은 이를 여과없이 그대로 보도했다. 이 교수는 계속해서 “지혜로운 균형자 감각과 유연한 전략이 절실한 대전환기에 윤석열 정부가 나라를 팔아 이 신삼각동맹에 편승하려 한다”며 한미일 동맹에 비판적 칼을 휘둘렀다. 이는 북한의 주장을 옹호하는 모양새와 다르지 않다. “윤석열은 밖으로는 나라와 국민을 버리는 매국적이면서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진영정치 격랑 속으로, 안으로는 자유라는 허울 아래 불평등과 차별을 심화시키는 극우적 특권체제의 고통 속으로 한국을 밀어넣고 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양금덕 할머니의 말을 인용하여 칼럼을 마무리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이 위험한 불장난을 막아야 하지 않겠나? ‘나라를 잘 돌보고 동포가 편안히 살 수 있도록.’(양금덕)” 이처럼 양금덕 할머니나 이병천 교수는 “한반도에서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이 위험한 불장난을 막아야 하지 않겠나”라며 북한이 아닌 윤석열 대통령에게 비판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 서민 단국대 교수, “대통령 외교를 번번이 ‘참사’로 만드는 저들의 흉계” 반면에 서민 교수는 자유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대통령 외교를 번번이 ‘참사’로 만드는 저들의 흉계”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마음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죠. 일장기에 대고 경례하고, 이런 거 화가 나서 (대구에서) 올라왔어요. 윤석열 정부가 해도 해도 너무한다 생각하고’ 소위 굴욕외교 규탄대회가 열린 서울시청 광장에 나온 여성이 MBC와 한 인터뷰다. 규탄 집회엔 사법리스크로 바쁜 제1야당 대표도 빠지지 않았다. ‘국민을 거역하고 역사를 저버린 이 무도한 정권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습니다. 함께 싸워야겠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외교참사를 저질렀다는 게 저들의 말이다. 신기한 점은 윤 대통령이 취임 후 가진 다섯 번의 해외순방에서 모두 외교참사 논란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 교수는 윤 대통령의 첫 해외순방인 나토 정상회의와 두 번째 순방에서 사망한 영국 여왕에 대한 조문 예절과 UN총회 직후 사석에서 했던 ‘날리면’ 발언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김건희 여사가 아이를 안고 찍은 사진, UAE를 갔을 때 ‘이란은 UAE의 적’이란 대통령 발언등이 외교참사의 근거였다“고 적시했다. 이어 “순방 때마다 모두 외교참사 논란을 일으킨 대통령이라니, 이쯤 되면 그 원인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며 세 가지를 분석했다. 첫째, 외교는 원래 오페라 무대에 오르는 행위다. 오페라는 어두운 객석에 앉은 관객이 환한 조명이 비추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보는 행위. 배우는 관객을 볼 수 없지만, 관객은 배우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다. 대통령의 모든 말과 행동이 보도되는 외교는 일종의 오페라무대다. 그런데 관객들이 뭐라도 꼬투리를 잡아 배우를 까려고 마음먹는다면? 공연 때마다 참사논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둘째, 좌파는 태생적으로 남 까는 데 도가 튼 분들이다. 식사 준비할 때는 탱자탱자 놀다가, 밥을 먹을 때면 ‘간이 덜 됐다’느니 ‘비주얼이 안좋다’느니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이들이 바로 좌파다. 평생을 이렇게 살다보니 이젠 미슐랭 가이드 3스타를 받은 음식도 ‘음식참사’로 만들 정도의 능력을 갖게 됐다. 심지어 자기 머리카락을 집어넣는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이들이 5년만에 정권을 잃었으니, 윤 정부가 하는 모든 일을 까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셋째, 언론지형이 좌측으로 기울어져 있다. KBS·MBC 등 문재인 정권 때 좌파에게 장악당한 공영방송은 정권이 바뀐 뒤 좌파 유튜버로 업종을 바꾼 느낌이다. 청담동 술자리 같은 가짜뉴스가 한 달 넘게 나라를 뒤흔들 수 있었던 데는 이를 확대 재생산해준 언론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이번 한일정상회담에서도 이들의 활약은 눈이 부셨다. KBS 남성앵커: 일장기를 향해서 윤 대통령이 경례하는 모습을 방금 보셨다. 단상에 태극기가 설치되어 있는데 의장대가 우리 국기를 들고 있을 것 같지는 않고요. 여성앵커: 예, 그렇습니다. 서 교수는 “참사를 만드는 게 주목적이다 보니 언론사들은 정부를 까는 이가 있다면 무조건 부르고 본다. 전 정부에서 의전을 담당한 탁현민은 윤 대통령 외교순방 때마다 가장 바쁜 사람이 된다. 그러다보니 문재인 전 대통령의 혼밥은 ‘현지 국민과 유대감 강조를 위한 프로그램’이 되고, 중국 경호원에 의해 저질러진 기자폭행은 ‘우리 기자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로 치부되지만, 윤 대통령의 인사는 ‘굴종외교’가 된다. 이밖에도 민주주의가 지나치게 발달해 그 어떤 가짜뉴스를 퍼뜨려도 처벌하기 힘든 나라가 된 것도 외교참사의 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서 교수는 “다음달로 예정된 미국 국빈방문이 벌써부터 걱정된다. 저들이 또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라는 우려를 나타내는 말로 칼럼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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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선교사 입국과 조선의 개항통상수교 거부정책인 쇄국 정책을 폈던 조선은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강제로 개항하게 되었다. 흔히 강화도 조약이라 불리는 이 조약에서 일본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라고 요구했다. 1876년 10월 부산항이 가장 먼저 개항하였다. 1876년(고종 13)에 부산포란 이름으로 개항되었으며, 1898년 매립공사로부터 1906년 부두 축조공사를 함으로써 항구의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개항 당시 부산항은 지금의 부산항과는 차이가 있다. 개항장으로 제공된 곳은 용두산 주변으로 지금의 동강동과 광복동에 해당한다. 지하철 남포역 주변이다. 이곳에는 왜관이 있었다. 왜관이란 조선과 일본의 교섭 창구이자 중개 무역의 전진기지였다. 따라서 왜관 주변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잦은 접촉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일본사람들이 조금씩 드나들게 되었고 왜관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식으로 개항이 되자 일본사람들이 그야말로 물밀듯이 들어 왔다. 일본인의 거류지는 넓어졌고 일본식 가옥들이 들어섰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이 개통되었다. 개통 당시 종점은 초량역이었다. 1901년 9월 21일에 부산 초량에서 일본 자본의 회사인 경부철도 주식회사에 의해 기공되어 4년 후인 1904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 1905년 1월 1일을 기하여 전선(全線)의 영업이 개시되었다. 그해 5월 25일에 서울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 광장에서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경부선은 일제의 우리나라 침략 정책 수행의 구체적 발판이었다. 부산역은 3년 뒤인 1908년에 문을 열었다. 경부선이 개통되자 같은 해 1905년 9월 11일에는 부산과 일본을 정기적으로 오가는 여객선 이키 마루가 취항했다. 이키 마루처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를 연결하는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이라 했다. 부관은 두 도시의 이름의 앞 자로 지은 이름이다. 연락선이 닿는 곳에는 기차역이 있어서 곧바로 대륙까지 연결되었다. 부산에서는 경부선을 통해 서울로, 다시 경의선을 통해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연결되었다. 일본은 대륙으로 진출하는 발판으로써 부산을 집중하여 개발했고 그렇게 성장한 도사를 활보하고 다닌 것은 일본인이었다. 1880년 함경남도 원산이 부산에 이어 두 번째로 개항했다. 원산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에 의하여 1880(고종 17)에 강제 개항되었다. 통상적인 견지에서라기보다는 러시아와 영국의 군사력에 대비하여 일본에 의하여 개항되었다. 아시아 동쪽 끝까지 노리는 영국과 남진해 오는 러시아와 맞서기 위해 원산을 먼저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원산항은 관북의 관문의 역할을 유지했다.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에는 인천이 개항했다. 인천에 작은 포구였던 제물포가 개항장으로 정해졌다. 조선 초 제물포란 군항으로 서해의 수비를 맡던 군사 요충지였고 제물포조약에 의해 1883년에 강제로 개항되었다. 조선에서는 서울과 가까운 인천에 개항을 꺼렸지만, 일본은 바로 그 이유로 인천을 개항장으로 요구했다. 개항 후 제물포에는 일본은 물론 중국과 서구의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국적인 건물들이 개항장인 제물포의 풍경을 만들어 갔다. 외국인들이 자기들의 방식대로 건물을 지었다. 조선의 관문이 된 제물포는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호텔들도 생겼다. 1889년 문을 연 대불호텔은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다. 제물포는 외래 문물이 들어오는 창구로 계속 발전했고 일자리를 찾아 우리나라 사람들도 몰려들었다. 인천의 관가는 중심지가 된 제물포로 옮겨갔다.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1897년에는 목포가 개항했다. 당시 일본은 쌀 부족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안정적으로 쌀을 확보하기 위해 전라도 지역에도 개항장을 두고자 했다. 목포는 영산강을 통해 한반도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와 연결되었고 중국과 통하는 길목이라는 이점도 있었다. 유달산 기슭에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었고 그 주변으로 일본인 거주지역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899년 전라북도 군산, 경상남도 마산, 함경북도 성진이 동시에 개항했다. 군산 개항은 일본이 본토의 식량수급을 원활히 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디. 군산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에 쌀을 보급하는 기지로 이용되었다. 호남평야 일대에는 일본인 농장이 속속 들어섰고 군산항에는 일수탈하기 위해 군산을 개항하게 되었다. 군산항에서 외부로 나가는 물품 중 90%를 쌀이 차지할 정도였다. 마산의 개항장은 현재의 경남대학교 일대인 월영동과 신월동 일대였다. 마산을 군항으로 개발하여 러시아를 막으려는 일본이 경쟁적으로 토지를 매입했는데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일본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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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다', '모른다'로 재판 진행중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대선 시 성남시장일 당시 고(故) 김문기 성남도시개발공사 개발1처장을 ‘몰랐다’고 발언해 공직선거법 위반인 허위 사실을 공표한 혐의(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유포)로 공소 시효 만료 하루 전인 2022. 9. 8일 불구속기소 됐다. 지난 3월 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4부(부장판사 강규태)에서 첫 재판 심리가 있었다. 이 대표는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2021년 12월 22일 방송 인터뷰에서 김 전 처장에 대해 “시장 재직 때는 알지 못했다”고 말해 허위 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이 대표가 변호사 시절부터 김 전 처장과 교류한 만큼 그를 ‘몰랐다’는 주장이 허위라고 봤다. 재판에서 ‘알다’와 ‘모른다’라는 개념이 쟁점이 되고 있다. 검찰은 선거에 영향을 주는 고의적인 거짓말로 봤다. 이재명 전 대표의 이런 발언들은 모를 수 없는 정황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검찰의 주장이다. 이는 대통령 선거에 당선될 목적으로 고인에 대해서 모른다고 말했던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재명 전 대통령 후보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100만 원 이상의 형이 확정될 경우, 이 대표는 5년간 피선거권도 제한돼 차기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선거법(제265조의2)에 따라 민주당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보전받은 대선 선거 비용 약 434억 원도 후보 추천 정당이 다시 돌려줘야 한다. 300억 원 대로 추정되는 민주당의 당사를 팔아도 부족한 금액이다. 결국 이 재판은 이재명 대표의 정치 운명뿐만 아니라 민주당 전체 상황으로 번질 수 있다. 재판과정에서 ‘안다’, ‘모른다’라는 모호한 경계선에서 재판부가 이를 어떻게 판단할 것이지 주목된다. 재판 심리 과정에서 ‘안다’와 ‘모른다’라는 사전적인 의미까지 동원됐다. 이 대표 변호인은 ‘알다’라는 것은 “의식이나 감각으로 느끼고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라며, “이 대표가 김 전 처장을 ‘모른다’고 말한 것은 자신의 인지 상태를 얘기한 것일 뿐 인지 형성의 계기가 되는 경험 전부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대표가 김 전 처장과 밀접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을 뿐, 김 전 처장과 골프를 치거나 함께 사진 촬영을 한 경험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이제 재판부는 이재명 대표가 ‘모른다’라고 했던 발언의 사실관계를 적시하고 이 발언이 과연 공직선거법 위반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여 유무죄를 판결할 것이다. 알고 있었음에도 모른다고 말한 것은 진실이 아님에도 진실인 것처럼 허위 사실을 말했는지 벌써 재판부의 판결 내용들이 무슨 내용으로 채워질 것인지 연상이 된다. 이제 ‘알다’와 ‘모른다’라는 이 한마디 말에 따라 이재명 대표와 더불어민주당은 지금 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재판이 내년 총선 전에 종결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서 교훈을 얻는다. ‘말을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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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명성교회 대표자 지위 확인 최종 확정 '명성교회 승소'명성교회 위임목사인 김하나 목사의 ‘대표자지위부존재확인’ 소송에서 대법원은 ‘심리불속행 기각판결을 했다고 23일 밝혔다. 이로써 명성교회는 2021. 1. 20.에 제기된 소송이 2년 1개월만에 ’대표자 지위‘에 문제 없음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가처분 소송까지 포함하여 3년 넘게 소송이 진행됐다. 대법원 민사1부(재판장 오경미 대법관)는 원고의 “상고를 기각한다”라며 “상고 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기록과 원심판결 및 상고이유를 모두 살펴보았으나, 상고인의 상고이유에 관한 주장은 「상고심 절차에 관한 특례법」 제4조에 해당하여 이유 없음이 명백하므로 위 법 제5조에 의하여 상고를 기각하기로 하여, 관여 대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라고 심리불속행 기각 이유를 밝혔다. © 리폼드뉴스 명성교회 사건은 원고가 대법원에 지난해 2022년 11월 15일에 접수하자 2023년 1월 6일에 주심대법관 및 재판부 배당되고 1. 7.에 상고이유 등 법리검토 개시되었다. 법리검토 개시가 시작된지 1개월 16일 만에 심리불속행 기각처분이 내려졌다. 이로써 원심인 서울고등법원 판결 법리가 확정되었다. 일부 단체가 대법원에 이 사건 재판부에 탄원서(진정서) 등을 제출하고 원고는 4곳의 법률 로펌을 동원했다. 하지만 이미 <리폼드뉴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사건에 관한 원심인 고등법원의 판결은 교과적인 판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를 향한 일부 저항세력들은 법리논쟁보다 가치영역에서 여론을 몰아갔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독특한 헌법적 구조와 해석론에 근거하기 보다는 상식적인 이념적 이데올로기로 접근하여 교회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종교의 영역, 특히 장로회 헌법에 대한 몰이해가 가져다 준 저항은 명성교회를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소송중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았다는 점이 어느 교회와 다른 현상이었다. 이제 한국교회 역시 법으로 접근하는 저항세력에 대항하는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 이제 대법원에서 확정되므로 그동안 일부 언론의 편파적 보도와 시민단체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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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조선 역사의 격동기에 대한제국의 희망은 교회▲ 흥선대원군(좌), 고종(우) © 리폼드뉴스 ▲ 대한예수교장로회독(립)노회, 1907.9.17. 장대현교회, 중앙에 서경조, 이기풍, 길선주, 방기창, 노회장 마페트(마포삼열), 한석진, 송인서, 양전백; 선교사들은 검정 양복을 입었다. © 리폼드뉴스 한국 개신교의 상주하는 최초의 선교사는 알렌(1884), 언더우드 아펜젤러(1885) 선교사였다. 이들이 입국할 때 조선의 제25대 왕인 철종의 뒤를 이은 제26대 왕인 고종이었다. 제25대 왕인 철종은 일명 강화도 도령으로 이원범이었다. 역모죄로 강화도에 살고 있는 19살의 이원범을 왕으로 세웠다. 그는 대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19살의 농부 강화도령을 임금으로 지목하여 추대한 사람은 순원왕후였다. 조선 제24대 왕인 헌종운 8살 왕위에 올라 14년만인 22살인 1849년 6월 7일에 병사하였다. 헌종이 후사를 이를 아들 없이 죽은 후 왕실의 적통이 끊겼다. 안동 김씨 권력은 이런 틈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하고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이 조종할 수 있는 강화도에서 볼품없는 지게꾼으로 살고 있는 철종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왕통을 이을 후사가 없을 때 누구를 왕으로 세울 것인지는 중요했다. 다음 왕을 누구로 할 것인지 대신들 간에 관심사였다. 그것은 세력을 확장하느냐, 몰락하느냐에 대한 중대한 문제였다. 이때 최고의 결정권자인 김조순의 딸이자 제23대 왕이었던 순조의 부인이었던 순원왕후였다. 순원왕후는 언문교지를 내려 강화에 사는 이원범을 임금으로 지목하였다. 이원범은 할아버지와 큰 형(이원경)이 역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순원왕후는 순조의 5촌 조카였던 철종을 순조의 양자로 입직시킨 후 제25대 국왕으로 지명하였다. 이제 철종은 순원왕후의 아들이 되었다. 조선의 제25대 철종 왕 역시 1863년 12월 겨울 후사 없이 죽게 되자 고종이 조선 제26대 왕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아들을 왕에 오르게 한 사람이었다.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19세기 격량의 한 가운데 서 있던 왕과 왕의 아버지였다. 고종이 국왕에 즉위한 1863년 후 10년 간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하였다. 고종은 1897년 10월에 국왕을 ‘황제’로 올려 부르도록 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우리나라가 대외적으로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임을 알렸다. 이 연호는 1907년(융희1) 순종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10년 동안 썼다. 세계사의 격랑 속에서 나라를 빼앗긴 무기력한 군주, 일제에 의하 권좌에서 쫓겨난 비운의 황제였다. 결국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1919년 1월 21일에 향년 68세에 승하하였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지 10년, 당시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상황이었다. 순종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 제27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제2대 마지막 황제이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개명한 2년 후(1899년) 법규 교정소 총재(法規校正所總裁)인 황제인 고종에게 주본(奏本)을 올려 재가를 청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반드시 정치(政治)가 어떠하고, 군권(君權)이 어떠한가 하는 것으로 일정한 제도를 만들어 천하에 소상히 보인 뒤에야 신하와 백성에게 그대로 따르고 어김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은 천명을 받들어 왕업을 창시하여 왕통을 전하였으나 아직도 이러한 법을 정하여 반포하지 못한 것은 거기까지 손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폐하는 뛰어난 성인의 자질로서 중흥의 업적을 이룩하여 이미 보위에 올랐고 계속하여 국호를 개정하였으니, ‘주(周) 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그 명이 새롭다.’는 것입니다. 억만 년 끝없는 행복이 실로 여기에 기초하였으니 선왕조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일이 오늘을 기다린 듯합니다. 이것이 이 법규 교정소를 설치한 까닭입니다.”(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1899년) 8월 17일) 임금인 고종이 이에 하교하기를, “이번에 정한 제도를 천하에 반시(頒示)하라”고 하였다. 이렇게하여 1899년 7월 12일 법규교정소(法規校正所)에 조서(詔書)를 내려 국제를 초안하여 올리도록 하명하였으며 이에 법규교정소 총재 윤용선(尹容善) 이하 여러 의정관(議政官)과 위원 등이 검토, 토의한 끝에 「대한국국제」 9조를 채택하여 황제명으로 반포하게 되었다. 여기서 ‘헌법’이 아닌 ‘국제’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국회에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 황제명으로 제정, 반포되었기 때문이다.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 전문은 다음과 같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제1조 대한국(大韓國)은 세계만국에 공인된 자주 독립(自主獨立)한 제국(帝國)이다. 제2조 대한 제국(大韓帝國)의 정치는 과거 500년간 전래 되었고, 앞으로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 정치(專制政治)이다. 제3조 대한국 대황제(大皇帝)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지니고 있다. 공법에 이른 바 정체(政體)를 스스로 세우는 것이다. 제4조 대한국 신민이 대황제가 지니고 있는 군권을 침손(侵損)하는 행위가 있으면 이미 행했건 행하지 않았건 막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인정한다. 제5조 대한국 대황제는 국내의 육해군(陸海軍)을 통솔하고 편제(編制)를 정하며 계엄(戒嚴)과 해엄(解嚴)을 명한다. 제6조 대한국 대황제는 법률을 제정하여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고 만국(萬國)의 공통적인 법률을 본받아 국내의 법률도 개정하고 대사(大赦), 특사(特赦), 감형(減刑), 복권(復權)을 한다. 공법 이른바 율례를 자체로 정하는 것이다. 제7조 대한국 대황제는 행정 각부(各府)와 각부(各部)의 관제와 문무관(文武官)의 봉급을 제정 혹은 개정하며 행정상 필요한 각 항목의 칙령(勅令)을 발한다. 공법에 이른바 치리(治理)를 자체로 행하는 것이다. 제8조 대한국 대황제는 문무관의 출척(黜陟)과 임면(任免)을 행하고 작위(爵位), 훈장(勳章) 및 기타 영전(榮典)을 수여 혹은 박탈한다. 공법에 이른바 관리를 자체로 선발하는 것이다. 제9조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국에 사신을 파송주재하게 하고 선전(宣戰), 강화(講和) 및 제반 약조를 체결한다. 공법에 이른바 사신을 자체로 파견하는 것이다.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1899년) 8월 17일) 1904년에 고종의 아내 민 씨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3년 후에는 순정효황후 윤 씨와 혼인을 했다. 계속하여 일본이 조선 침략 야욕을 드러내자 고종은 일본 강압에 의한 을사조약을 맺고 말았다. 1907년 7월 20일 오전 8시 경운궁(현 덕수궁) 중화전에서 일본의 강압에 의해 고종과 순종 모두 양위식에 불참했다. 그러자 두 명을 대역을 써 행사를 진행해 버렸다. ▲ 황궁우(왼쪽) 와 환구단 ,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 © 리폼드뉴스 7월 20일 고종은 강제로 재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양위식이 끝난 후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외무차관과 일본 수상에게 덕수궁 중화전에서 양위식을 거행했다는 내용의 외교 전보를 보냈다. 총리대신 이완용이 먼저 나서서 이것은 대리청정이 아니라 양위라고 밝혔다. 그러나 백성들은 분노했다. 분노에 가득한 백성들은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러 버렸다. 실권을 가진 이완용과 송병준은 일본에 대한제국 국권을 넘겨주기 위한 일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1897년(고종 34) 8월 17일부터 썼던 대한제국의 연호인 ‘광무’를 ‘융희’로 바꿔 버렸으며 1907년 8월 27일을 즉위식 날짜로 정해 덕수궁 돈덕진에서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했고 마침내 대한제국 제2대 황제로 순종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당시 일본은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서 한반도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낸 뒤 대한제국의 후견국을 자청하면서 대한제국을 병탄하기 위해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대한제국 내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임명했으며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예비 조치를 취해 갔다. 1907년 7월 24일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인 한일신협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의 입법권, 인사권, 경찰권 등을 빼앗았다. 8월 1일에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해 버리자 이 조치에 반발하여 대한제국의 해산 군인들과 일본군 간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반일 성향의 매일신보를 포함한 여러 언론을 통제하고 탄압하였다. 모든 것을 일본에 빼앗기고 있었다.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1년 후인 1908년에는 일본의 더러운 야욕이 더 드러나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땅과 자원을 수탈하고 경제권을 침탈하기 위해 동양척식회사를 만들어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1909년 7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다음 통감으로 부임한 소네 아라스케는 행정권과 사법권을 박탈해 버렸으며 9월에는 의병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해 버렸다. 1909년 10월 26일 독립운동가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었다. 각지에서 의병 활이 일어났다. ▲ 대한국 예수교장로회 노회(독노회) 제1회 회의록 ©리폼드뉴스 조선에 상주하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한 1884년과 1885년은 천주교가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때였다. 천주교 조선 선교 100주년이 되는 해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했다. 역사의 격랑기인 1906년 기준 천주교와 개신교의 교세는 61,290명이지만, 개신교는 장로교와 감리교를 합하여서 총 89,652명이었다. 1906년 장로교의 신자 수는 56,934명이고, 감리교의 신자 수는 32,718명이다. 1907년에는 개신교의 단일 교회로서 장로교가 천주교의 신자 수를 앞질러 나갔다. 1907년 장로교의 신자 수는 72,968명인데 반해 천주교의 신자 수는 63,340명이었다. 1905년과 1907년의 2년 사이에 천주교는 730명의 신자 수만이 증가하였지만, 개신교는 50,740명의 신자가 증가하였다. 1906년 천주교의 관련 보고서에 의하면 “개신교의 선전이 격렬한 것을 보고 통탄”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영국 목사들은 자기 나라와 일본과의 동맹 관계를 자랑합니다. 미국 목사들은 일본과의 우호 관계 등 일본 통감부의 호의를 예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자기네 신도들에게 자랑을 합니다. 도처에서 목사들은 순박한 조선 사람들 앞에서, 가급적이면 천주교 신자들이 있는 곳에서 수없이 되풀이 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늘어놓습니다."라며 그 시대 천주교와 개신교가 갈등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정과 일본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조선에 최초로 독립된 노회(장로회) 조직은 일제의 강압으로 황제 고종이 아들 순종에게 양위식을 거행한 2개월 후인 1907년 9월 17일에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마포삼열 선교사를 회장으로 하여 노회가 조직되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아닌 마포삼열 선교사였다. "주강생 1907년 9월 17일 상호 9시에 평양 장대재 예배당에서 년 공의회 회장 배유진 목사가 사도행전 1:8에 우리 주 예수께서 마지막 분부하신 대로 증인이라고 강도한 후에 기일목사는 떡을 가지고 축하여 장로들로 나누며 배유진 목사는 포도즙을 가지고 축사하여 장로들로 돌려서 성찬예식을 거행하니라." "신령하고 크도다. 이 아름다운 노회여,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사도와 문도를 택정하여 세우사 천국의 복음을 천하에 전하여 만민의 영혼을 구원케 하였으니 주 예수께서 직분을 받은 사도와 문도들이 주께서 승천하실 때에 특별히 명령하심을 삼가 지켜 예루살렘 다락에 일제히 모여 마음을 같이 하고 기도를 힘써 하나님의 허락하신 성신의 권능을 충만히 받은 후에 능히 각국 방언을 말하고 모든 이적을 베풀며 천하 각국에 헤어져 복음을 전할세 회개하고 주를 따르는 자에게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문도를 삼으며 믿는 형제중에 사람을 택하여 장로와 목사를 세워 교회를 치리케 하였으니 옛적에 안디옥에서 총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과 바나바와 믿는 두어 형제가 예루살렘 본 교회에 여러 목사와 장로들과 한가지로 모여 교회에 마땅히 지킬 규모를 의논하여 작정하였으니 이것이 실로 노회의 시작이라. 만유의 주재 되는 하나님 아버지의 깊으신 사랑과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넓으신 은혜와 보혜사 성신의 크신 권능을 할렐루야 찬송하리로다." 역사의 격동기에 복음이 들어와 교회를 설립했다. 역사의 격동기에 고종은 대한제국에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했다면 대한국예수교장로회는 교회법을 제정했다. 교회가 세워지고 노회와 총회인 교단이 설립되었다. 그 시대에 이 민족에게희망이있다면 복음이었고 교회였다. 철저히 복음을 증거했다. 그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성경을 배우고 가르쳤다. 오늘날도 이 민족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과 교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