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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좌우익 갈등과 이승만 대통령의 좌익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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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논단

해방 후 좌우익 갈등과 이승만 대통령의 좌익 전쟁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 8. 15) 


(리폼드뉴스) 1945년 8월 15일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을 받았다. 해방(解放; 풀어 높다)이라는 의미는 “구속이나 속박을 풀어 자유롭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하여 하나님이 죄에 얽매여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해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아 그들에게 억압을 받은 상태에서 그 속박으로부터 풀어 자유롭게 된 날이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지만, 한반도는 독립국가로서 자치권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혼란이 있었다. 

 

해방 전에 일본은 우리의 적이었으며, 일본의 적은 우리 편이기도 했다. 미국이 일본의 적이었으므로 미국은 우리 편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해방 후 사회주의를 표방한 좌익 공산주의는 미국을 적으로 삼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좌익인 공산주의자들은 1945년 9월 8일에 남한에 진입한 미국의 하지 장군의 군정 때문에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미국이 적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 하지 중장이 지휘하던 제24 군단은 1945년 11월로 예정된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하여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 장군을 해방 후 38도 이남 남한지역 미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본이 항복할 당시 그 부대가 가장 빨리 한국으로 이동해 올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양 지역 미군 총사령관 더글라서 맥아더 장군은 1945년 8월 27일에 하지 장군을 주한 미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45년 8월 29일 하지는 맥아더로부터 소련군이 미군보다 먼저 서울지역을 점령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 대해 통보를 받았다. 9월 1일부터 수일 동안 미군 비행기들은 서울과 인천지역에 수십만 장의 전단을 공중에 살포하여 “한국인들의 분별없고 경솔한 행동은 다만 불필요한 인명의 손실과 아름다운 한국 땅의 황폐화와 재건 기간을 연장시키는 사태만을 초래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1875-1965)은 맥아더(1880-1964) 장군의 주선으로 임정 요인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한국을 떠난 지 33년 만에 도쿄(東京)에서 맥아더의 전용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돌아왔다. 서울 도착 이튿날 오전 10시 중앙청 광장에 5만 명을 헤아리는 환영 군중이 몰렸다. 하지 장군은 이승만에 대해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일생을 바쳐온 ‘위대한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이에 이승만은 답사를 통해 38도선과 소련을 맹렬히 비난한 후, 한국민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했다. 이때 그 유명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구호가 회자되였다. 

 

이승만은 이미 1945년 12월 17일에 방송 연설을 통해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모국이라고 부르면서 한반도를 소련의 일부로 만들려고 한다.”라고 하면서 “우리가 이 문제를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돌로 쪼개져 내전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1950년 6·25 전쟁으로 그대로 적중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 취임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남한 단독으로 실시되었다. 198명의 제헌의원을 선출했다. 제헌국회는 5월 31일에 소집되어 188표를 얻은 이승만을 초대 국회의장으로 뽑혔다. 북한에서 선출될 대의원을 위하여 의석 100석을 공석으로 남겨 두었다.

 

해방이 된지 5개월째가 되던 1946년의 새해가 밝았다. 1월 14일에 경북궁에서 태극기 게양식이 거행되었다. 1945년 9월 8일에 미군의 진주 이후 관공서에 태극기 게양을 금지했던 규정을 풀고 이날 해방 후 처음으로 애국가가 울러퍼진 가운데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1946년 해방 후 처음으로 맞게 된 제27주년 삼일절 기념식은 해방된 조국에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그러나 좌우가 각각 남산과 보신각에서 별도로 기념식을 개최했다. 38선 이북에서도 삼일절 기념 행사가 있었다. 그러나 항일 운동에 가장 큰 민족적 성과를 기념하는 날 삼일절 기념식은 김일성에 대한 찬양으로 시종일관 진행되었다. 반탁을 주장한 조만식을 제거한 북한은 이미 김일성 체제를 굳혀놓고 있었다.

 

1946년 5월 15일 미군정은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 공산당이 당비를 조달하는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만들어 시중에 유통 시켰다며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에 관련자 공판이 있던 날 좌익 진영에서는 미군정에 조작극이라고 항의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일으켰다. 미군정은 강경하게 대했고 이날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중 한 명이 사망했고 50여 명이 검거되었다. 

 

미군정은 이를 계기로 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반면 공산당 활동을 전면 불법화 시켰다. 당시 경찰 집계에 의하면 이 무렵 약 1년 동안 경찰에 검거된 좌익이 12만 명 사상자가 750명에 달했다. 이때부터 좌익은 지하 활동으로 전환했다. 얼마 후 박헌영은 월북했다.

 

1946년 이전에 남한 인구는 19,369,000명이었다. 해방 1년 만에 200여 만 명이 증가했다. 1946년 8월 15일에는 첫 해방 기념일이 있었다. 좌우익은 기념일마저 별도로 진행되었다. 미군정의 탄압에 직면한 좌익은 9월을 기해 총 파업에 들어갔다. 10월 1일에는 대구 폭동이 일어났다. 공산당의 불법 투쟁 노선에 의해 시작된 폭동은 식량 배급 문제와 맞물려 순식간에 경상도와 전라도 일원으로 확산 되었고 이 사건으로 200여 명의 경찰, 천여 명의 관리와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내세워 미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김구와 여운형은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자신들의 통합의지만으로는 역부족임을 느꼈다. 좌우의 갈등은 신탁통치 문제로 더욱 심해졌고 그 여파는 남한 사회의 전체에 파급되었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영역에서 그 갈등은 대립으로 어수선했고 불안한 사회는 해방의 기쁨과 희망을 빼앗아 갔다. 

 

1947년 3월 1일 제28회 삼일절 기념식이 열렸는데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좌익은 남산에서 각기 따로 가졌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이제 좌우익의 갈등은 언제 폭발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 연령 측이 신탁통치 문제로 소용돌이 쳤다. 양 측이 시가행진에 들어갔으며, 결국 남대문에서 충돌하였다. 서로를 불신하고 증오감으로 서로 맞서서 갈등하고 있을 때 최초로 좌와 우, 남과 북이 함께 부르는 노래가 등장했다. 그것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안석규 작사, 안명원 작곡)이라는 노래였다. 

 

1947년 4월 21일에 이승만이 도미외교 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1946년 연말에 미국으로 출국하여 외교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미 국정 사령관 하지의 중도세력 육성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돌아왔다. 4월 29일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의 환영대회가 8만여 명의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그는 “총선을 통해 남북통일을 위한 남한 과도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좌우 합작을 추진하던 몽양 여운형이 유력한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15분 여운형은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 청년에 의해 피살되었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좌우 합작 동력은 힘을 잃었고, 중도 노선은 설 자리를 잃었다. 1947년 8월 15일은 해방 2주년 기념일이 있었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은 100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다. 우익계 인사들만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1948년 5월 10일에 유엔의 감시단에 의해 남한만의 총선이 실시되었고 그 이후 7월 20일 국회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형이 당선되었다. 7월 24일에 대통령, 부통령에 취임하였다. 해방된 지 만 3년만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이승만은 “오늘 거행하는 이 식은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족이 새로 탄생하는 것을 겸하여 축하하는 날입니다. 이 날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 40여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 온 결실이 표현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최초로 대통령 국군 사열식을 거행했다. 만 3년의 미군정 시대는 막을 내렸다.

 

1948년 7월 24일 북한에서는 태국기가 내려지고 인공기가 게양되었다. 인공기로 전면 교체하기 시작했다. 남과 북을 이어주던 태국기는 그 후 북한 땅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래전에 통치체계를 갖춘 김일성은 자신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는 선언만은 남한 정부 수립 뒤로 미루어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를 선언했다.

 

정부 수립의 기쁨이 채 끝나기도 전인 10월 20일부터 27일까지 여수 순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여순반란 사건이라 한다. 제주도의 4ㆍ3 사건 이후 한라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있는 남로당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 예정이었던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 중이었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반란군은 여수를 점령한 뒤 순천으로 이동했으며 이후 전라남도 일대를 점령했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한 뒤, 5개 연대를 투입해 여순 지역 탈환에 성공했다. 진압 과정 중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당했으며, 1714명의 반군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그 중에 866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1949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을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1949년 5월 20일에 국회프락치 사건이 검찰에 의해 발표되었다. 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소장파 의원 13명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고 있다는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소장파 의원이 중심이 된 반민특위는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급기야 6월 6일 반민특위가 경찰에 의해 무력으로 강제 해산되어 친일파 문제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49년 6월 26일 12시 50분 경 백범 김구가 안두희라는 포병 소위에 의해 피살되었다. 안두희는 김구가 이끌고 있는 대동청년단 소속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장례는 최초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6월 29일 미군은 철수를 모두 끝냈다. 미군은 떠나면서 500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겨 두었다. 미군 철수로 파장을 최소화 하기 위한 조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되었지만 독립국가로서는 멀고도 먼 여정이었다. 좌우 대립은 독립국가로서 미래가 암담했다. 좌익의 출현은 민주주의 체제를 파괴하고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이미 북한에서는 이러한 국가 수립이 소련의 군정으로 착실이 준비되어 왔었다. 그러나 남한은 미국이 있었고 이승만이 있었다. 결국 제헌국회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였으며, 대한민국이 독립국가로서 독립정부가 들어섰다.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을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았다. 그때가 바로 1949년 12월 12일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해방후 좌우익의 갈등 양산이 재현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함을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 누가 이 나라를 지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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