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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서, 이스라엘의 멸망과 구속의 여망신명기 34장에서 모세의 죽음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까지 이어진다. 열왕기에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한 국가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신명기전적 역사이다. 이 역사의 특징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파기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임하는 저주의 시대였다. 이러한 저주와 죽음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간간이 희망과 소망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곧 성령에 사로잡힌 사사들의 등장이었다. 이어 등장한 사무엘 시대는 다윗을 내다보고 있다. 신명기에서 열왕기서끼지의 하나님의 구속사 열왕기서는 상하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역사는 전망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회고적으로 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열왕기서가 끝나는 포로 이후에 사는 사람이 과거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적으로 보면서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열왕기서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신명기서 이후 여호수아서부터 열왕기서 까지 전체 일관된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은 열왕기서의 기록 목적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구속사 열왕기서는 다윗의 마지막 날들로부터 시작하여 바벨론에서 여호야긴의 죽음으로 끝나고 있다. 대략 기원전 970년부터 기원전 550년까지의 기간, 약 420년간 기간을 포함하고 있다. 열왕기서 저자는 포로 이후 시대에서 과거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던 그 시대를 회고적으로 보고 있다. 신명기전적 역사라 할 때 신명기서의 언약(계약)의 빛 아래서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 관계 속에서 열왕기서의 왕정 시대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열왕기서는 예레미야라는 선지자와 비슷한 역사적인 전망을 하고 있다. 기원전 621년 요시야가 국가적인 부흥 운동을 일으킨 일이 있다. 그 계기는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신명기서를 발견하였고 그 신명기서를 통해 국가적인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신명기서의 하나님 언약에 영향을 받은 자가 바로 예레미야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외쳤던 것은 파기된 언약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로 돌아오라는 외침이었다. 언약의 관계로 돌아오라 열왕기서 역시 예레미야의 외침과 같이 이스라엘의 패역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파기되기 전 상태로 회복하는 것,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돌아오라는 것은 언약 관계로 돌아오라는 것이었고 그 언약은 신명기서에서 발견한 하나님과 백은 언약의 내용이었다. 열왕기서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여 패역했던 그들의 역사는 죽음과 저주, 그리고 멸망의 역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열왕기서가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에는 이미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기원전 8세기 선지자들이 거쳐왔고 기원전 7세기 선지자 예레미야도 있었다. 기원전 6세기 선지자인 에스겔도 있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적으로 보고 있다. 무엇을 회고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여 계약관계가 깨짐으로 이스라엘 온 땅에 내렸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심판과 그 경고였다. 그 경고는 결국 언약 관계로 돌아오라는 것으로 하나님 여호와의 주되심과 그 백성인 이스라엘의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 언약 회복과 다윗 왕국 재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로 다시 회복하는 결과는 다윗 왕국의 재건이며 여기에 희망과 소망이 있었다. 열왕기서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는 언약을 파기하여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파기됨으로 찾아온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와 심판이었다. 이로 인해 포로 후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에 경고의 메시지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열왕기서의 420년의 역사를 통해 언약을 파기한 패역한 이스라엘을 얼마나 참고 인내하셨는가를 보여준다, 비록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사랑과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의 구속과 사랑을 보여준다. 즉 자비하신 하나님의 구속 역사라 할 수 있다. 죽음과 멸망의 저주 속에서도 하나님은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의 죄악 가운데서도 회복시켜 주셨다. 에스겔서 37장에 나타난 아골 골짜기의 환상처럼 회복시키실 것이다. 죽음의 저주 가운데서 장차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모든 산들 위에 뛰어난 성전이 놓여질 산들을 세우실 것이다(사 2:2). 죽음과 저주의 어두운 흑암의 터널 속에서 장차 회복과 희망을 바라보며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 속에서 오직 그분만의 주되심을 기억하며 헌신과 충성할 자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이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고 언약 관계로 다시 돌아오게 할 한 사람, 이새의 뿌리로부터 한 가지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한 씨(사 11:1-3), 이 사람이 일어나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요, 묘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원한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라고 부르는 그때(사 9:6),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다시 언약을 체결하는 그때(렘 31:31), 이러한 때를 보여주고 있다. 지상의 왕권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 이제 저주와 죽음의 역사인 동시에 소망과 희망과 여명의 햇살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역사 가운데 열왕기서는 왜, 무엇 때문에 왕정 중심의 역사로 기록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늘에 있는 천상의 왕이다. 그러나 그 천상에 있는 왕이 지상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그의 백성을 돌볼 수 있도록 자기 왕권을 위탁하는 왕들을 세웠다. 이런 의미에서 지상의 왕들은 천상의 왕이신 하나님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종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상의 왕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권세를 가지고 있다. 위임받은 왕들의 권세는 백성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지배하는 권세가 아니라 봉사하는 권세이다. 왕상 15:11절에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한다. 아사라는 왕을 언급하면서 그 아사 왕은 그의 열조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다. 하나님의 눈에 올바른 것이 곧 선한 정치이다. 또 다른 면에 있어서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고 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라고 한다(왕상 16:25-26). 왕이란 열왕기서에 의하면 단순히 백성의 대표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관리자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구원, 자유, 생명 보존이다. 이런 의미에서 열왕기서는 왕권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다윗의 왕권을 계승한 솔로몬 왕권과 하나님의 구속사 열왕기서의 시작은 다윗으로부터 솔로몬에 이르는 왕의 계승사건을 초반부에서 기록하고 있다(왕상 3-10장).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한 이유는 이미 사무엘서에서 다윗과 맺은 언약(삼하 7장)을 성실히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다. 이 언약의 계승은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약속한 결과이며 이는 신약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질 것이다.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승리케 해 주신 하나님은 솔로몬의 왕권이 든든히 설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다. 이 역사는 승리와 번영의 역사이다. 천상 왕이신 하나님이 지상의 솔로몬 왕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의 역사를 진행해 간다. 하나님은 이제 사사시대처럼 이 방 민족을 통해 징계의 압박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방 민족이 솔로몬 왕권에 불복하게 한다. 그야말로 솔로몬 왕권은 찬란한 영광과 번영의 상징이었다. 더 이상 예루살렘 땅은 폐허의 땅이 아니다. 그 땅에는 장엄한 궁전이 들어섰고 왕국의 최대 번영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이 들어섰다. 하나님은 그 성전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주시고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히 임재했다. 그곳에 하나님 여호와가 좌정하셨다. 예루살렘은 종말론적으로 영원한 왕국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좌정하고 계신다. 그는 평화와 화평과 생명으로 통치하는 나라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후 성전 봉헌 기도를 드린다(왕상 8장).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 8:30) 솔로몬은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응답해 달라고 한다. 비록 다른 이 방 민족이라 하더라도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들어달라고 한다(왕상 8:41-43). 이 기도는 훗날 참 성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이방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구원이 임했다. 열왕기서의 역사는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고 성전이 약탈당하고 폐허 된 역사로 끝을 맺고 있다.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시작된 역사는 최종적으로 폐허 된 상태로 끝난다. 이 폐허의 역사는 무려 4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끝을 맺고 있다.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의 심판과 분열왕국 하나님은 그들이 패역했을 때 남쪽과 북쪽으로 나누심으로 그들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기원전 8, 7, 6세기 선지자들을 통해 꾸짖기도 하시고 격려하시기도 했다. 엘리야와 엘리사를 보내기도 했다. 언약 관계에서 떠난 이스라엘은 완고한 반역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을 거부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이 참으신 가운데 언약의 저주 조항에 해당한 징계는 민족의 몰락이었다. 그것이 바로 바벨론 포로였다. 이미 하나님은 언약의 저주 조항에 해당한 사건, 레위기 26:27, 신명기 28:36, 왕상 8:46절은 이러한 언약의 저주가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내릴 것인지 경고하는 말씀이다. 열왕기서에서 보여준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 말씀이다. 언약에 충실하다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만이 그들의 주님이요, 창조주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피조물로서 그 주님에게 충성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했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의 압박으로 돌아올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선택하여 언약을 맺으셨다. 그 언약의 반역에서 종말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참된 통치자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열왕기서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열왕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약의 역사서인 정경은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믿는다. 그러나 이 말씀이 신약성경과 유기적인 통일성을 갖느냐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열왕기서에서 말씀한 하나님, 계시된 하나님은 자신의 구속경륜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대로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하였다고 말씀한다. 이와같이 열왕기서는 구약의 역사로 종결되지 않고 짐진적으로 계속 발전되어 종말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서 종결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이러한 해석의 관점을 거부한다. 신약성경 자체를 거부한다. 구약의 범주안에서만 해석한다. 물론 그리스도교에서도 구약의 범주 안에서 해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유대교와 달리 신약과 연계하여 햐석한다. 열왕기서는 지금까지 설펴본대로 신명기전적 역사의 관점에서 살핀다. 이는 신명기에서 말씀한 모세의 언약에 근거한다. 모세 언약은 이전 아브아람의 언약, 아삭과 야곱의 언약과 연동된다. 이러한 언약의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이시며, 이스라엘의 그의 백성이며, 백성은 왕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 언약의 핵심 내용이다. 하나님 여호와는 아스라엘과 언약을 맺었다. 이스라엘은 그 언약에 충실해야 한다. 이러한 언약은 열왕기서에서도 계속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언약을 파기했다. 다윗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 사무엘서에서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 언약은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이었다. 다윗과 맺은 언약은 열왕기서에 반복된다(왕상 15:4).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열왕기서에서 다윗 왕권이 강조되는 것은 유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윗 계보의 왕들은 유다 지파 후손에게 주어진 약속에 따라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이어간다. 이러한 약속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 열왕기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되었다(왕상 1-11장). 열왕기상 12장부터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함 이후 통일왕국인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분열된다.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시작하지만 계속된 왕권은 반역과 쿠데타로 이어진다. 왕권의 정통성이 무저진다. 그러나 남쪽 유다의 왕권은 이미 약속해 주셨던 대로 다윗에게 약속한 그 왕권이 유다를 통해 계속이어졌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부패로 인해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했다. 하나님의 주되심을 거부하고 바알을 숭배했다. 우상을 숭배하며 그 우상이 자신들에게 풍요를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이러한 우상숭배는 분열왕국 이후 북쪽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쪽 유다에게도 있었다. 열왕기서는 두 왕국이 여호와 하나님의 주님되심을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했다고 지적한다. 이는 한결같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한 결과였다. 이러한 두 왕국의 범죄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 심판의 결과 불ㄸ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함락되어 포로로 잡혀갔다. 남쪽 유다 역시 바벨론에 함락되어 포로로 잡혀갔다. 똑같이 범죄하여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이 열왕기서의 시각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범죄와 심판 중에서도 남쪽 유다에게는 북쪽 이스라엘에는 없는 다윗과 맺은 언약이 있었다. 그 언약에 근거하여 남쪽 유다는 계속 그들과 함께 해 주셨다. 성경은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 약속이란 장차 종말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잇긴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위해 열왕기서에서 이미 섭리하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열왕기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의 영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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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장로 교회 공동의회 법리 반드시 이해해야목사와 장로 교회 공동의회 법리 반드시 이해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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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자기반성설교자의 일차적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소개하는 일이다. 이는 성경이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고안해서 만들어낸 막연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이여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다. 이러한 믿음이 전제될 때 그리스도교가 성립된다. 설교자는 성경을 원천으로 하여 설교를 한다. 그 설교는 결국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소개하는 것이 일차적인 임무다. 이러한 임무를 소홀히 할 때 그 설교는 설교로서 기능이 상실된다. 설교자가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성경 구절을 제시하는 형식의 설교 유혹을 받는다. 성경은 성경 스스로가 입증한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임을 성경이 스스로 입증한다. 이 입증이 권위가 있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천 년 기독교 역사는 이 성경을 특별계시로 접근하면서 신적 권위와 그 권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성육신 하나님을 교리적으로 체계화 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모든 성경”을 포함한다. 모든 성경, 즉 구약과 신약인 66권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는 그리스도교, 즉 기독교에서만 가능한 진리이다. 초월하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유일한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를 대신하고 우리 모두를 대표한 대속의 죽음이었다. 이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이다. 여기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가 성립된다. 이러한 세 가지 교리, 즉 삼위일체, 성육신, 이신칭의 교리는 성경의 핵심 내용이며, 이는 오직 그리스도교에서만 가능한 교리이다. 신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유대교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우리가 말하는 구약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이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율법의 행위로 주어진다고 믿는다. 유대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 인간으로서 선지자일 뿐이다. 그는 한 인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하나님의 계시자 등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구원관 역시 모세율법을 지켜야 구원이 임한다고 주장한다. 즉 행위 구원을 주장한다. 어떠한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 구원이 달라지는데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신지식을 부인하고 거부한다.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복음에 근거하면 유대교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유대교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도교(기독교)는 구원이 없다. 이는 특별계시인 성경과 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되 어떠한 하나님, 어떻게 계시된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 구원관이 달라진다. 설교자는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이 있다. 본문 없이 설교하는 경우는 없다. 모든 설교자는 성경 본문을 읽고 그 본문을 통해서 설교한다. 설교자의 강박관념은 설교를 듣는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오직 청중들을 설득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성도의 실천적 행위를 강조한다. 그래서 언제나 설교는 세상적인 이야기, 교훈적이고 도덕 윤리적이고 훈계식이다. 물론 설교는 이런 요소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오직 이런 것으로만 설교가 구성되어 있다면 문제가 된다. 여기서 필자가 제한하는 것은 설교자는 먼저 청중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실천적 행위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으로 소개(계시)되고 있는가”라는데 초점을 맞추어 보자는 것이다. 첫째, 본문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이야기하기 위해 본문이 속한 각 권을 살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 더 넓게는 본문이 구약성경일 경우, 구약성경 전체를 살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셋째,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 속에서 살펴야 한다. 넷째, 본문이 신약성경일 경우, 신약성경 전체 속에서 살펴야 한다. 다섯째, 구약성경 전체 속에서 살펴야 한다. 이러한 설교를 위해 신구약 성경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성경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에 관해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본문에 등장한 다양한 인물, 사건, 역사 등을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이 부분을 청중들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을 간단명료하게 해야 한다. 설교자도 이해하지 못한 이야기를 청중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설교에서 적용은 두 번째 이야기이다. 먼저 본문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전후 문맥과 맥락, 각 권과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면서 핵심적인 내용을 설명해 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는 설교자의 성경 해석에 대한 일차적인 책무이다. 이 부분을 바르게 수행하지 못하면 설교자로서 그 직무를 바르게 수행하지 못한다. 이런 부분을 무시한 설교는 설교자가 아니어도 설교를 흉내 낼 수 있다. 설교자가 아니어도 일반 신도들도 설교를 흉내 낼 수 있다. 설교자가 많은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장점이다. 그러나 많이 알고 있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알고 있는 것을 성도들의 수준에 맞게 쉽게, 이해되도록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핵심을 요약해서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점정리’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런 요점정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학습해 왔다. 대화를 나눌 때 핵심적인 요점이 중요한 것과 같이 설교할 때 본문의 내용의 핵심적인 요점을 청중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개할 경우, 일차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는가? 그것은 청중들이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알게 되고 믿게 된다. 이러한 믿음은 내적 변화를 일으킨다. 물론 이는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에 관해 소개를 받을 때 성령께서 설교를 듣는 자들을 감동하게 한다. 내적 변화가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면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셔서 성도들의 감동과 내적 결심과 결단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으며(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엡 6:17)이다. 성령의 검인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말씀을 증거하면 성령께서 듣는 청중들의 삶을 변화할 수 있도록 적용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소개한 후 구체적으로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가?" 구체적인 적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본문의 모범적인 교훈을 통해 성도들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설교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특별한 자신의 의도된 목적을 위해 강연 형식의 이야기를 한 후 마지못해 성경 본문을 인용하는 식의 설교는 2천 년 교회 역사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교회 최대의 위기는 이 문제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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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 하나님 중심, 룻기서의 구속사적 이해룻기서는 구약성경에 포함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룻이라는 이방 여인과 유다인 보아스가 결혼하여 오벳을 낳았다. 그 오벳이 바로 다윗의 조부요, 이새의 아버지였다. 오벳(עוֹבֵד)이란 이름은 ‘섬기는 자(예배자)’란 의미이다. 에스더서는 유다인 가운데 에스더라는 여인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면, 룻기서는 이방인 룻이라는 여인을 중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윗의 조부인 오벳이 태어나기까지 극적인 이야기가 룻기서에 펼쳐진다. 그 극적인 이야기는 유다 땅에 살던 유다인 중 엘리멜렉과 그 아내 나오미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그 부부에게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이 있었다. 룻기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룻 1:1) 룻기서는 의도된 목적인 보아스와 결혼할 룻이라는 여인을 위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전개된다. 이 이야기를 위해 엘리멜렉과 나오미라는 한 가족의 이야기가 동원된다. 그 가족이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내려간다. 모압은 언약 밖의 사람들이 사는 땅이다. 룻기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룻기서를 시작하면서 예루살렘 흉년 이야기와 더불어 엘리멜렉 가족이 모압으로 내려간 사건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 사건은 특별한 룻기서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관심을 두기에 충분하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다양한 사건을 접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다양한 사건은 그 사건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즉 그 사건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성경이 기록된 것은 아니다. 그 사건을 통한 하나님 계시, 즉 하나님의 의도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지 않고는 그 사건을 바르게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룻기서 초반부에서 보여준 이 사건의 의도된 목적은 다음 두 가지로 말 할 수 있다. 첫째는 모압에서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죽는 일이요, 둘째는 죽은 아들의 남편이었던 룻이라는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얻는 일이다. 룻기서 저자는 이 두 사건을 룻기서의 의도된 목적을 위해 활용하고 있다. 그 핵심적인 이야기는 모압 여인 룻을 예루살렘에 사는 보아스와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룻기서에서 확인해야 하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 일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과 구속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 계시 때문이다. 모 앞 땅에 방문하여 완전히 망해버린 나오미를 따라 유다 땅 예루살렘에 따라온 모압여인 룻이 있었다. 이 룻은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의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 당시 독특한 문화인 ‘기업무를 자(고엘)’를 통해 가능한 일이었다. 이 기업무를 자란 룻을 보아스와 연결하는 방편으로 동원된다. 기업무를 자인 고엘 제도가 룻기에서는 의도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동원된다. 이는 곧 보아스와 룻을 맺어주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룻기서의 의도된 핵심 내용이 왜, 무엇 때문에 보아스와 룻에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룻기서가 기록된 배경인 사사시대 이전인 창세기에서부터 이후 신약 성경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더 정확히 표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와 같은 답변은 성경신학에서 신구약 성경의 ‘유기적 통일성’이라 주제로 다룬다. 창세기에서부터 발아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씨앗이 점진적인 발전을 통해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고 있다. 룻기서는 룻기에서만 안주하여 해석하고 설명하면 안 된다. 룻기서 이야기는 신구약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살펴야 한다. 즉 신구약 성경 전체 중에서 한 부분인 룻기서를 다루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인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역사, 구속 경륜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된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기 전에 결혼했는지 결혼을 했다면 아들이 있었는지는 침묵하고 있다. 아들이 있다는 기록이 없다. 룻기서 저자는 아들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마치 히스기야가 15년 생명 연장을 받기 전에 아들을 언급하지 않고 이 기간에 아들 므낫세를 낳아 정통성을 잇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보아스의 어머니는 라합이다. 여호수아 시대에 언급된 기생 라합이다. 여호수아에서 기생 라합의 믿음과 그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관해 자세하게 기록된다. 그러나 그가 누구와 결혼을 하였는가? 그리고 그가 낳은 아들은 누구인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여호수아서와 룻기서에는 이러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나 신약성경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보아스의 어머니가 라합이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 1:5-6) 기생이었던 라합의 남편이 살몬이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아스의 아버지는 살몬이고 그의 어머니는 라합인 셈이다. 이 보아스는 다윗의 고조할아버지가 된다. 결국 이 족보는 예수님의 족보이다. 이 이야기는 룻기에서 왜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가 강조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룻기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이제 룻기에서 어떻게 보아스와 룻이 관계를 맺게 되는지 룻기서의 재판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룻기 4:1) 여기 보면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라고 말한다. 고대의 성문 어귀에는 대체로 넓은 장소로 이곳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다. 이곳은 성읍의 대표들, 특히 장로들이 백성들을 만나고 율법상의 판결을 내리던 곳으로 이용되던 장소였다(신 21:19, 수 20:4). 성읍의 유력한 자만이 성문 어귀에 있는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이처럼 성문은 성읍 백성들에게 있어서 사회·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갔다는 사실은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율법상의 판결을 받기 위함이 틀림없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 앉아 있을 때,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갔다. 여기 '마침'이란 히브리어로 ‘힌네’인데, ‘보라’, ‘자’, ‘드디어’라는 의미가 있다. 드리어 첫 번째 고엘이 광장을 가로질러 보아스가 앉아 있는 곳으로 왔다. 이 사람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아무개여’라고 말한다. 그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룻의 미래가 결정된다. 보아스는 재판을 위해 예루살렘 장로 10명을 불렀다.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룻 4:2) 보아스는 장로 10인을 불러 각자 앉을 자리를 배정하여 준다. 이 재판은 엘리멜렉 집안을 책임질 고엘을 선정하는 재판이었다. 재판 안건은 4:3절에 기록된다.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룻 4:3) 보아스는 재판을 시작한다. 첫 번째 고엘에게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레위기 25:23-28절에 따라 엘리멜렉의 유가족을 위해 첫 번째 고엘에게 그 땅값을 대신 지불해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이행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 그러나 4:4절에 의하면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라고 한다. 여기 히브리어 고엘이란 ‘되 사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행하다’라는 뜻인데 아무개는 고엘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힌다. 이미 보아스는 그 아무개에게 “당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내가 책임을 지겠다”라는 분명한 의사를 표명한다. 그러자 그 아무개는 자신은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한다. 즉 첫째 고엘은 고엘 의무행사를 포기한다. 그러나 첫째 고엘 의무자가 자신의 의무행사를 포기하자 서열로 두 번째 고엘인 보아스가 고엘 의무행사를 이행한다. 고엘 의무를 양도받은 보아스는 이를 정확히 해 두기 위해 9절에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라고 한다. 두 번째 안건을 위해 증인을 세운다. 10절에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라고 한다. 이제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엘리멜렉의 데를 이어주는 고엘 의무행사에 증인을 내세우고 있다. 재산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주기 위해 고엘 의무책임자로 보아스가 확정되어 대를 잇지 못하고 죽은 엘리멜렉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고엘 의무행사를 확정한다. 재판이 끝나자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축복한다. 11절에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라고 한다. 12절에서는 보아스의 집이 베레스의 집과 같이 되기를 축복한다. 12절에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라고 한다. 베레스에 관해 설명하기를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아들이라고 한다. 다말과 유다의 관계 역시 ‘기업물을 자’인 ‘고엘’에 의해 베레스를 낳아 대를 잇는 것과 같은 개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고엘 제도를 통해 대를 잇게 하여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부터 약속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그 약속은 결국 하나님의 구속이며, 그 구속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룻기서는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구속의 역사를 보여준 하나님의 말씀이다. 룻기서의 해석과 적용의 원리 화란에서 제기된 구속사 설교에서 적용은 별도의 독립된 주제가 아니었다. 본문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면 자동으로, 즉 성령의 역사로 적용이 이루어진다는 논지였다. 구태여 본문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한 후 별도로 적용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속사 설교는 마치 신학 강의와 같다는 평가가 있어 왔다. 본문 해석과 적용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한 결과였다. 그러나 설교의 역사에서 본문 해석과 적용은 설교의 주요 요건이기도 했다. 본문을 해석할 때는 삼위 하나님 중심 개념을 활용하여야 한다. 그리고 본문의 전후 문맥 등을 통해 종합적으로 살핀 후 저자의 의도, 즉 본문을 통한 하나님 계시의 의도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을 적용적으로 설명한 것이 먼저가 아니라 종합적으로 살펴서 본문을 통한 계시의 의도를 해설한 후 설교를 듣는 청중들에게 적용적으로 설명함은 물론 삶의 현장에 적용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설교가 본문 설명만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또란 적용중심적으로만 해서도 안 된다. 본문 설명과 적용을 균형있게 해야 한다. 룻기서 본문을 종합적으로 살핀 후 본문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더불어 신구약 성경의 유기적 통일성에 의한 삼위 하나님 중심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는 룻기서는 성경 66권 전체 가운데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 후 본문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할 때에 본문의 사건을 적용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형식논리에 따르면 룻기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를 적용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물론 전제는 본문을 종합적으로 설명한 후 이루어져야 한다. 본문의 의미 분석 없이 적용적 설명으로만 설교할 경우, 이는 한계가 있다. 이런 형식은 주로 큐티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그러나 설교는 이런 개념을 초월해야 한다. 하나님은 룻기서의 다양한 사건을 통해 구속의 역사를 진행해 가신다. 그러한 진행 과정에서 동원된 다양한 사건과 이야기들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것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다. 엘리멜렉의 한 가정이 예루살렘의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내려간 사건, 그곳에서 가장과 두 아들이 죽는 사건 등을 통한 아기자기한 삶의 이야기를 설교를 듣는 청중들에게 적용적으로 설명하는 일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룻기서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계시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어여 한다. 신학교 강의실에서 구속에 관한 신학적 강의와 같은 설교를 한다면 이 역시 한계가 있다. 룻기서에서 강조한 하나님 계시의 핵심적 진리를 설명할 때 본문 사건과 모범적 행위들을 통해 설명하면서 적용하는 일은 구속사적 설교에서 매우 중요한 전제 요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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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최초 우리말 성경 번역1884년 9월 20일 알렌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입국하기 전에 중국에서 우리말 성경을 번역해 펴낸 최초의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로스 선교사이다. 선교사들이 피선교지에 파송을 받아 피선교지의 언어를 습득하면서 복음을 전한다. 충분한 언어가 습득될 때 피선교지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선교사들이 입국하기도 전에 중국에서 한글어 성경이 번역되었고 최초로 상주하는 알렌과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한글로 된 성경이 번역되었다. 로스 목사(John Ross, 羅約翰, 1842∼1915)는 성서공회 총무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 1829-1890)의 조언을 받아들여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Scotland) 의 파송을 받아 1872년 8월 23일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 그의 나이는 30세였고 신혼 초였다. 그의 동역자이며 나중에 매부가 된 네 살 위의 매킨타이어 목사(John MacIntyre, 馬勒泰, 1837∼1905)는 역시 같은 교단 소속으로 그해 1월 1일에 산동 반도의 치프에 먼저 와 있었다. 로스는 1873년 결혼 1년 만에 그의 아내 스튜어트(M. A. Stewart)는 영하 25도 이하의 혹한 가운데서 무리한 여행을 한 끝에 병을 얻어 죽게 되었다. 그는 아내와의 사별의 슬픔을 삭이며 ‘아시아의 마지막 은둔국 조선에 복음의 문을 열겠다.’라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1874년 10월 9일 영구를 출발해 첫 번째 고려문(高麗門 柵門, Corean Gate) 여행에 나섰다. 고려문에 도착한 그는 한국 상인들과 접촉하면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로스는 고려문에서 여러 명의 한국인과 접촉했고 드디어는 의주 청년 이응찬(李應贊)을 만나 보수를 지급하면서 심양에서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이 두 사람은 그 이듬해인 1877년 외국인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재 『Corean Primer』를 간행하고 이어서 우리말 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응찬은 동향 친구 이성하(李成夏)ㆍ김진기(金鎭基)ㆍ백홍준(白鴻俊) 등과 함께 번역을 계속해 1878년 봄까지 요한복음ㆍ마가복음을 번역했는데 뜻하지 않게 관헌에게 고발하겠다는 협박과 함께 돈을 요구하는 방해자가 생겨 잠시 번역 작업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1879년 조선인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던 존 로스 목사는 스코틀랜드로 안식년을 떠났다. 그 후 만주에 남아 있었던 매킨타이어 목사와 조선인들은 성경 번역 작업을 지속했고, 1879년에 신약성경 초고 번역이 완성되었다. 조선인들은 성경 원어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주로 한문 성경을 사용해서 번역을 도왔다. 매킨타이어는 헬라어 성경을 참고로 수정작업을 했다. 그해 번역에 참여했던 4명의 조선인이 매킨타이어에게 세례를 받았다. 성경 번역은 1877년 심양에서 로스 목사의 주도로 이응찬이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의 번역을 마쳤고 다음에 서상륜이 우장(영구)에서 누가복음을 번역하고 백홍준 등에 의해 마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등이 번역되었다. 한국 땅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해외에서 성경 번역이 시작되었다. 만주에서 로스 목사를 주축으로 한 성경 번역사업은 꾸준히 계속되어 마침내 1887년에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일명 로스성경, Ross Version)』 오천 부를 문광서원 활판으로 간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최초의 우리말 신약성경 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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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선교현장, 알렌과 언더우드와의 갈등알렌은 의사이고 언더우드는 목사이다. 의사 선교사인 알렌은 목사 선교사인 언더우드 더 먼저 한국에 왔다. 알렌은 헤론이 입국할 때와 마찬가지고 언더우드가 입국할 때도 첫인상을 평가할 때 이미 서로 간 갈등을 예고하고 있었다. 언더우드가 입국한 1885년 4월 5일 다음 날에 기록한 알렌의 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 “언더우드 씨는 아주 빈틈없는 사람이고 사무적이고 민첩한 사람인 것 같아 보였다. 이 때문에 그는 오히려 자만에 빠지고 성급한 인간으로 간주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그의 성격으로 인해 장차 우리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언더우드에 대한 알렌의 직감은 장차 두 사이에 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 분쟁의 원인은 무엇이며 언더우드에 대한 알렌의 구체적인 평가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그는]늘 자의식이 강한 장로교 가문의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길쭉하고 챙이 있는 모자에다가, 흰 넥타이가 감추일 정도로 단추를 낀 검정 코트를 입고 그는 겁을 모르는 집사와도 같이 보였다. 또한 그의 꿋꿋한 턱, 높이 치켜든 머리는 그 역시 지배욕이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명령을 받으려 하지도 않았고, 남의 충고를 귀담아듣지도 않았으며, 서울에서는 오직 하나뿐인 칼빈주의 안수목사로서 자기가 다른 사람과 의견이 맞지 않을 때라도 자기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알렌은 의사답게 신체의 부분을 잘 묘사해 가면서 나름대로 얼굴형과 성격을 연결 지으며 평가하고 있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는 알렌과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언더우드와의 충돌은 의사와 목사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충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 초기 선교 현장에 서로의 주도권 싸움으로 갈등이 늘 존재 해 왔다는 것이다. 언더우드 편지에서 알렌과 헤론과의 관계에서 알렌은 독선적인 사람이라고 문제를 지적한다. 심지어 알렌은 병원에서 헤론 의사와 관계된 일마저 헤론과 전혀 상의 없이 혼자 처리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음은 언더우드가 평가한 갈등의 원인과 제공자가 알렌이었을 기록한 편지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의료 사업과 관련된 계산서를 전적으로 알렌이 관리하고 있으며 감사를 받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 크지 않는 문제라 해도 의료 사업 이외에 사용한 비용에 대해 헤론 의사는 알렌 의사에게 일일이 항목별로 계산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헤론 의사는 의료 비용에 대해 일체 의견을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중에 단 1원이라도 어떻게 사용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 우리는 이제 알렌 의사에 대한 신뢰를 모두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일렌 의사는 이중적인 사람이며, 조금만 말씀드려도 그 사실은 드러날 것입니다.” 언더우드와 헤론, 그리고 알렌 사이의 갈등은 전적으로 알렌의 독선적 행정 스타일과 혼자 전횡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 선교 초기 선교의 현장에 선교사들 간의 갈등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갈등이 있었음에도 선교사역은 하나님의 프로그램에 의해 역동적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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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과 언더우드 선교사의 입국과 한국선교고요한 아침의 나라인 조선에 많은 선교사가 거쳐 갔다. 한국 개신교는 1884년 알렌 이전에 많은 선교사가 거쳐 지나갔다. 심지어 토마스 선교사와 같이 순교하는 선교사도 있었다. 특히 알렌과 언더우드 이전에 이미 중국에 파송한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한국인과 함께 선교를 시작했다. 선교뿐만 아니라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기도 했다. 한국 개신교의 선교 출발을 왜 1884년 9월 20일에 입국한 알렌과,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한 언더우드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는가? 그 이전에 순수한 한국인이 전도를 받고 시작한 선교를 출발로 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 선교부가 한국을 선교 대상으로 하여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날을 한국 개신교 선교의 출발로 삼는 것은 순전히 그들의 선교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교 열매로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신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한국에 로스 선교사의 선교 열매로 복음이 전해졌고 세례를 받은 자들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도 한국선교의 시발점을 북장로회 선교사인 알렌과 언더우드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한 것은 그들의 선교실적과 열매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역사 기록을 그대로 답습한 한국장로교회는 선교의 출발을 1884년 9월 20일 알렌으로 입국으로 삼는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한국에 상주하는 선교사가 아니었기에 이들 중심으로 한국선교의 시발점으로 기록하지 않고 오직 미국북장로회(PCUSA) 상주하는 선교사의 입국으로부터 한국교회 출발로 삼아 역사 기록은 그들 중심의 선교 역사였을 뿐이다. 미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중국에 파송되었으나 파송지를 조선으로 옮긴 의료 선교사인 알렌(Horace N. Allen)이 상주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이름을 올렸다. 1884년 9월 20일에 가족을 중국에 두고 먼저 알렌이 홀로 한국에 입국하였다. 이듬해 4월 5일 오후 3시경에 같은 선교부 소속 원두우(Horace G. Underwood) 선교사가 입국했다. 이어서 1885년 6월 21일 의료 선교사인 헤론(J. W. Heron)은 그의 아내와 함께 입국했다. 한국에서 32년 동안 선교 사역을 위해 활동했던 언더우드는 인도 선교를 꿈꾸고 있다가 선교지를 조선으로 바꾸었다. 그는 뉴브런즈윅 시에 있는 네덜란드 장로회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여 1884년까지 신학과 함께 별도로 의학을 공부했다. 그가 신학과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의 조선에 대한 선교 열정은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모교의 관할 신학교인 네덜란드 장로교회를 찾아가 조선 선교 후원을 요청하였지만, 조선은 위험지역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북미 장로교회(Northen Presbyterian Church)의 선교 본부에 조선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여 허락받아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 3시경에 입국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 부활주일에 최초로 입국하여 복음이 유입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전해졌고, 순교와 성경이 전해졌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무명 신자들의 헌신적인 복음 전래는 오늘 한국교회의 성장을 이룩하는 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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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입국 이전의 선교1932년 9월 14일에 토마스 기념예배당 헌당식을 가졌는데 남쪽 외벽에는 초대교회 라틴 교부 터툴리안이 말한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The blod of the martyrs ithe sed of the Church)”라는 문구를 새겼다. 한국가톨릭교회는 무려 100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성직자와 신자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한국가톨릭교회가 한국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한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한국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신교 첫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직간접적으로 개신교 선교사 이루어졌다. 이를 공식적인 한국 개신교 선교 출발로는 삼지 않는다. 네덜란드 개신교인 벨트브레(박연)의 내한과 귀화로 인한 선교가 있었다. 그는 동양에 왔다가 이듬해인 1627년 우베르케르크(Ouwerkerk)호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에서 그리스도교인으로 자랐으며 기독교 교리로 양육 받은 사람답게 천지와 인명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음을 설파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에 들어와 살았던 최초 개신교인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하멜 일행의 내한이다. 하멜(Hendriek Hamel) 일행은 1653년 8월 15일 네덜란드에서 일본을 향해 항해하는 도중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 남쪽 화순포(和順浦) 앞바다에 표류하다가 가까스로 살아남게 되었는데, 그는 귀국하지 못하고 한국인과 결혼하여 정착했으며, 1666년 억류 생활 끝에 탈출하여 1668년 귀국하여 하멜은 조선에서의 억류 기간 도중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려고 보고서를 썼다. 영국인 맥스웰과 바실 홀의 한국 접촉과 성경전달 사건이다. 알세스트호(Alceste)의 선장 맥스웰(Muray Maxwell) 대령과 함께 서해를 탐사하였다. 홀은 「조선서해탐사기」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반도 서해안을 탐사한 것은 1816(순조 16년) 9월 1일부터 10일까지였다. 그의 일행은 잠시 육지에 상륙하여 비인(庇仁) 현감 이승렬(李升烈)과 마량진(馬梁鎭) 첨사(僉使) 조대복(趙大福)을 만나 수화(手話)로써 의견을 나누면서 성경을 전달했다.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진이 성경이 최초로 한국에 전래한 지점이라는 것은 최근에서야 역사적 사실로 고증되었다. 귀츨라프의 한국선교이다. 우리나라에 내한한 개신교인으로는 네덜란드인 벨트브레 일행과 하멜 일행이 있었으나, 그들이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파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고, 단지 프로테스탄트 교인이 내한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을 뿐이었다. 그 후 상거래 탐색을 하려는 외국 상선에 탑승해 우리나라에 온 개신교도인 귀츨라프 선교사는 가는 곳마다 성경을 직접 전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등 직접적인 선교를 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의 조선 선교 방문은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는 34년, 의료 선교사 알렌보다 52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53년이나 앞선다. 제너널셔먼호 사건과 토머스 선교사의 순교이다. 그래함 리와 언더우드는 토마스가 조선에 성경을 반포하러 온 첫 번째 장로교 선교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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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 역사의 시발점한국교회 선교 역사의 시발점을 몇 년으로 해야 하는가, 1884년인가, 1879년인가? 한국의 개신교 복음은 알렌 선교사의 입국인 1884년 9월 20일을 출발로 기록한다. 이를 기준으로 50주년 기념 희년 대회를 1934년에 개최했다. 상주하는 선교사가 입국하기 5년 전인 1879년에 4명이 중국에 파송한 매킨타이어에 의해 세례를 받은 세례교인이 생겼으며, 그들은 1875년부터 선교사들을 도와 한글 성경 번역작업을 진행할 때 그들은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므로 한국인 신앙공동체가 이미 시작되었다. 이때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선교 열매에 의해 1887년 9월 27일 서울에서 언더우드 사택에서 새문안교회가 세워졌다. 결국 한국선교의 출발, 한국교회의 출발은 상주하는 선교사인 알렌의 입국인 1884년이 아닌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1879년이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2023년 개신교 한국선교는 139년이 아니라 144주년이다. 한국 천주교는 개신교의 알렌 선교사가 입국한 1884년에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한국 천주교는 중국교회 신부인 주문모(周文謨) 선교사의 입국인 1794년 12월 23일을 선교의 시발점이 아닌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예수회 신부 그라몽(Louis de Grammont)에게 세례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아 돌아온 그 해를 선교의 시발점으로 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는 최초로 메킨타이어에 의해 백홍준 등이 세례받은 날이 1879년 1월 3일이었다. 이날로부터 한국 개신교 복음의 출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기록과 다르게 상주하는 선교사 입국인 1884년으로 삼고 있다. 한국 개신교 선교는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중국에 파송한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서 파송한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에 의해 세례를 받은 1879년을 시발점으로 한국교회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 한국에 상주하는 최초의 선교사는 1884년 9월 20일 의료 선교사인 알렌이었다. 이듬해인 1885년 4월 5일에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였다. 미국의 북장로회는 한국의 역사를 자신들의 선교를 한국의 선교 시발점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그러나 상주하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이미 한글로 된 번역 성경과 복음이 전해졌다. 한국인에 의해 최초의 교회인 송천교회(소래교회)가 세워졌다. 이미 중국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 선교사인 존 로스와 멕킨타이어 선교사에 의해 한국인이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어 세례를 받은 때가 1879년으로 한국선교의 시발점은 1879년이라 할 수 있다. 초기 한국 개신교의 역사 기록은 미국 선교사 중심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선교실적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그러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가 최초의 선교가 아니었다. 이미 한국인에 의한 선교와 교회 설립은 한국 선교의 아름다운 선교의 역사였다. 한국인에 의해 설립한 최초의 교회인 송천교회(소래교회)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영지) 뒷동산에 교회당 모형 건물을 세워 이를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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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의 12신조 중 제1조의 중요성한국의 모든 장로교회는 장로회 12신조를 교단의 신학적 입장으로 채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조와 교리는 교회가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신앙고백 형식으로 만든 것으로 교회 본질을 유지하고 계승하는 데 필요하다. 신조는 절대 권위인 성경의 권위 아래 종속된다. 한국장로교회의 12신조는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한 최초의 대한국 독노회에서 채택되었다. 12신조는 이미 전신인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채택 작업이 진행되었다. 대한장로교회 신경은 레이널즈(W. D. Reynolds, 李訥瑞)의 보고와 번하이슬(C. F. Bernheisel, 편하설)의 동의로 1년 동안 임시로 사용하기로 결정했고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도 게일(J. S. Gale, 奇一)의 보고와 길선주의 동의로 1년 동안 임시 사용을 결정했다. 그 후 1908년에 제2회 노회에서 특별위원 한석진과 마펫의 보고 후에 완전히 채택했다. 12신조 가운데 제1조는 “신ㆍ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本分)에 대하여 정확무오(正確無誤)한 유일(唯一)의 법칙이다.”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신조 제1조는 한국장로교회의 근간이 되었다. 누구든지 이러한 신조를 믿지 아니하면 장로교회의 교인이 될 수 없다. 제1조를 믿지 아니하면 나머지 열 한가지의 신조는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제1조를 근거로 하여 나머지 열 한가지의 신조의 세워져 있다. 성경의 신적 계시위에 신지식인 제2조와 제3조가 성립된다. 성경을 신적 계시의 말씀으로 믿어야만 그 성경에서 언급된 삼위일체 하나님이 가능하다. 장로교단은 신조를 믿지아니하면 목사와 각종 직분자가 될 수 없다. 만약에 목사와 각종 직분자가 되었을지라도 신조를 믿지 아니하면 목사직과 직분이 철회된다. 1934년‘조선예수교 장로회 제23회 총회’에서 구약 창세기의 모세 저작을 부인한 문제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김영주 목사가 1934년에 창세기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 것에 대하여 강병주 목사가 총회에서 문제를 삼음으로써 비롯되었다. 이 문제에 관해 총회 조사연구위원회는 “모세의 저작이라는 자체의 증거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신약 여러 책의 증거를 거짓말로 인정하여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하며 능욕하는 사람”으로서 “신조 제1조를 위반하는 자임으로 우리 교회 교역자 됨을 거절함이 가하다”라고 결론을 맺었다. 이 같은 결론에 입각하여 그 처리 결과대로 따를 것을 주문하고 있다. : “성경의 파괴적인 비평을 가르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을 우리 교회 교역계에서 제외하기 위하여 총회는 각 노회에 명하여 교역자의 시취문답을 행할 때에 성경비평과 성경 해석 방법에 관한 문답을 엄밀히 하여 조금이라도 파괴적 비평이나 자유주의 해석 방법의 감화를 받은 자는 임직을 거절케 할 일이오며 이미 임직 받았던 교역자가 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는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제6장 제42조, 제43조에 의하여 처리케 할 일이다.” 또한 제38회 총회(총회장 명신홍)가 1953년 4월 24일에 대구서문교회에서 개회되었다. 총회는 김재준 박사가 신조 제1조를 위반하였다며 다음과 같이 그 목사직을 파면했다.; “회장이 목사 김재준 씨는 제36회 총회 결의 위반급 성경 유오설을 계속 주장하였으므로 권징조례 제6장 42조에 의하여 예수의 이름과 그 직권으로 목사직을 파면하고 또 그 직분 행함을 금하노라.” 김재준의 “목사직 파면”은 “면직”에 해당된 사법치리의 시벌로서 자유주의 신학과 장로회 신조 제1조를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김재준의 치리는 이로써 일단락되었다. 장로회 12신조는 한국장로교회를 지탱하는 기둥과 같다. 이를 거부할 경우, 장로교회인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