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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강 목사 성탄 설교] 임마누엘의 영광[본문]"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18-23)1. 우리는 오늘 지금부터 2천 10 여 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을 기념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우리는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상하고 신비한 방식을 주목하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생각하기를 바랍니다.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일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을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여 보겠습니다.(1)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하나님의 천사가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꿈으로 알려 주셨습니다.“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여 지옥형벌을 당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그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었고, 그 뜻대로 예수님은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하여 두 가지의 사실을 반드시 함께 생각하여야 합니다.죄 – 하나님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죄가 얼마나 나쁘고 무섭고 비참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듭니다.그런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진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인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마음과 육체의 욕심대로 삽니다.무엇이 옳고 참되고 아름답고 착한 것인가를 연구하여 그것을 하려고 애를 써야 마땅합니다.사람이 만일 그렇게만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롬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하나님께서는 각 사람마다 한 일을 따라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착하고 옳고 참된 일을 하면 그에 따라서 상을 주시고, 반면에 나쁘고 거짓되고 더러운 일을 하면 그에 따라 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착하고 옳고 참된 것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상을 주시는가요?롬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 2:8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 사람이 죽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여 영생을 얻을 자가 있습니까?아닙니다.“기록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 3:23)고 하였습니다.그러니 모든 사람이 마땅히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형벌과 고통을 당해야 마땅합니다.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백성들이 남들 보다 더 착하고 더 옳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도 모두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가득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었습니다. 그래서 그 죄에서 그들을 구원하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예수님의 태어나심과 자라나심과 이 땅에서 살아가심, 그리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모든 것은 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죄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물론 그 말은 예수님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자가 없다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 태어나시어 자라서 나중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시고 하늘에 올라가시지 않고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었는가?하나님께서는 능력이 많으시어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도 그렇게 하셨으면 되지 않았을까요? 또 하나님 보다 높으신 분이 없으시니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든지 무어라 할 지가 없겠으니, 그냥 죄를 용서하시고 죄를 안 지은 것으로 하시면 되지 않았나?반드시 그렇게 하셔야만 되지 않았나? 그리고 하나님께는 힘센 천사들이 많고 많으니 그 천사들을 보냈어도 되지 않았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 되시기 위하여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사람을 구원하는 구주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태어나심으로 하나님도 되시고 사람도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이므로 우리 사람 대신 죄를 지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한 하나님이심으로 그 무한하신 능력으로 모든 믿는 자들을 다 구원하시기에 능하셨습니다.마치 해가 뜨면 그 햇빛을 아무리 많은 사람이 쐬인다 하여도 햇빛 양이 줄어들지 않고 다 같이 같은 분량의 햋빛을 누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다 예수님은 구원하시는 구주십니다.(2) 사람이 태어나려면 먼저 어머니의 태에 잉태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셨습니다.“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어째서 그렇게 하셨나요? 그렇게 하셔야 원죄(原罪)가 없습니다. 원죄는 아담이 지은 죄인데, 그 죄가 아담의 모든 자손들이 태어날 때부터 미치었습니다. 그래서 누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것이 원죄입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셨기에 나면서도 죄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죄가 없어서 예수님께서 원죄 없으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으로 잉태되시어 원죄가 없으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셨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예수님의 죽으심은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원죄가 없었고, 또 사시면서 한 반도 죄를 지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를 이루였습니다.스스로 절대적인 의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그 의인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였는데, 우리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분명 죄 때문이었습니다.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원죄도 없으시고, 스스로 지으신 죄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으심은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그러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의 죄 때문입니다.“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그래서 죄가 많은 우리도 예수님이 대신 피 흘려 죽으신 공력 때문에 우리 죄 모두가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곧 마치 우리 자신이 완전하게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어 한 번도 죄를 지은 것이 없는 사람 같이 하나님께서 여겨 주신다 함입니다.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은 예수님의 것인 양 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고, 예수님의 것은 우리의 것인양 하시어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힘입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영원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상속자들이 되었습니다.“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3)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혀 있던 장벽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었던 높고 큰 장벽은 죄였는데, 그 죄가 예수님 안에서 처리되었으니,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다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이전에는 아무나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쳐져 있어 아무도 휘장을 열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씩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에 그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이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뚫린 것입니다.“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2)그러므로 이제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원수관계가 아니라 화평한 관계입니다. 예수님 밖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냥 임하시면 우리는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생명의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담대하게 나오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 안에서 계시는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임마누엘의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 주님의 별명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은혜 받는다.’함은 바로 그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영광’의 은택 속에 거한다 함입니다.2. 우리 주님의 성탄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도, 그 사랑은 그저 마음의 정서만을 건드리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사실적이고 실제적인 영원한 영광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실적입니다. 기독교는 그저 우리 심리적으로 마음에 평안을 끼치고 정서의 느낌만을 주는 차원정도가 아닙니다. 마음의 평안과 기쁨의 정서가 깊이 자리잡고 있으려면, 단순한 감정의 일렁거림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세상의 문학작품들을 보면 사람의 정서와 느낌과 감정의 문제로 채색하여 놓았습니다. 세상의 시인들의 명시들을 보면 그 속에 인간의 여러 희노애락과 그에 따른 정서와 느낌을 말로 표현하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적으로 따져 보면 인간의 진정한 문제를 알지 못하고, 또 해법도 없습니다.어느 시인의 ‘푸르른 날’이란 시를 보았습니다.‘눈이 부시게 푸르는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땅과 계절과 환경과 그 속에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아름답게 채색된 시입니다. 한 폭의 그림과 같습니다.이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그리움의 정서가 속 깊이 배어 있는 시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땅에 사는 인생들 사이의 그리움이 아름다우나 덧없고 슬프고 절망적입니다. 그 인생의 허무가 배어 있습니다. 모든 날이 다 가고 황혼의 쓸쓸함과 죽음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미리 내다 보면서 슬퍼지는데, 그 애조를 현재 ‘푸르른 날’봄과 여름과 같은 날들 동안에 서로 그리워하는 사랑으로 매메우자는 시인의 문학적인 제안입니다.그러나 그 땅을 주시고 그 땅에 아름다운 계절을 주시고,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아름답게 하시고, 죄로 인해 죽게 되어 있는 인생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주신 임마누엘 우리의 하나님은 없습니다. 성경은 놀라운 뜻을 가지고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습니다.사실적으로 우리와 창조주 하나님 사이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 지금과 앞으로와 영원한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대처하게 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우리 주님의 성탄의 참된 의미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어 ‘지금부터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그래서 시 23편에서 다윗은 3천년 전에 시로서 그 임마누엘의 영광 안에 거하는 자신의 행복을 노래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시도 이 시를 능가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참된 소망과 확신과 담대함과 기쁨의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발견합니다.“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우리 주님 예수 임마누엘의 은택과 영광의 진리를 중심에 둔 신소망에 찬 신앙고백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임마누엘의 복의 말씀을 듣고도 답답하고 아무 감흥이 없는 이는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자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입니다.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으로 나아갈수록 우리와 하나님의 친밀함에 초점이 더해지고 있습니다.“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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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여성 목사후보생, 강도사고시 시행 철회(예장합동)(리폼드뉴스) 조직신학으로 유명한 루이스 벌코프가 교수로 있던 미국의 칼빈신학교의 교단인 북미기독교개혁교회(CRC) 총회가 2007년 교회 직분을 남자로 제한한 헌법 규정에서 남자를 삭제했다. 여성에게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을 금하는 규정으로 남아있던 법적 근거를 최종 제거한 것이다. 이에 앞서 1995년 CRC가 여성안수를 허용하는 여지를 마련하자 보수적인 정통장로교회(OPC)와 미국장로교회(PCA)는 이 교단과의 교류를 단절한다고 선언했고, 북미지역 보수정통 개혁주의 교회를 표방하는 북미개혁‧장로교회연합(NAPARC)은 이 교단의 회원 자격을 박탈했다. 그리고 이 교단의 적지 않은 교인들이 교단의 여성안수 허용 정책에 반발해 다른 교단으로 적으로 옮겼다. 2017년 6월 네덜란드 개혁교회 해방파(과거 스킬더 박사와 그의 지지자들이 네덜란드 개혁교회교단에서 추방되어 세운 31조파로 우리나라의 고신교단과 자매관계를 맺고 있다)가 목사, 장로에 대한 여성 임직을 결정했다. 이에 동년 7월 ICRC 총회는 해방파의 회원권을 정지했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남침례교 소속 새들백교회 릭 워렌 목사가 여성 안수와 여자목사를 세운 것에 대해 남침례교단은 지난 2월 릭 워렌 목사를 제명했다. 이에 대해 릭 워렌 목사는 항소를 했으나 지난 6월 19일 뉴올리언스에서 개회한 2023년 남침례교(SBC) 연례회의에서 거부당했다. 이 결정들을 보면서 과연 우리 교단은 어떤 결정을 할 것인가 두려운 마음으로 총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107회기 여성사역자지위향상및사역개뱔위원회 임원들 - 이들은 누구인가를 기억하자. 이런 안을 제108회 총회에 내놓은 위원들은 본 교단 목사인가? 총회의 결정 드디어 역사적으로 기념이 될 제108회 총회가 대전 새로남교회(담임: 오정호 목사)에서 개회되었다. 전국교회는 108회 총회를 위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다. 그런데 둘째날 오후 회무에서 여성사역자지위향상 및 사역개발위원회는 위원회의 상설위원회 변경과 목사후보생 고시 및 강도사 고시 응시 자격 허락을 청원하였다. 위원회 서기 유홍선 목사는 “여성 준목 제도 활성화를 위해서는 여성 안수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여성사역자들이 준목 제도에 준하는 위치까지 올라가기 위해 안수를 하지 않아도 올라갈 수 있는 직위까지 올려서 여성사역자들의 인적 유출을 막고, 당회가 관리하던 여성사역자가 노회가 관리할 수 있도록 목사후보생 고시 및 강도사고시 응시 자격까지는 허락해 달라”고 하였다. 총회장 오정호 목사는 “강도사는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격”이라며 여성 강도사 자격 허락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여성 목사후보생 고시 및 강도사 고시 응시 자격을 주는 것으로 통과되었다. 지난해 10월 13일 총신대 신대원은 경건훈련원 주관으로 호스피스 전문 강사를 초청해 세미나를 열었는데, 세미나를 마치면서 여성인 K목사가 축도를 한 것이 논란이 되었다. 결국 총신대 신대원에서는 징계위원회까지 구성됐다. 지난 6월 23일 오전 11시 예장합동총회회관에서 여성사역자지위향상 및 사역개발위원회가 주최한 여성사역자 지위 향상을 위한 공청회에서 이광우 목사는 예수님이 12사도를 남성으로 세운 이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 성경에서 나온 “형제들아”등 여성안수 논쟁에 있는 성경구절들을 설명하면서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또한 “교단이 여성안수를 정말로 반대한다면 총신대 재단이사회 여성이사 3명에 대한 정관 개정, 여전도사를 없애는 등 일관성 있는 실천적 행동을 해야한다”며 여성안수를 주장했다. 제107회 총회 여성사역자지위향상 및 사역개발위원회는 “지난 2023년 5월 8일부터 6월 22일까지 목장기도회 및 총신신대원 홈커밍 행사 때 참여한 목사 및 장로 205명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에 의하면 여성 안수를 시행하는 것에 있어 찬성 73.6% 반대 24.3%로 나타났다.”고 했다. 108회 총회에서 여성 목사후보생 및 강도사 고시 시행이 통과되자 전주 예수비전교회 이국진 목사 자신의 SNS에 “합동교단에서 여성 강도사가 되는 길이 열렸다.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은 없었다고 한다.”며 “강도할 수 있다면, 이제 목사로 임직하는 길이 멀지 않아 보인다.” 환영의 뜻을 밝혔다. 총회 결정에 대한 충격 그러나 고신측 이광호 목사는 21일 자신의 SNS에 “시대적 풍조, 교회를 이겼다”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여성 강도사 허락한 한국 최대 교단 합동측 보수교단 개혁주의 신학 앞세운 교단 아니던가. 여성목사 제도 수용 위한 '멋진 길' 깔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어서 “통합, 기장측 오래전 수용한 여성목사 제도, 이럴 거면 그때 왜 극심한 비판 가했는가. 저들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 동반돼야 한다.”고 했다. 기독신문에는 비판의 댓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여성 안수의 수순이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잘도 그러겠습니다.” “108회 총회를 기점으로 이전을 (구)총신 108회 이후를 (현)총신이라 부른다. (구)총신을 개혁주의라 부르며 (현)총신을 복음주의라 칭한다.” “준목에 한하는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해 목사 후보생 고시 및 강도사 시험권을 부여한 일은 통탄할 일이다.” “총회는 바라는대로 여성 안수를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준하는 신학적 오류를 범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적이지는 않았으나 더 이상 개혁주의적이지도 않기에 복음주의 교단이라 칭한다.” “이제 개혁신학의 바른 신학을 아는 남성들은 신대원에 목회자 M.Div를 지원하지 않거나 교단을 떠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총회가 좌경화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왜 백석, 통합이나 자유주의 교단을 따라하는가? 교단에서 여성 사역자가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 두려운 일인가? 아니면 신학을 무시한 채 하나님 말씀에 등을 돌리는 것이 더 두려운 일 아닌가?” “준목에 해당하는 지위 향상은 “목사는 아니지만 목사처럼 대우하겠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목사는 아니지만(신학에 있어서 안수를 할 수는 없지만) 목사처럼 대우하고 싶다.(그런 처우 개선을 하겠다.) 하지만 모든 죄악은 미묘하고도 교묘한 틈에서 시작되었다. 안수를 허락하는 발판은 아니라지만, 목사의 직위를 바라 볼 수 있는 기회를.” 교단의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다. 지금까지 우리 교단이 믿고 지켜온 성경과 개혁신학이 틀렸다는 말인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시대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면 진리가 아닌 것이다. 재론동의를 발의하는 임종구 목사 총회의 재론 그런데 총회 마지막 날(21일) 신학부 임종구 목사는 "신학부, 여성사역향상위원회, 규칙부, 헌법개정위원회, 총회 임원회등이 모여 회의를 하였다. 여성 안수는 성경과 신학, 헌법에 불가한 것이며, 강도사 고시는 목사가 되는길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가지고 심도 있게 토의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여성사역자 지위향상이라고 하면 계급구조에서 하급이라고 여길 오해가 있어 수정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했다. 임 목사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을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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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법연구소 설립 15주년 기념 통권 제25호 발간© 리폼드뉴스 © 리폼드뉴스 교회나 본 교단(예장합동)에 이상한 법들이 많이 있는데 소위 ‘뗏법’이라는 것이 있다. ‘법 적용을 무시하고 생떼를 쓰는 억지 주장’,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불법시위를 하는 행위’,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떠밀려 만든 뗏법’, ‘법치 원칙에서 벗어난 포퓰리즘(대중 영합주의)으로 총회 결의를 법률로 포장한 뗏법들,’ ‘떼로 몰려다니며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법치를 무시한 뗏법’, ‘총회에서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떠밀려 만든 뗏법’ 등의 신조어 냈다. 이러한 뗏법들은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교단 헌법>에 의한 사법 체계와 그 해석과 적용, 적법 절차가 무시되니 이해당사들과 이들로부터 조종을 받은 관계자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 낸다. 때로는 이러한 뗏법들은 100년 동안 교단총회의 역사성, 정통성, 법통성에 대한 정체성이 모호한 자들이 자신들의 법적 지식의 수준을 총회 전체에 일반화시키려는 과도한 열심이 만들어 낸 법치와 사법 체계의 파괴 행위들이 혼란을 초래했다. 그동안 15년 동안 교회 준법정신의 함양을 위해 연구와 세미나 등 다양한 사역을 진행해 왔다. 그 결과물이 축적되면서 교회와 노회, 총회 분쟁을 예방하는 데 일조해 왔다. 법은 언제나 좋지 못한 상황에서 제기된다. 그러나 좋은 상황에서 원칙과 법의 정신을 교회 현장에 적용하여 교권의 남용, 불법행위를 막을 수만 있다면 이는 건강한 교회로 가기 위한 지름길일 것이다. 많은 교회가 분쟁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자신들의 주장을 절대화하면서 소통과 화합을 불가능하게 한다. 소통과 대화의 길이 차단된다면 이러한 불통은 교회의 분쟁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이제 법은 소통을 원한다. 목회자의 독점(독재)과 장로의 월권은 교인들을 피곤하게 한다. 이러한 불행한 일들만큼은 없도록 해야 한다. 목차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담임목사 지위와 대표권 - 대상교회 : 천안중부교회를 중심으로 - □ 변화산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 막 9:1-8절을 중심으로 - □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08회 총회 □ 총회 사회소송대응시행세착 개정 필요성 □ 제107회 총회 충남노회 폐쇄와 신설노회 □ [서평] 구속역사적 성경연구 모세오경 통권 제25호 전문 파일 열람 바로가기 교회법 통권25호.hwp (churchla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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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김희석 교수, 언약신학으로 본 구약의 하나님의 나라 '어떤 책인가?'구약성경을 고대 근동 지방의 여러 문헌 중의 하나로 간주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지 않고 신앙 고백적 문서로 보는 비평주의 관점이 있다. 구약성경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점진적 통일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은 계시와 역사를 일치하는 것으로 신학적 입장을 갖고 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하셨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역사는 중심적인 의미를 지니며, 일관된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입장이다. 원저자인 하나님께서 성경의 인간 저자에게 역사의 사건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게 하였고, 기록하게 하였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게할더스 보수 박사의 지적대로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점진적 과정”을 다루는 학문으로 성경 기록 배후에 특별한 하나님의 의도를 갖고 유기적인 발전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계시의 점진적 발전과 계시 이해의 점진적 발전은 구분하지만, 계시 이해의 발전은 2천 년 동안 많은 논쟁과 이단의 출현에 대응했고 더불어 체계화되고 발전된 이해를 가져왔다. 조직신학은 성경 진리를 체계화하여 논리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주도하에 점진적으로 창조 때부터 종말까지 발전해 가는 계시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이해한다. 조직신학은 성경 신학과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목회자는 이 두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 설교자로 사역을 감당하기 힘들다. 총신대 김희석 교수 © 리폼드뉴스 성경의 역사적 계시의 현장에 나타난 계시의 풍성한 관점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일은 성경 진리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측면을 강조한 조직신학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미국남장로회에서 파송한 이눌서 선교사는 호남지역에서 사역과 성경 번역, 그리고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사역하면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초석을 놓을 때 그는 “기독교가 성경을 버리거나 믿지 아니하면 그때로부터 기독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성경적 선언은 한국장로회가 바로 신적 계시인 성경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함과 동시에 그 성경이 아니면 삼위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기독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음을 천명한 준엄한 선언이었다. 이러한 성경적 진리를 체계화하고 조직화하는 조직신학과 성경의 역사 안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해 가는 계시와 그 계시에 근거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으로 연구하는 성경 신학은 한국교회의 역사와 더불어 치열하게 교회를 지키고 봉사하는 데 유익하게 사용되었다. 이러한 신학을 지켜내기 위해 한국교회 보수신학은 시대마다 치열한 논쟁과 변증적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 왔다. 이러한 진리 투쟁은 과격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는 복음의 변증을 위해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또한 장로교회의 분열은 이러한 결과의 열매이기도 했다. 이에 반한 교권 투쟁의 결과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은 바로 신학을 빙자한 교권 투쟁 역시 외면할 수 없는 분열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학문이란 언제나 연구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어떠한 방법론으로 연구할 것인지를 묻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구약성경에 대한 구약신학의 연구방법론은 학자들의 수만큼 연구방법론이 다양했다. 구약의 본문을 오늘날 교회의 문맥에서 읽어내야 하고 리딩하기 위해 그 방법론은 결국 성경의 원저자인 하나님이 인간 저자를 통해 특별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기록했다는 사실을 전재해야 한다. 성경 해석을 통해성경 근저에 흐르는 통일성과 다양성을 밝혀내기 위한 연구 결과물들은 오늘의 한국교회와 특히 본 교단(예장합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통해 많은 연구 결과물들이 확충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이러한 총신대학교의 교수들보다 정치권의 목회자들이 교수들을 지도하며 신학을 이끌고 가려는 세력들이 등장했다. 그래서 전문 연구 영역에서 기나긴 인고의 세월 동안 연구하고 그 결과물을 내놓아도 시장에서 피리를 붙어도 반응하지 않는 교단총회의 목회자들이었다. 교수들의 연구 결과물을 전국 교회가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무지했고 알려고 하지도, 응용하고 사용하려고 하는 마음도 없었다. 교수의 연구 따로 목회자의 목회 따로가 가져온 교회 현장 신학의 빈곤은 신앙의 빈곤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그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많은 교수에게서 배운 것은 신학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이를 통해 목회 현장에서 교인들을 만나게 된다는 점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 이는 책상 앞에서, 저술한 책에서, 지식적인 머리 만으로가 아닌 뜨거운 가슴을 안고 이 시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했다. 필자는 지난 총신대학교 총장 후보 3인 결정을 할 당시 취재차 총신대학교를 방문했다. 일찍 도착한 관계로 그동안 구입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김희석 교수의 『언약신학으로 본 구약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책을 구입했다. 현재 총신대학교에는 필자가 배운 스승은 거의 다 은퇴했다. 필자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교수는 모두 은퇴했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 모양이다. 이제 교수들이 동기이거나 후배들이다. 유재원 교수, 김의원 교수, 김정우 교수 등의 구약 성경신학자들에게서 배운 성경 이해를 위한 강의는 늘 도전이었다. 그리고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성경적 관점을 정립하는 데 좋은 계기였다. 풍성한 계시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통해 연구한 교수들의 연구 작품들은 풍성한 진리의 세계를 넘나들게 하는 것은 필자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특히 오랜만에 구약 성경신학에 대한 번역서가 아닌 현직 총신대학교 교수에 의해 집필된 본서는 총회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이어갈 총회의 많은 젊은 목회자들에게 풍성한 계시의 세계를 넘나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책을 구입해 온 날 밤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본서는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록 2편으로 되어 있다. 1-3장은 책의 전체 논지를 이끌어가기 위한 서론적인 전제로 구약신학이란 무엇인?(1장) 구약신학의 방법론(2장), 구원계시의 점진적 발전(3장)으로 구성되었다. 창세기의 ‘원복음’(5장)을 시작으로 무지개 언약으로 일컬어지는 ‘노아 언약’(6장), 아브라함 언약(7장), 창세기를 넘어 ‘출애굽기에 나타난 모세 언약’(8장), ‘신명기에 나타난 모세 언약’(9장), 이어서 ‘다윗 언약’으로 ‘사무엘서 맥락으로 이해한 다윗 언약’ , 마지막으로 ‘새 언약’인 예레미야서 언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학자가 구약을 여러 가지 개념과 관점으로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아이흐로트는 ’언약개념‘이 구약의 중심 개념으로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온 이후 많은 학자가 언약, 하나님의 통치인 하나님의 나라, 구속 등의 개념으로 설명해 왔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은 곧 구약신학이 얼마나 다양성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그러한 다양성은 단일성을 추구하여 종합적인 열매를 맺게 한다. 김희석 교수는 제1장에서 구약신학을 정의하면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관계를 전개한다. 애초에 신학이라는 학문 분야에서 성경신학이라는 분과가 따라 존재하지 않았다고 언급한 김 교수는 성경신학이 조직신학에서 나온 기점을 가블러(J.P.Gabler)라는 인물로부터 출발한다. 그 출발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분리시켜 성경신학을 하나의 독립된 분과로 인정해 주자는 1787년 아트도르프 대학의 총장 취임의 연설로부터 시작으로 보고 가블리를 ‘성경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고 한다. 김희석 교수는 성경신학 전공자로서 “성경신학을 할 때, 즉 본문을 연구할 때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직신학의 체계를 경계로 하여 그 안에서 연구를 해야 한다”는 논지를 펼친다. 그는 자신의 신학 연구 경험으로 “성경신학의 연구 결과물들은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적용해 왔다”고 말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보다 싶은 이해와 통찰을 가져다 주었다”라고 말한다. 제2장에서는 구약신학의 방법론으로 크게 세 축이 있는데 첫 번째 축은 ‘역사’이며, 두 번째 축은 ‘본문’, 세 번째 축은 ‘독자’라고 말하면서 이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는 잠언을 연구한 결과 잠언에 “음녀를 멀리하고 지혜를 취하라”라는 본문에서 “포스트 콜로니얼한 학자들은 여성주의 시각을 들여와서, 본문의 의도가 아닌 독자의 의도를 가지고 본문을 해석하려고 한다”라고 지적한다. 이런 형식의 본문 이해가 한국교회에 침투하여 왜곡되게 적용되어 신앙의 본질이 흐려진 경우들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김희석 교수는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저자의 의도가 본문의 의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해석의 궁극적 목표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보수주의 구약신학의 역사는 구약신학, 진보 신학과의 논쟁을 통해서 발전해왔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포지션이고, 가블러 이후로 보수주의 구약신학이 걸어온 발자취이다.”라고 말한다. 본서는 목회들이 한 번쯤 자신의 사역을 반성하고 충전하기 위해 쉬어가면서 본서를 한번 정독한다면 교회에서 풍성한 설교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며, 도전이 되리라 생각된다. 소재열 목사(말씀사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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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대통령 대선공약인 청년도약계좌 6월 15일 출시… 5년간 5000만 원 목돈 마련▲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12일 오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개최한 청년도약계좌 협약식 및 간담회 이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금융위원회) 5년간 최대 5,000만원을 모을 수 있는 정책 금융상품인 ‘청년도약계좌’가 15일 출시된다. 만 19-34세 청년들이 매월 70만원 한도내에서 자유롭게 납입 할 수 있다. 금융위원회는 12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청년도약계좌 취급 12개 은행과 서민금융진흥원 간 청년도약계좌 출시 및 운영을 위한 협약식을 개최했다. 청년도약계좌는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공약에서 청년층에게 자산 형성 기회를 만들어주겠다며 도입을 약속한 정책형 금융상품이다. 청년이 매월 70만원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납입 할 시 5년 만기를 유지한다면 5000만원 안팎의 목돈을 만들 수 있다. 개인 소득 수준 및 본인이 납입한 금액에 따라 정부가 기여금을 매칭 지원하며, 이자소득세 비과세 혜택을 제공한다. 정부의 월 최대 지원금은 2만 4000원이다. ▲ 출처: 금융위원회 청년도약계좌는 만기 5년 상품으로, 가입 후 3년은 고정금리, 이후 2년은 변동금리가 적용된다. 변동금리는 해당 시점의 기준금리와 고정금리 기간 중 적용됐던 가산금리를 합해 설정된다. 총 급여 기준 개인소득이 2400만원 이하인 경우 저소득층 우대금리가 부여된다. 청년도약계좌 가입 대상은 만 19∼34세 청년 중 개인소득 요건과 가구소득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청년이다. 병역을 이행한 경우 병역이행기간(최대 6년)은 연령 계산시 산입하지 않는다. 개인소득의 경우 상한선이 7500만원이다. 직전 과세기간(2022년도)의 총급여가 6000만원 이하의 경우 정부기여금을 받고 비과세를 적용받을 수 있다. 총급여가 6000만을 초과하고 7500만원 이하인 경우 정부기여금은 지급되지 않지만, 비과세를 적용받는다. 가구소득은 가입자 본인을 포함한 가구원(주민등록등본에 기재된 배우자, 부모, 자녀, 미성년 형제·자매) 소득의 합이 중위소득의 180% 이하여야 한다. 금융위는 청년층이 만기까지 계좌 유지 할 수 있도록 적금담보부대출을 운영하고, 햇살론 유스 대출 시 우대금리를 지원하는 방안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중도에 해지하면 정부기여금과 비과세 혜택을 제공하지 않지만, 재가입은 허용한다. 특별중도해지(가입자의 사망·해외이주, 퇴직 등) 시에는 본인 납입금 외 정부기여금을 지급한다. 가입을 원하는 청년은 농협·신한은행 등 취급은행의 앱을 통해 영업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신청하면 된다. SC제일은행은 내년 1월부터 운영을 시작한다. 이달 가입신청 기간은 15일부터 23일까지다. 15∼21일에는 출생 연도를 기준으로 5부제에 따라 신청할 수 있고, 22일과 23일에는 출생 연도와 상관없이 신청하면 된다. 7월부터는 매월 2주간 가입신청 기간을 운영할 예정이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협약식 축사를 통해 “은행들이 청년들에게 안정적인 자산형성을 지원하는 것은 가장 의미 있는 사회공헌 중 하나”라며 청년도약계좌의 안착을 위한 은행장들의 관심과 노력을 당부했다. <문답으로 풀어보는 청년도약계좌 궁금증> Q. 개인소득이 없는 청년도 가입할 수 있는지? A. 국세청에서 소득금액 증명이 가능한 경우에만 가입할 수 있다. 소득이 없거나 국세청을 통한 소득금액 증명이 불가능하면 가입할 수 없다. Q. 가입요건을 충족하는 청년 부부인데 부부가 각각 가입할 수 있나? A. 개인이 가입요건을 충족하면 가구당 계좌개설의 제한은 없다. Q. 직종이나 근무 회사 규모 등에 따른 가입 제한은? A. 청년도약계좌의 가입가능 여부는 연령, 개인소득 및 가구소득 등으로 판단하며, 직종, 근무회사의 규모 등은 상관 없다. Q. 연중 계속 가입신청을 받는 것인지? A. 6월부터 매월 가입신청을 추진할 예정이다. Q. 가입신청후 심사 절차와 준비서류는? A. 가구소득 확인은 가입 신청자의 주민등록등본을 기준으로 가구원을 판단한 이후 가구원의 소득조회 동의를 거쳐 이뤄진다. 다만, 가구소득 확인 과정에서 추가 서류가 필요할 수 있다. Q. 2021년 개인소득은 없지만 2022년 개인소득이 발생해서 가입 대상인 것 같은데 가입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A. 직전년도(22년도) 과세기간의 소득이 확정되기 이전에는 개인소득 요건은 전전년도(21년도) 과세기간 소득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2022년부터 개인소득이 발생한 가입 희망자는 직전년도 과세기간의 소득이 확정된 이후에 가입할 수 있다. Q. 직전년도 소득이 확정되기 전에 전전년도 소득기준으로 가입했는데 이후 확정된 직전년도 소득이 개인소득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 A. 가입은 유지되고, 만기까지 납입하면 정부기여금도 지급된다. 다만, 현행 조세특례제한법에 따라 이자소득 비과세는 지원받을 수 없다. Q. 2022년도 개인소득은 있지만 현재 개인소득이 없다면 가입할 수 없는지? 납입 중에 직장을 그만둔 경우는 가입이 취소되나? A. 현재 소득이 없더라도 직전년도 과세기간 소득이 확인되면 가입할 수 있다. 가입 후 납입 중이라면 중도에 소득이 없어지더라도 가입이 취소되지 않고 만기까지 납입할 수 있다. Q. 가입 후 소득이 증가하면 가입이 취소되는지? A. 가입 이후의 소득 증가는 가입자격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Q. 가구원은 어떻게 판단하는지? A. 가구원은 원칙적으로 가입 신청자의 주민등록등본에 기재된 배우자, 부모, 자녀, 미성년 형제·자매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다만, 가족 중 관계단절자, 실종자, 거주불명자가 있으면 추가 증빙서류 제출 등을 통해 예외적으로 가구원에서 제외할 수 있다. Q. 매월 무조건 70만원을 납부해야 하는지? A. 청년도약계좌는 자유적립식 상품이므로, 가입자는 최대 납입 한도인 월 70만원 내에서 자유롭게 납입할 수 있다. Q. 만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해지하면 어떻게 되나? A. 해지사유가 특별중도해시 요건(가입자의 사망·해외이주, 퇴직, 사업장 폐업, 생애최초 주택구입 등)에 해당하면 정부기여금이 지급되며 이자소득에 대한 비과세도 적용받을 수 있다. 다만, 일반적인 중도해지 시 정부기여금이 지급되지 않고 이자소득에 대한 비과세도 적용받을 수 없다. Q. 변동금리 구조는 어떻게 되는지? A. 가입후 3년은 고정금리, 이후 2년은 변동금리가 적용된다. 2년 변동금리는 해당시점의 기준금리와 고정금리 기간 중 적용됐던 가산금리를 합해 설정될 예정이다. Q. 정부 기여금에 대해서도 이자가 발생하나? A. 가입자 본인이 납입한 금액에는 청년도약계좌의 기본금리와 우대금리가 적용된다. 정부기여금에는 청년도약계좌의 기본금리가 적용된다. 정부기여금에 발생한 이자소득에도 비과세가 적용된다. Q. 외국인도 가입할 수 있는지? A. 외국인 가입자는 정부기여금 지급 없이 이자소득에 대한 비과세만 적용된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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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목사 구속사 설교 해설 5] 삼위일체론적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사적 설교 개념©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 삼위일체 신앙을 믿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미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삼위일론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이해와 설교가 필요하다. 필자는 앞으로 네덜란드에서 논의되었던 구속사 설교와 모범론적 설교에 관해 확인하면서 양자 논쟁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한국에서 제기된 구속사 설교는 네덜란드에서 제기된 구속사 설교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구속사적 설교를 기준으로 평가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단지 네덜란드에서 제기된 구속사 설교는 단순히 모범적 적용을 반대하는 형식으로만 알려지는 경우가 많다. 구약성경 모든 본문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를 해야 한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 기독교는 구원의 유일한 길로로서 그리스도만을 믿는 종교라면 가능하다. 이때 그리스도만을 강조하는 것은 옳은 견해이다. 그러나 성경의 독특한 신지식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외면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강조해야 한다면 이는 성경의 원리를 반영하지 못한 결과임이 틀림없다. 이는 구속사 설교의 한계이다. 하나님, 성령을 말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강조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라고 주장한 구속사 설교의 주장은 성경을 오해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모든 종교는 초월한 신(神)을 믿는다. 구원이 발생하려면 초월하신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하는 신을 믿어야 구원이 발생한다. 독일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초월 세계와 현상세계로 구분하며 초월한 신을 현상계에서 신을 안다고 할 때 그 신은 이미 신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계시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기독교는 초월해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으로 말씀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통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와 성육신 교리를 중요한 기둥으로 삼는다. 이 두 교리를 인정할 때, 이신득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가 형성된다. 이 세 교리를 지탱하게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려고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도에 관한 말씀을 가르치고 확실하게 이해하게 하는 일을 한다. 성령 오심의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증거이다(행 1:8).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로 세우셨다. ▲ ©리폼드뉴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임재하신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 충만한 성령의 임재는 성령의 지배를 의미한다. 유대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믿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는 하나님이여야 구원이 임한다고 말씀한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설교학 교수인 김창훈 교수는 “극단적인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서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삼위일체론’ 교리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 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주제인 창조, 타락, 구원의 전 과정에서 서로 구분되지만, 본질은 동일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동등하게 강조되어야 하고, 기독교 신앙과 복음도 삼위 하나님 관점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한다.”라고 했다(김창훈, 『삼위 하나님 중심 설교). 원리를 적용하여 설명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총신대 신학대학원 설교학 김대혁 교수 역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믿어야 할 구속사 이야기의 전반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것과 더불어, 그 구속의 이야기 속에서 성도가 본문 세계가 요구하는 것을 살아내어야 하는 인생 이야기를 함께 담아내도록 하는데 충실한 설교 방법론이어야 한다.”라고 한다(김대혁, “본문성이 드러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한 제안”, 『복음과 실천신학』). 전 총신대 신학대학원 설교학 교수인 류응렬 교수는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장대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구속사적 설교의 한 방법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말하는 설교 철학이라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류응렬, “구속사적 설교” 「신학지남」). 류응렬 목사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을 본문에 적용하여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리 적용과 해석(설명)을 구분하고 있다. 구약의 역사적 본문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 중심의 삼위일체론적인 하남의 구원에 대한 선포가 구속사 설교에서 복음 선포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신구약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적용된 논지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속사 적 설교는 해석이 아닌 적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앞으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확인해 보고자 한다. 구속사적 설교에서 이 부분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삼위일체론적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사 설교의 원리를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에 어떻게 적용하여 설교(설명)할 것인가가 필자의 주장에 대한 논지이다. 이런 개념은 구속사적 설교는 본문 해석이 아닌 설명을 위한 적용적 원리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설교자가 강단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신앙강좌 형식으로 행한 설교는 풍성한 하나님의 계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없다. 설교롤 신앙고백적 지식이나 적용 일변도의 설교로는 한계가 있다. 이를 설교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설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신앙강좌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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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목사 구속사 설교 해결 4] 한국교회에서 구속사 설교 연혁©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에서 1985년 1월에 김영구 목사에 의해 일반대학교원 석사학위 논문이 발표되었다. 논문 제목은 “구속사적 설교론”이었다. 부제목으로 “Greidanus 와 Clowney의 이론을 중심으로”였다. 이 논문에 대한 지도는 정성구 교수였다. 1985년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득원의 “구속사적 해석 원리에 관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정성구 교수는 제자의 구속사 설교 논문을 마친 이후 1987년 「신학지남」(제54권 4집)에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와 방법”의 논문을 발표했다. 총신대학교에서 김영구 목사의 논문이 발표된 해의 봄에 신성종 교수는 “해석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 강단의 문제점”(「신학지남」(제52권 1집)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모두 다 그레다이누스의 박사학위 논문에 근거했다. 구속사 설교 논쟁의 한 중앙에서 이를 변호했던 네덜란드 (작은) 캄펜신학교의 구속사를 옹호했던 고재수(N.H.Gootjes) 교수가 부산 고신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면서(1980~1989년) 1987년에 「구속사적 설교의 실재」(CLC)를 출판했다. ▲ ©리폼드뉴스 필자는 1986년 2학기에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Th.M)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류호준 교수(백석대학교 구약교수로 은퇴)로부터 “구약사”에 대한 한 한기 강의를 들었다. 이 강의는 철저히 원고에 의한 강의였다. 여기서 필자는 많은 도전을 받았으며, 구약성경에 관한 성경관을 학문적으로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강의는 총 9강으로 진행되었는데 미국 칼빈신학교를 졸업하고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1970년에 실천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시드니 그레이다누스(Sidney Greidanus)의 “Sola Scriptura: Problems and principles in preaching historical texts”(오직 성경: 역사적 본문에 대한 설교의 문제점과 원리들)의 논문을 소개하기도 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필자는 1987년 신학교 때에 “에스더서와 구속사와의 관계성”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칼빈」(1987, 제5집). 부산 고신대학교 교수인 고재수 교수를 서울로 초빙하여 강의를 듣기도 했다. 필자는 1989년에 총신신대원 재학시 “구속사적 성경이해와 설교 이해에 대한 논문 및 자료 모음집”을 편집했다. 당시 한국교회 최초로 발표된 구속사적 설교와 관련된 학위 논문들을 모은 자료집이었다. 이 자료는 구속사 설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필자가 1989년 5월 보급한 구속사 설교 자료집 © 리폼드뉴스 정성구 교수는 1987년에 구속사 설교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이후 자신의 설교학의 방향을 결정하기도 했으며, 당시 총대학교 신대원의 설교학은 구속사적 설교였다. 박희천 교수의 설교학은 구속사적 설교는 아니었다. 두 교수의 총신에서 설교학은 목회자들에게 그대로 투영되었다. 구속사 설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는 구속사 설교의 열풍이 불었다. 1980년대 후반 한국교회의 성장 이면에 원초적인 문제인 성경해석에 의한 설교에 관한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주로 주제설교와 모범적 설교에 한계를 느낀 많은 목회자들이 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구약성경을 설교할 때 역사적 본문들을 단순히 하나의 모범적으로 사용할 때가 많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을 예로 들면서 우리도 이를 본받자는 설교를 아무런 비판없이 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계시의 역사성을 완전히 배재 해 버린 것으로 성경의 가록목적이 아니라는 논리가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 언급한 그레이다누스의 박사학위 논문이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1989년)가 출판되었다. 초판에는 번역본에 자신의 구속사적 설교에 대한 학설을 서론에 첨부하였으나 나중에 이 부분이 삭제되었다. 구속사에 대한 붐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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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목사 구속사 설교 해설 3] 기독교(그리스도교)의 성경 이해와 설교성경을 어떻게 이해하여 설교할 것인가? 설교는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넘어야 할 태산과 같은 고지이다. 설교는 성경을 그 원천으로 하여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는가? 우리는 성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으면서 그분을 경외하며 숭배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성경에 대한 하나님에 관한 이해와 믿음이 모호하면 신앙생활 자체도 모호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하나님 계시의 말씀으로 믿고 그 성경 계시를 통해 하나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오늘날 설교와 신앙생활의 전 영역에서 너무나도 소중하다. 우리 교회를 기독교(그리스도교)라고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구원을 말할 때 죄로부터 구원을 말한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만큼은 그냥 용서해 주시는 일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훼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에게 임하여야 영생과 구원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영생과 구원을 받는 방법은 인간 땅에는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구원이 임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기독교)라고 한다. 최근에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라는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도서출판 다함). 이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와 성경 읽기의 원리의 실제를 부제목으로 했다. 우리는 여기서 심각하게 질문해야 하는 것은 왜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변이 없는 한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또 다른 시행착오를 범할 것이다. 그리스도만을 강조한다는 것은 모든 성경을 다 말한 것은 아니다. 클라우니는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회당에서의 설교와 달리 구속의 드라마 전체를 고려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을 그리스도와 연관지어 보는 것은 그것을 더 큰 문맥, 즉 계시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목적의 맥락에서 본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중심을 오해하는 경우에 대해서 “그렇다고 본문이 주는 특정 메시지를 무시하거나, 만능으로 써먹을 수 있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마무리를 써 놓고 매주 필요할 때 골라가며 쓰라는 말은 아니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구약에 계시된 살아계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확실히 성육신 사건은 아직 그림자 속에 있던 구약의 가르침에 빛을 비추어 주었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구속사는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에 따라 세워졌다”라고 했다. 특히 “구속사의 각 시대들은 삼위일체 제2위 격의 주되심을 보여준다. 구속사 속 모든 시대의 정점은 주의 오심이다”라고 한다. 그는 구약성경을 구속과 계시의 역사를 통해 성취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여 오늘날 설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해석에 있어서 도덕주의로는 성경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라고 말하므로 성경에 대한 적용 적 설명을 도적주의로 적용하여 설명하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모범적 적용과는 다른 개념이다. 클라우니는 전형적인 구속사 설교에서 “구속 역사는 언제나 계시 역사와 함께한다.”, “구속사와 계의 역사가 전개되면서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과 행적이 함께 엮인다.”, “구약은 인간 역사와 구속사를 위한 하나의 위대한 계획을 따라간다. 이 계획은 구분으로부터 시작될 뿐이니라 성육신하신 아들 가운데 드러난 그분의 임재를 중심으로 세워진다”라는 주장 등은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주장들은 종래의 구속사 설교가 “구속사적 설교는 구속사적 해석이 아니라 구속사적 적용의 결과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참조, 채경락, “구속사적 설교는 해석인가, 적용인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설교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속사 설교는 왜 그리스도 중심인가? 여기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의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기에 결국 그리스도 중심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본다면 결국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일 수밖에 없다. 논점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강조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강조한 이유가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구원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강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말할 수 없다. 이러한 형식논리가 무너지면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범할 것이다. 구속사적 성경해석과 설교 논의에서 이 점이 간과한 점은 없는가를 심각하게 되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적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이해, 설교여야 한다. 이러한 형식논리를 리딩하지 못한다면 성경의 핵심 논지를 놓치게 될 것이며, 2천 년 동안 무엇 때문에 기독교(그리스도교)가 투쟁해 왔는가를 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 바른 성경 이해와 하나님에 관한 계시에 의한 지식, 믿음,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으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여기에 자신의 반성 능력이 새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소재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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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대통령, 호국의 형제 안장식 및 현충일 추념식 참석.윤 대통령 부부는 추념식 참석에 앞서 6·25전쟁에서 전사한 故 김봉학 육군 일병의 유해를 동생인 故 김성학 육군 일병 묘역에 합동 안장하는 ‘호국의 형제’ 안장식에 참석했다. 김봉학 일병은 1951년 9월 강원도 양구군 ‘피의 능선’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지난 2011년 유해가 발굴된 이후 올해 2월 DNA 검사를 통해 신원이 확인됐다. 동생인 김성학 일병 또한 1950년 12월 춘천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6·25전쟁 전사자로, 두 형제가 73년 만에 유해로 상봉하게 됐다. 이번에 조성된 ‘호국의 형제’ 묘역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3번째로, 대통령의 ‘호국의 형제’ 안장식 참석은 이명박 대통령 이후 12년 만이다. 안장식에는 김봉학, 김성학 일병의 남동생 김성환 씨와 부인 하정자 씨, 조카 김미수 씨가 참석했다. 유가족들은 두 형제의 고향인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에서 가져온 흙을 허토하며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형제들의 명복을 빌었다. 윤 대통령은 안장식장에 먼저 도착해 유가족분들을 기다렸으며, 유해와 함께 도착한 유가족들의 손을 잡고 감사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윤 대통령은 두 형제의 어머니가 90년 초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들 두 분이 전사했으니 40년 생을 어떻게 사셨겠냐”며 위로했다. 그러자 유가족들은 “큰형님이 어두운 곳에 계속 계셨는데, 이제 밝은 곳으로 나왔으니 두 형제가 손 꼭 잡고 깊은 잠을 드실 수 있을 것 같다”며, “대통령께서 직접 축하해 주시니 두 분이 좋은 곳으로 가실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거듭 감사를 표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서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이종섭 국방부 장관, 김승겸 합참의장을 비롯하여 6·25전사자 및 순직 군인·경찰·소방관 등 국가를 위해 헌신한 영웅들의 유가족*들과 함께 추념식장으로 입장했다. 추념식은 10시 정각에 전국적인 묵념으로 시작됐으며, 대통령은 헌화와 분향에 더해 유골이나 시신을 찾을 수 없는 전사자들의 위패 10만위가 모셔진 위패봉안관을 찾아 참배하며 국가를 위해 헌신한 영웅들의 명복을 빌었다. *동반입장 유가족 : 6·25전사자의 유가족 김성환 씨(故 김봉학·김성학 육군 일병의 동생)·이천수 씨(故 이승옥 육군 이등중사의 조카)·전기희 씨(故 전복희 육군 하사의 동생)·고영찬 씨(故 고영기 육군 하사의 동생), 순직 군인 유가족 이준신 씨(故 박명렬 공군 소령의 배우자이자 故 박인철 공군 소령의 모친), 순직 경찰 유가족 이꽃님 씨(故 유재국 경위의 배우자), 순직 해경 유가족 황상철 씨(故 황현준 경사의 부친), 순직 소방 유가족 박현숙 씨(故 허승민 소방위의 배우자) 윤 대통령은 추념식에서 국가유공자 본인 및 유족들에게 국가유공자 증서를 직접 수여했다. 경찰 복무 중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골절상을 입은 퇴직 경찰 나영진 씨, 군 복무 중 화약 폭발 사고로 부상을 입은 황도현 씨, 천안함 피격 사건 생존자 박현민 씨를 비롯해, 6·25전사자 故 조종두 씨(자녀 조영호 씨 수여)와 폐렴으로 돌아가신 퇴직 소방관 故 손준호 씨(배우자 전윤옥 씨 수여)도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받았다. 윤 대통령은 “공산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함께 피를 흘린 미국을 비롯한 유엔 참전국 용사들, 국가의 부름을 받고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신 해외 파병 용사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며 기념사를 시작했다. 이어서 추념식에 앞서 진행된 ‘호국의 형제’ 안장식을 이야기하며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12만 명의 국군 전사자들이 가족을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끝까지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북핵 미사일에 대응한 워싱턴 선언을 언급하며 “우리 정부와 군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철통같은 안보 태세를 구축하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은 영웅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서 있다며, “제복 입은 영웅들과 그 가족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자긍심을 가지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 영웅들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하고 예우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나라의 주인이고 주권자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행위입니다”라며 기념사를 마쳤다. 윤 대통령은 공식행사를 마치고 예정에 없던 베트남전 및 대간첩 작전 전사자 묘역을 방문했다. 윤 대통령은 먼저 베트남 파병 장병들이 묻힌 묘역을 찾았다. 이곳은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의 부친인 故 박순유 육군 중령의 묘소도 있는 곳으로, 대통령은 이곳에서 박 장관의 모친 등 가족들을 만나 위로했다. 윤 대통령은 또 故 박용재 육군대위의 묘소도 찾아 참배했다. 박용재 대위는 전사 당시 미혼으로 후손이 남아있지 않았으나 당시 같은 소대원 16명이 40년 동안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박용재 대위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으며, 이 이야기를 들은 대통령은 “참으로 대단하다”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이어서 대간첩 작전 전사자 묘역을 찾아 故 이상현 해병 상병의 묘소를 참배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이상현 상병은 1972년 진해에서 초소근무 중 무장공비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서 사병들의 묘역을 돌아보며 참배 온 유족들에게 “전사한 영웅들과 좋은 말씀 많이 나누시라”,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은 전사하신 분들의 피 묻은 전투복 위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유족들은 격려했다. 이에 유족들은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네요”라며 감사를 표했다. 윤 대통령은 유족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사진을 함께 찍기도 했으며 일부 유족들은 “대통령 화이팅”을 외치기도 했다. 베트남전 및 대간첩 작전 전사자 묘역이 있는 제3묘역은 1981년 6월 조성됐는데,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한 것은 42년 만에 처음이다. 이날 추념식에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이종섭 국방부 장관을 비롯해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이정미 정의당 당대표 등 국회 인사, 대통령실 김대기 비서실장, 조태용 국가안보실장 및 수석비서관 6명, 안보실 1․2차장 등 대통령실 주요 인사 등이 참석했다. 한편, 윤 대통령은 이날 행사에서 ‘121879 태극기 배지’를 패용했다. ‘121879 태극기 배지’는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12만 1,879명의 참전용사를 끝까지 잊지 않고 찾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엄무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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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주일) 천국과 어린이이번 주일은 어린이주일로 지킵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를 가정에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믿음 안에서 가정을 이루며 부모와 자녀의 사랑, 존경의 관계를 배우게 하십니다. 이것은 작은 천국입니다. 이 가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알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과 그 자녀된 성도의 관계를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부모님에게는 자녀였고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부모가 되고 자녀를 낳아 기르게 됩니다. 자녀를 통해 그리고 가정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과 자녀를 연결해서 이해하지 못하면 자녀를 우리의 소유물로 오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함부로 대하고 학대하게 됩니다. 1. 제자들의 질문(1) 본문 1절에 보면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제자들이 궁금한 것은 ‘천국에서 큰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키고, 금식기도를 하고, 십일조를 잘하고,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즉 모든 것이 인간의 공로 사상입니다. 인간이 공로를 세움으로 천국에서 큰 자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 바리새인들은 채소의 십일조도 드렸습니다. 마 23:23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그들은 식물의 십일조까지 따져서 드리는 열성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눅 18:12절에 보면 바리새인이 기도하면서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2회씩 어김없이 금식을 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신앙이 높고 위대하다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충분히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팽배했던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지를 질문한 것입니다. ‘크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문에는 비교급 형용사(메이존)로 쓰였습니다. ‘가장 큰’이라는 뜻입니다.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자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율법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들인가? 아마도 제자들은 후자의 대답을 듣기를 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2. 예수님의 교훈(2-3)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셨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부르셨습니다. 여기 쓰인 어린아이(파이디온)은 ‘유아, 작은 아이’를 말합니다. 누가 보아도 보잘것없고 자기의 능력으로는 전혀 천국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 어떤 공로를 세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다 알지도 못하고 다 지킬 수도 없는 아이입니다. 금식을 일주일에 2회씩 하거나 십일조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드릴 능력도 없는 아이입니다.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전도를 하는 할 수도 없는 아이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자들과 비교하면 전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아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여기 가운데(메소스)라는 단어는 ‘중앙에, 한가운데’를 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이를 불러 한가운데 세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예수님과 아이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절에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진실로는 원문에 아멘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신적 권위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실하시고 성실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당시 랍비들은 유명한 선배, 대 스승 랍비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가르쳤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언 방식인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레고 휘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랍비나 누구의 권위를 힘입어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진리이고 반드시 이루어지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큰 자가 누구인지 묻는 제자들에게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원문은 ‘같이’(호스)라는 부사가 쓰여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인은 어린아이가 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의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들과 같이 천국을 사모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3. 어린이와 천국(4) 4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교훈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운)는 결론을 나타내주는 접속사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십니다. 어린아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라고 하십니다. 어린아이의 속성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어린아이(파이디온)는 ‘유아, 작은 아이’라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반드시 옆에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알려주는대로 ‘아빠, 엄마’를 말하고 말과 행동을 배웁니다. 이처럼 순수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는 길은 바리새인들이나 유대교의 주장대로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고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구원의 길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자의 후손(창 3:15)을 통해 주어집니다. 여자의 후손이 세상에 와서 사탄의 머리를 박살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것입니다. 그 여자의 후손을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요 3:16). 이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믿는 자, 순수하게 믿는 자가 바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에 어린이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순수한 어린이들을 보면서 그들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을 사모해야 합니다. 소란스럽다고 혹은 울음소리와 재잘거리는 어린아이들의 소리가 시끄럽다고 외면하고 무시하면 안됩니다. 그 순수한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또 믿음 안에 자라고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일꾼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 아이들을 통해 세상에 퍼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결론 어린이주일을 맞아 우리는 어린이를 우리 가정과 교회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아이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양육하고 믿음 안에서 잘 자라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이 사명이 오늘 우리 교회와 믿음의 가정들에게 있음을 기억하고 사랑으로 아이들을 키워내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김순정 목사(말씀사역원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