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고전 강론 30] 출애굽 세대를 통한 경고와 교훈본문 / 고전 10:1-13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 전서 9:16-27절 말씀을 통해 “강권적 복음 선포와 그 접촉점 이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선포 사역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사역이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사역으로 설명합니다. 이 사역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특히 복음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증거하기 위하여 그 대상에 따라 복음을 전달하는 방식을 달리하였습니다. 우리가 증거하는 것은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물론 이러한 구원을 위해 먼저 삼위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에 관한 신지식이 바르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을 믿을 때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가능하고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 복음을 유대인에게 전할 때에 그 접촉점을 달리했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에게 전할 때에는 그에 맞는 접촉점을 활용했습니다. 이는 복음에 관한 내용이 아닌 전달하는 형식에 대한 문제입니다. 시대가 거듭될수록 내용은 변질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 내용을 담은 그릇이나 전달 방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산 맡에 약수는 시대가 거듭되어도 변질이나 오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약수를 떠 마시는 그릇은 시대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내용과 그 형식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제 고린도 전서 10장으로 넘어가서 10:1-13절까지 말씀을 통하여 과거 “출애굽 세대를 통한 경고와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본문 10장 역시 고린도 교회 내 열광주의자들의 또 하나의 문제인 세례와 성만찬에 관해 언급합니다. 세례와 성만찬이 마술적 능력으로 구원을 보장한다는 오해를 지적하며 시정해 가고 있습니다. 세례완 성찬 1. 홍해 사건과 세례와 성찬식(1-4) 첫째,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합니다(1). 본문 1절에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라고 합니다. 1절은 헬라어 본문에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로 시작합니다. 이 접속사는 앞 문단의 내용과 본 장의 내용이 밀접하게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절제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들은 은혜를 체험했는데도 불구하고 절제를 하지 않아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들아’라고 말합니다. 자신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알아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이거나 아예 올바른 지식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자들에게 “알아야 한다”라고 선언합니다. ’ 사도는 “알아야 한다”라고 하면서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곧바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라고 하는 데 여기서 ‘다’라고 합니다. 이는 애굽에서 해방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으로 홍해를 건넌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제 1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홍해를 건넌 사건을 통해서 무언가 말씀하려고 합니다. 둘째, 홍해 도화와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2). 본문 2절에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모세에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도화 사건을 통하여 모세에 속하여 세례를 받은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 ‘구름’은 구약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말할 때 제시되는 그림 언어입니다. 애굽에서 해방을 받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 아래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시 강림하신 성령에 해당합니다. 출 21~22절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라고 합니다. 셋째, 광에서 만나는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에 해당합니다(3-4). 본문 3절에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4절에서는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신령한 음식”이란 광에서 만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만나는 “신령한 음식”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수고의 대가로 주어진 음식이 아닌 하나님께서 매일 필요한 양식으로 주신 것이기에 이는 신령한 음식입니다. 만나는 특별한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출 16:4)와 반석에서 나온 물(출 17:6, 민 20:7-11)은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에 해당하는 성찬식으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반석에서 물이 나온 이 사건을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물이 반석에서 나왔다는 말은 신약시대 교회에 적용할 때 물이 나오는 반석, 즉 물이 나오는 근원을 그리스도에게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멸망 2. 그러나 멸망 받은 대다수 많은 사람 본문 5절에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라고 합니다. 본에서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라고 합니다. 누가 멸망을 당했습니까? “그들의 다수”입니다. 이는 대다수 많은 사람에 해당합니다. 왜 멸망을 당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멸망을 당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를 건너온 후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와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반석에서 나온 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기적에 참여한 자들이었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불순종은 결국 하나님을 거부한 결과였습니다. 민 14:16절에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비참하게 멸망 받은 것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까지 의심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범죄 목록 3. 그리스도인이 교훈이 되는 출애굽 세대의 범죄 행위(6-10) 사도 바울은 6-1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애굽에서 해방을 받은 출애굽 세대가 어떻게 하나님께 죄를 범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범죄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했는지를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는 그런 죄를 범하지 말자”라고 권면합니다. 그 권면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악을 즐겨 했습니다(6). 6절에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7). 7절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라고 합니다. 셋째, 음란에 빠졌습니다(8). 8절에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라고 합니다. 넷째, 주를 시험했습니다(9). 9절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라고 합니다. 다섯째, 감사가 아닌 원망을 했습니다(10). 10절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의 하나님 앞에 범한 죄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경고합니다. 본보기 4.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11-13) 11절에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 본보기라는 단어는 튀피코스(τυπικῶς)라는 단어는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오직 본문에 한 번 나온 단어이다. 이 본문은 성경을 해석할 때 인간의 모범중심의 성경 해석과 적용에 근거로 삼는 성경 구절로 삼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을 읽고 곧바로 우리에게 적용하여 ‘본보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칼빈은 이 일들은 우상숭배와 간음과 불평의 결과들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기록된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심판으로 내리신 분을 우리 눈앞에 보여주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심판은 “그와 같은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나타내주는 살아 있는 그림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보기로 우리에게 보여준 범죄 조항들은 이미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범죄를 심판하시는 분으로 계시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본보기로 우리에게 말씀한 이러한 범죄 행위들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며 언약에 반한 행동임을 분명히 합니다. 삼위 하나님의 바른 믿음과 지식을 거부하고 언약을 불순종할 때 나타난 각양각색의 범죄 행위들은 우리 모든 행위에 본보기가 됩니다. 이러한 본보기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구속의 은혜를 망각한 자들에게 나타난 범죄 행위들에 대한 적용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을 무시하고 성경 본문을 읽고 그 본문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외면하고 곧바로 우리에게 본보기로 적용한 것은 범죄 행위의 기준이 모호해질 뿐입니다. 성경계시와 신지식에 대한 그릇된 신앙으로 단순히 인물들의 행위만을 우리에게 가지고 와 본보기로 적용한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근본 원인에 대한 문제이지 나타난 현상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삼위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본보기로 주어진 당위성의 근거를 자신의 결단과 의지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합니다.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스’은 신약에서는 주로 ‘유혹’(temptation)이나 ‘시련’(trial)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유혹’이라는 것은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 빠지도록 하는 것입니다(마 6:13, 눅 11:4, 계 2:10). 그리고 ‘시련’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연단 하기 위하여 허락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마 5:4, 10, 약 1:12, 벧전 4:12). 본문에서 시험은 유혹인가, 시련인가에 대해서 양자택일이 아니라 함께 연동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유혹들로 인한 시험이 우리에게 고난을 줍니다.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피할 길을 예비해 주십니다. 약 1:14의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고 시련을 겪지만,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러한 시련을 통하여 그들을 연단 하시고 훈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허락지 않으시며 또한 직면한 시험을 견뎌낼 힘을 공급해 주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교훈과 적용 사도는 고린도 교회 안에 소위 강한 자들인 열광주의자들에게 경고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런 열광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열광주의자들은 몸으로 무슨 짓을 해도 그들이 구원을 받는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을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하며 그 하나님의 심판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오해한 구약의 출애굽 세대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의 범죄로 하나님 진노의 심판이 임했는데 이는 우리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이러한 본보기는 단순히 우리의 결단과 결심이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못하고 믿지 아니함으로 나타난 범죄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왜 구약 출애굽 세대에게 심판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점이 우리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구속 경론을 거부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 공의 앞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악한 행위들이 본보기가 된다는 모범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범죄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여러 인물의 범죄 행위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는 실천적인 행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의지할 뿐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들을 하지 않겠다는 신앙이 나를 살려줄 것입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
[고전 강론 27]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 지식에 앞선 사랑본문 / 고전 8:1-13 지난 시간에 고린도 전서 7:31-40절 말씀을 통해 “결혼할 것인가, 독신으로 지낼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5장에서는 음행에 대한 문제, 6장에서는 일상생활에서의 분쟁을 결정하기 위해 이방 법정에 호소하는 문제 등을 다루었습니다. 7장에서는 결혼에 대한 문제, 8절에서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후 11장에서는 예배와 성만찬 문제를 다룹니다. 그리고 12장에서는 예배시에 방언하는 자들의 은사에 대한 우월감으로 예배가 무질서해지는 문제를 14장까지 언급합니다. 그리고 15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생각이 잘못 오해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번에는 본문 8:1-13절 말씀을 통해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 지식에 앞선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배경 1. 본문 이해를 위한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 본문(8:1-13)에서 바울은 분명히 “우상 제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먹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교회에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 자체 보다 교회 내에서 그러한 문제가 생겨난 원인으로서 교회 내의 사랑의 결핍과 성도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식 있는 자들과 약한 자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지식 있는 자들의 권리를 부정하지 않고 있고, 오히려 우상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지식 있는 자들과 약한 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열의 원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의 우상숭배와 많은 접촉이 있었습니다. 첫째, 우상에게 바쳐졌다가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는 경우입니다. 둘째, 이방인의 사원에서 우상에 대한 제사 의식과 더불어 베풀어지는 식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상에게 바쳐지는 의식을 거치지 않고 도륙되어 시장에 나오는 고기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시장에 나온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집에 초대되어 대접받는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인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적어도 이웃집에 초대되어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부유층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은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사원에서 열린 종교적 잔치에서 고기를 얻어먹으려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한 말씀이 본문 말씀이 되겠습니다. 지식에 앞선 사랑 1. 교만한 지식이 아닌 덕을 세우는 사랑 (1-3) 본문 1절에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본 자들(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로 얻은 지식을 내세우며 그것을 먹는 자유를 주장한 자들(강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후자의 주장을 다루면서 그의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본문 1절에 “우리가 다 지식을 가졌다”라는 주장에 바울은 일단 이들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곧장 사랑과 연결시킵니다.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 은사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지식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한 지식은 그들로 자만하게 하고 남을 업신여기게 합니다. 사도는 이들에게 사랑을 강조하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문제에 대해서 지식을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할 뿐이지만 덕을 세우는 것은 사랑입니다. 지식은 부풀게 한다면 사랑은 올려세우는 일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올려세우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갖고 자랑할지 모르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사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라고 합니다.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그마한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상대를 억압하고 상처를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로 바른 지식을 가졌다면 겸손해집니다. 벼가 익으면 머리를 숙이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박사학위 과정과 논문을 마친 후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학문 앞에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라고 합니다. 본문 3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한 사람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하나님 지식 2. 우상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 (4-6) 본문 4절에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여기서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래 너희 말이 맞다’라고 말하면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우상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라고 합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우상 숭배행위를 이용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상 자체를 실재가 없는 한 조각의 목석에 불과하다고 보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지식”을 인정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본문 5절에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것들은 다 가짜입니다. 그러나 6절에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한 분뿐이십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또 우리의 주님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십니다. 이차적인 의미로 그의 아들을 통하여 그의 자녀들이 된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 우리가 아버지라고 한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양심 3. 우상 제물로 알고 먹으면 양심이 더러워짐(7-10) 본문 7절에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라고 합니다. 본문 1절에서와같이 모든 신자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일부 신자들은 우상이 영적인 어떤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오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에도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도 어떤 종교적인 힘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은 종교적인 어떤 영적 의미가 있다고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약한 자들”이라 칭합니다(9:22, 롬 14:15, 21). 이들은 양심이 약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소심한 자들입니다. 이런 일로 초조해하며 근심하며 두려워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은 그들의 양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먹으면 그들의 양심이 더러워집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본문 8절에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즉 음식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나쁜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나을 것도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 강한 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다고 하여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신분이나 자유를 조금도 잃을 것이 아니다.” “‘약한 자들’ 같이 안 먹는다고 해도 무슨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강한 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그 반대의 이야기도 말하면서 소위 “강한 자들”의 입장을 교정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의 계속된 가르침은 9절로 이어집니다. 9절에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라고 합니다. 강한 자들의 가리지 않고 먹는 자유가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우상을 먹는 권리와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걸림돌이 됩니까? 이 이야기는 10절에서 말씀합니다. 본문 10절에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라고 합니다. 지식이 있다는 자들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 먹는 것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 본다면 그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그도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우상의 사원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앉아 그 제물을 먹으면, 그것을 보고 “약한 자”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용기를 얻어 “강한 자”를 따라 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약하여 전에 가졌던 우상에 대한 의식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강한 자”를 따라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으면서도 그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고 불안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약한 자”의 양심이 상처를 입게 됩니다. 형제 실족 금물 4. 약한 형제를 실족게 하지 말라(11-13) 본문 11절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라고 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지식 때문에 믿음이 약한 그 사람은 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형제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같은 형제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 형제를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그런 자는 아닙니다. 이 형제가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 형제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형제를 무시해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곧 형제에 대해 죄를 범한 것과 같습니다. 나아가 형제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해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 12절에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라고 합니다.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결론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죄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도 다시는 제물을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형제에 대한 사랑에 의해 제한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에 근거하여 교회를 세우는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훈과 적용 고린도 교회에서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강한 자들”과 “그러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라는 “약한 자들”에 대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 유대교적 영향을 받았다면, 그는 분명하게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8장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그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지식 있는 자들이 제기한 주장들과 태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바울은 가리지 않고 먹는 자유가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9절). 바울은 “음식”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가 8:13절에서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라고 말한 것 역시 약한 형제를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지 음식 자체가 부정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술과 담배 문제, 주일성수 방법 문제, 사치스러운 풍족한 생활에 문제 등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
[고전 강론 24] 처녀에 대한 바울의 권면본문 / 고전 7:25-28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7:17-24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라”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으며, 은혜로 부름을 받았다면 각자에게 은사를 주시고 사명을 주셨다고 합니다. 은사에 따라 사명을 받을 때 내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와 자세가 어떠해야 하냐는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셨다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사명을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는 부름은 동시에 사명에로 부르심을 내포합니다.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은사에 따라 직분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신자들이 사명을 받았다고 하여, 그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가정을 버려야 하고 직장을 버려야 합니까? 아니면 가정과 직장을 소홀히 해야 합니까? 여기에 사도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자신이 처한 삶의 현장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신분과 처지를 절대화하지 말고 상대화해야 합니다. 신분과 처지에 생명을 걸지 말고 상대화시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자나 무할례가 다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그의 종입니다. 이제 머슴이나 주인이 믿음 안에서 하나이며, 모두가 그리스도의 안에서 자유자이며, 그의 종일 뿐입니다. 이번에는 본문 7:25-38절 말씀을 통하여 “처녀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처녀에게 1. 처냐에 대한 바울의 의견(25) 본문 25절에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라고 합니다. 여기 “처녀에 대하여는”라고 하는 이야기는 고린도인들이 바울에게 편지로 자신들에게 문제가 된 처녀들의 결혼 문제에 대해 질의했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문제에 부딪치며 살아갑니다. 삶의 현장에서 ‘이 길이냐, 저 길이냐’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본인의 처지에서 얼마나 고민이 많겠습니까?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면 자신의 소신 있는 주관적 판단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신앙인 일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문제 해결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할 때 감히 이 땅에서 누가 하나님의 뜻을 자신 있게 대답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자기 뜻을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삶의 구체적인 현장 상황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냐에 대해 답변할 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체적으로 문제에 대해 답변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성경에서 인출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전제되지 아니하면 그것도 참 힘듭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 자기 삶의 현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냐를 묻습니다. 여기서 모든 성도가 이러한 고민과 문제를 안고 목회자에게 찾아와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심각한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개입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강해 설교나 각종 성경 연구 시간에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에 관해 설명합니다.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가를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교를 듣는 중에 성도들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 해결을 받습니다. 설교 자체가 그 사람에게는 상담의 역할까지 이루어집니다. 목사님을 만나 상담을 받고 실었지만, 설교는 듣는 중에서 그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는 중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해결할 수 있는 지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고린도 교회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그 질문은 처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부활 승천한지 약 20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이른바 제2차 선교여행 중인 주후 50~51년의 겨울에 고린도 지역에서 1년 6개월 정도를 머물면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후 주후 52~54년 동안 에베소에 체류하면서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냅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이미 20~25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3년 동안 많은 사람에게,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그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질문해 온 처녀에 대한 문제는 이혼의 문제와는 달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부분의 이야기가 “처녀에 대해서는 주님의 명령을 받지 못하였지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지 못하였지만, 자신의 의견을 줍니다. 그러나 사도는 자신이 주님의 자비로 받은 사도직을 충실히 수행하는 자이므로 자신의 의견은 곧 주님의 뜻을 대변하는 것임을 언급합니다. 즉 주님의 자비를 통해서 나온 신뢰할 만한 견해입니다. 환난과 결혼 2. 처녀에 대한 권면(26) 본문 26절에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이미 7:8절에서 독신을 성적 절제의 은사와 연결시켰습니다. 그러나 본문 26절에서는 임박한 종말의 환난에 근거하여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임박한 재난을 생각한다면 사람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는 임박한 종말을 환난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환난은 종말의 구원 전에 있을 고난에 대한 묵시 문학적 표현입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단 12:1)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사도 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환난도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당할 하나님 교회가 당할 환난도 있습니다. 그 환난의 모습들은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삶에 부딪히면서 당한 환난이 있습니다. 본문의 ‘환난’이라는 단어는 재앙, 핍박, 시련 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환난 때문에 처녀가 시집가지 않고, 총각이 장가가지 않고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바울의 권면입니다. 이러한 권면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여 결혼하면 너무나 고통스러우니 결혼하지 말로 그냥 처녀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가르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자녀를 둔 부모님의 고민과 갈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이렇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처녀가 시집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그대로 처녀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권면에 의하면 그냥 처녀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을 오늘날 우리 삶의 현장에 적용할 때 모든 처녀에게 결혼하면 골치아프니 결혼하지 말고 처녀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본문에 “임박한”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에네스토산’은 “그때 눌리는, 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사도 바울에게 처녀에 대해 질문을 할 때는 심한 시련들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도의 이러한 답변은 영구적인 규례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였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임박한 환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사도가 “그가 있는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말과 “나는 사람이 같이 처신함이 좋다고 권면하는 바이다”라고 하면서 27절 말씀을 진술한다. 26절은 27절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결혼은 죄가 아니다 3. 바울의 권면(27-28) 첫째 독신을 위해 결혼을 파기하면 안 됩니다(27). 본문 27절에서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결혼으로 이미 결합한 자들이 그 결혼을 파기하므로 독신생활의 유익한 점에 영향을 받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즉 아내가 있는 사람은 헤어지려고 하지 말고 아내가 없는 사람은 아내를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두가 믿음에로의 부름을 받았을 때의 처지에 머무는 것이 좋다는 원칙에 근거해 충고합니다. 이를 남자와 여자에게 각각 적용합니다. 이미 결혼한 남자는 이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미혼인 총각은 아내를 구하지 말고, 미혼인 처녀도 남편을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 충고를 율법으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9절에서 언급한 대로 절제의 은사가 없으면 결혼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므로 총각이나 처녀가 결혼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이 충고를 주는 것은 그들을 다가오는 종말의 환난에 결혼생활이 필연적으로 가져올 더 큰 어려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결혼한 것은 죄가 아닙니다(28). 본문 28절에서 “그러나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아니요”, “아니로되”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처녀가 결혼할 때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이미 본문 26절에서도 언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현실적으로 고린도 교회가 당한 육신적 환난, 다가올 재앙을 내다보면서 염려하는 사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결혼이 죄가 아니라는 말로 자신의 양측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판단은 각자가 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사도 바울은 중요한 원칙을 제시합니다. 결혼은 신성한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결혼이라는 제도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혼이 때로는 많은 아픔을 가져옵니다. 결혼한 후 이혼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이혼한 후 남자든, 여자든 혼자되었을 때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충고합니다. 그리고 아직 한 번도 결혼하지 않는 남자나 여자에게 권면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권면은 사도가 결혼이 죄이기 때문이 아니라고 분명히 못을 박습니다. 혼자 사람들이 결혼할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때 독신의 은사를 받았다면 혼자 사는 것도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결혼하는 것이 문제 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심지어 혼자 살면서 절제의 은사를 받지 않았다면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들의 편자 가운데 처녀들의 결혼 문제에 대해 바울에게 그 교훈을 구했습니다. 이 처녀에 대한 문제는 이혼의 문제와는 다릅니다. 이혼의 문제와는 달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없으므로 사도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합니다. 자신의 의견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도직을 충실히 수행하는 자라고 언급합니다. 충실하게 사도직을 수행하는 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은 곧 주의 뜻을 대변하는 것임을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처녀에 대한 자신의 뜻이 고린도전서에 기록됨으로 이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날도 우리에게 적용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통해 처녀들은 결혼하면 환난의 고통을 받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적용해 버리면 안 됩니다. 여기서 사도는 전제한 것이 있습니다. 결혼은 죄가 아닙니다. 독신의 은사를 받았다면 혼자 사는 것입니다. 독신의 은사를 받지 않았다면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결혼 그 자체는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결혼한 남자나 여자는 이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
전국목회자사모세미나 성황리에 마쳐(리폼드뉴스) 코로나 19의 긴 공백 기간을 보내고 현장에서 3년 만에 진행된 제29회 전국목회자사모세미나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료했다. 한국지역복음화협의회(총재 피종진 목사·대표회장 설동욱 목사)와 목회자사모신문(이사장 피종진 목사·발행인 설동욱 목사)이 공동으로 주최하고 예정교회가 후원하여 지난 5월 30일(월)부터 6월 1일(수)까지 2박 3일 동안 진행된 목회자사모세미나는 참석한 500여 명 사모들이 "눈물의 기도, 기쁨의 찬양, 행복의 함성이 쏟아지는 가운데 큰 은혜의 여운을 남기며 마쳐졌다. 지난 5월 30일 월요일에 예정교회 찬양팀의 뜨거운 은혜의 찬양과 설동욱목사의 눈물의 기도회 인도로 시작된 세미나는 예수인교회 민찬기 목사의 ‘광야학교’라는 주제로 은혜의 문을 여는 첫 말씀이 있었고, 이어 뮤지컬 CCM 콘서트가 진행되어 복음적인 영상과 찬양 그리고 말씀 등으로 위로와 은혜를 받았으며, 저녁집회시간에는 늘푸른진건교회 이석우 목사가 ‘마침내 복을 주신다’는 제목으로 믿음의 말씀을 전했다. 둘째 날, 31일 화요일 오전시간은 하귀선 사모의 ‘죽지 않고 살아서’라는 주제로 전해지는 간증으로 눈물샘이 터져 나왔고, 교육선교단체 솔로몬 에듀 노양근 대표가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과 지혜를 통한 교회 부흥과 전략에 대한 내용이 소개됐다. 오후는 테일라 사모합창단의 영혼을 울리는 찬양으로 시작하여 정릉 벧엘교회 박태남 목사가 ‘나는 사모의 아들이었다’라는 주제로 사모들에게 은혜의 말씀을 전했다. 늦은 오후 강사로 나선 이병준 목사는 ‘행복 비타민 공급시간’ 이라는 주제로 말씀이 곁들여진 신나는 찬양과 레크레이션을 통해서 사모들이 마음껏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했다. 둘째 날 저녁은 목회자자녀세미나를 통해서 은혜받은 목회자자녀들이 결성한 PK LOVE의 찬양인도에 이어 예정교회 설동욱 목사가 ‘해석이 인생을 만든다’라는 주제로 마지막 날 능력과 은혜의 말씀을 선포했다. 설동욱 목사는 목회와 삶이 많이 힘들고 어렵지만 긍정적인 해석과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하심을 믿음으로 모든 일을 해석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목회에 복을 주시는 인생을 만들어가자며 사모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강력한 도전의 말씀을 증거했다. 특히 2박 3일 짧은 일정의 마지막 밤 집회이기에 설 목사는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찬양과 기도회를 인도했는데 많은 사모들이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받고 전심으로 기도했다. 마지막 시간에 모든 사모들이 일어나 젊은 세대 찬양 몇 곡을 연속으로 뜨겁게 부르면서 춤을 추고 뛰면서 간절히 찬양했는데 천국의 찬양 같은 기쁨을 누렸고 사모님들의 얼굴에는 행복함이 흘러 넘쳤다. 6월 1일 마지막 날 수요일은 청주금식수양관 원장 백효선 목사가 ‘나는 이렇게 사역하고 있습니다’라는 주제로 뜨거운 사역의 현장과 실제적인 노하우를 공유했다. 폐회 예배에서는 남서울중앙교회 피종진 목사가 ‘네가 큰 일을 행하리라’는 주제로 다시 교회로 향해 나아가는 사모들에게 격려와 위로 그리고 능력의 권면을 전했다. 이후 진행된 사모 격려금 지원 추첨 시간은 흥분과 기대의 시간이었다. 희비가 엇갈리는 극적인 시간이었는데 100명의 사모를 한 명씩 호명하여 추첨이 된 것을 확인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감동의 탄성과 당첨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추첨자가 100명이 가까워지면서 당첨된 사모는 극적인 감동이 넘쳤고 호명되기를 고대하며 기다렸던 사모는 안타까움의 한숨도 커져만 갔다. 100명의 추첨이 끝났을 때 당첨되었다는 안도의 탄성과 기대가 채워지지 못하여 나오는 안타까움의 탄성이 교차하여 세미나 장소를 가득 채웠다. 추첨된 사모는 감사와 미안한 마음이었고 추첨되지 못한 사모는 진심 어린 축하와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채워 주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세미나를 마쳤다. 비록 격려금에 당첨되지는 못했지만 2박 3일 동안 받은 영,육의 채워진 말씀으로 사모들은 이미 충분한 은혜를 받아 누렸다. 목회자사모세미나를 진행하는 예정교회에서 만난 사모들은 저마다 기대와 기쁜 마음으로 가득 채워 있었는데 마치 소풍가는 어린 아이가 전날 잠을 못 자는 것처럼 전날 밤에 잠을 못 자고 설레는 마음으로 세미나에 참석했다는 사모가 많았다. 스텝들을 볼 때마다 고마움과 감사를 표현했고 목회자사모세미나에 너무 목이 말라 있었다고 말하며 세미나를 주최해 주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전하는 사모들이 많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사모님들을 위한 숙소로 제공한 성도들과 안내와 식사준비, 배식, 설거지, 주차, 차량 운행 등을 통해 땀흘리며 섬기고 봉사하는 예정교회 성도들을 보면서 사모님들은 진한 감동과 감사와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사모들을 섬기는 성도들과 모든 이들의 그 땀과 섬김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듯, 모든 시간마다 터져 나오는 우렁찬 아멘과 뜨거운 찬양 그리고 열렬한 박수 소리가 세미나를 진행하는 예정교회 본당 전체를 가득 채우고도 흘러 넘쳤다. 이번 제29회 전국목회자사모세미나를 총괄 진행한 목회자사모신문 발행인 설동욱 목사는 “세미나를 진행하는 동안 사모님들이 얼마나 기뻐하시며 얼마나 즐거워하시며 얼마나 행복해하시는지 그동안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저 또한 행복했습니다. 이번 제29회 전국목회자사모세미나를 계획하시고 진행하게 하시며 은혜롭게 성료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모든 목사님과 사모님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전했다. 제29회 전국목회자사모세미나 사모들이 남긴 말! 말! 말! 마음에 쉼과 힐링, 영혼이 새롭게 회복됨을 감사드립니다. 행복해요. 사랑해요. 영원히. 처음으로 왔습니다. 고민하고 아파했던 마음이 찬양과 설교와 기도를 통해 해결받았습니다. 감사해요. 처음 참석한 세미나에 마음껏 울고 웃고 회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코로나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목마른 심령에 은혜로 주의 사랑과 섬김을 경험했어요. 사역이 사역되게 하심에 감사 드립니다. 예정교회 축복합니다. 훌륭합니다. 사모들을 온 정성 다해 섬겨주신 귀한 교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큰 감동과 힘을 얻고 갑니다. 영혼의 쉼을 얻고 친정 엄마 집에 온 것처럼 따뜻한 품 안에 있다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성도님들 넘 감사드립니다. 넘 맛있게 먹었습니다. 기도로 듬뿍 갚겠습니다. 유머러스하고 온화하신 목사님 천사같은 성도님 닮고 싶고 따라하고 싶어요. 사랑하고 축복해요. 은혜를 회복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정교회 모든 분께 감사 드립니다. 친정 같은 예정교회 이번에도 충분한 사랑과 은혜받고 갑니다. 받기만해서 미안합니다.
-
[고전 강론 23]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라본문 고전 7:17-24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 전서 7:8-16절 말씀을 통하여 “결혼과 이혼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하였을 때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결혼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고후 6;14-7:1). 그러나 지난 시간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혼합 결혼에 관해 말씀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결혼상태에 있는 부부 중 한쪽 배우자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한쪽은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비그리스도인인 남편이나 아내가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이혼하지 말고 같이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한 후 믿는 배우자는 하나님 앞에서 화평의 사람으로 부르셨으므로 화평하여 함께 살아야 함을 천명합니다. 여기서 이혼의 조건은 우리나라 현행법으로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소명 1.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17). 본문 17절에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에 가르친 말씀은 각 사람은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은혜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구원으로 불러주셨다면 부르심 당시의 생활을 계속 유지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런 내용입니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교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주인 조덕삼 집의 마부인 이자익이 한글을 배우고 선교사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같은 교회에 주인과 마부가 함께 교회에 출석합니다. 머슴인 이자익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면 이제 머슴인 마부를 그만두어야 합니까?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가르침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머슴의 상태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부르심을 받을 당시 마부의 일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본문 17절에서 언급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다양한 삶의 자리로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하여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당시에 이런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삶의 질서를 혁명적으로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내가 처해 있는 삶의 현장의 질서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그런 형식의 혁명은 성경이 가르친 바는 아닙니다. 기존의 질서에서 자신의 삶에 충실하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은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입니다. 그 은사로 현재 처한 삶의 현장에서 묵묵히 그 사명을 감당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으로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는 그 은혜의 영광을 위하여 은사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은혜와 은사를 구분하여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 구원받은 자가 달란트에 따라 은사를 받았다면 그 은사는 나의 삶의 현장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나의 삶에 충실하면서 그 은사를 감당하여야 합니다. 가정을 버리고, 직장을 버리고 은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에 충실하면서, 직장에 충실하면서 받은바 은사에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상대화하라 2. 교회에서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취할 태도(18-20) 본문 18절에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라고 합니다. 이어서 19절에는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안에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출석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 또한 이방인 중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방인 중에는 당시 노예이거나 노예에서 해방된 자도 있었습니다. 특별히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 있었지만,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도 있었습니다. 사도는 줄기차게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할례가 구원의 조건으로 믿었다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아 교회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이제 믿음 안에서 이제 할례를 받은 자나 받지 않는 자나 할 것 없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할례를 절대화할 수 없습니다. 상대화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서울 승동교회 역사를 보면 승동교회 전신인 곤당골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미국 븍장로회 선교회 소속 사무엘 포먼 무어(Samuel F. Moore, 1846-1906)가 이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무어 선교사가 담임하고 있었던 곤당골교회에 백정들이 출석했습니다. 백정의 신분은 가축(소와 돼지, 닭)을 도살하는 일을 전담하는, 천인 중에서도 가장 천하고 낮은 신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가장 무시당하고, 소외된 계층이었습니다. 백정은 결혼할 때도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탈 수 없었고, 죽어서도 지게에 실려져 조용히 장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백정인 박성춘이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어 교회에 출석했다. 그런데 양반들은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곤당골교회에서 무어 선교사가 백정에게 세례를 주고 교인으로 받았다는 이유로 교인의 절반 이상이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무어 선교사는 백정이나 양반은 교회 안에서 같은 그리스도의 자녀라고 하면서 그들을 용납했습니다. 그러나 양반들은 거부했습니다. 백정인 박성춘의 아들인 박동열은 공부를 잘하여 1907년에 세브란스 의과대학 제1회 졸업생 7명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것같이 할례자나 무할례자는 모두 하나라는 것은 곧 백정이나 양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두가 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제 백성과 양반이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화할 수 없습니다. 사도는 본문 18절에서 부르심을 받기 전에 할례를 받았다면 할례받은 표를 없애려고 애쓰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할례를 받지 않았다면 굳이 받으려 하지 말라고 합니다. 본문 19절을 주의하여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19절에 할례를 받든 안 받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쓸데없는 기준을 신앙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 유혹은 결국 내가 이만큼 괜찮은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남다르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려는 욕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것으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우리 정체성을 확인받아야 합니다. 사도는 20절에서 결론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20절에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태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기존에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한 삶의 현장을 무시하지 말고 그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절대화 금물 3. 사회적 신분의 상황에 적용(21) 이제 구체적으로 사도의 가르친 내용의 원칙을 통해 사회적 신분의 상황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본문 21절에 “네가 종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현재 처한 삶의 현장에서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는 자의 신분이 어떠하든지 간에 비록 그 신분이 종, 즉 노예일지라도 염려하거나 걱정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거든 차라리 그 길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의 신분이 노예라고 한다면 자유의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로 계속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자유인이 될 수 있거든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22절에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라고 합니다. 노예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비록 노예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인입니다. 반대로 자유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사단의 세력을 결박하고 해당한 자유인입니다.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백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양반과 같은 자유인입니다. 그렇다고 양반이 예수를 믿었을 때 교회 안에서까지 양반일 수 없습니다. 그들 역사 교회 안에서는 백성이나 양반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자신의 신분에 대해 절대화하면 됩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사람의 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은 본문 23절에 보니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은 24절은 그가 가르친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소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마치 이 세상 신분을 생명처럼 절대화하면 안 됩니다. 상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곧 내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사회적인 신분이 내 생명이나 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대수롭지 않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신분에 대한 변동이 마치 죽음이 찾아온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에게 좀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사라질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또 다른 길을 나에게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내 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교훈적 적용 그리스도인의 직업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소명이라는 차원에서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직업은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은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은 소명이 다를 뿐이지 우리는 그것에 값을 매겨 가치관의 준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한 사명이 있습니다. 직업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명과 직업은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원명이나 불평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최선을 다하다 보면 하나님은 또 다른 사명, 직업을 허락할 것입니다. 문제는 사도가 가르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면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의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순종하게 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 있다면 이는 대단한 축복입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내가 살아갈 이유가 있다는 것은 곧 나에게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였습니다.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참고 인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
[고전 강론 22] 결혼과 이혼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본문 / 고전 7:8-16 [8]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10]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7:1~7절 말씀을 통하여 “부부의 이상적인 관계”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관한 이야기를 1:10-17절 말씀에서 한 후 1:18절에서는 4장까지(21절) 고린도 교회의 분쟁 이유, 즉 분쟁의 원인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음행에 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사도의 가르침에 대해 5:1-19절까지에서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내 신자 간의 소송에 대해서 6:1-11절 말씀을 통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고린도 교회가 구체적으로 사도에게 질문한 편지에 대해 답변한 내용이 7:1절에서부터 마지막 16장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의 내용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7:1~7절 말씀을 부부의 결혼생활에 대한 이상적인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부부관계에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 하나이며, 하나를 실현하기 위해 남편이 취해야 할 자세, 그리고 아내가 취해야 할 자세와 태도를 살펴보았습니다. 헬라적 사고방식이 교회 내에 침투해 들어온 영육 이원론 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 의해 형성된 열광주의자들과 금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결 곁이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믿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 것은 선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육체는 악하다고 믿었습니다. 사라질 육체를 자기 멋대로 음욕으로 사용하는 행위를 지적하면서 우리 육체는 성령이 거하는 전으로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없어지고 사라질 육체를 통해 향락을 위한 쾌락주의여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금욕을 통하여 육체를 학대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사도는 이 모두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전한 부부관계를 통해 열광주의나 금욕주의 모두를 반대하고 하나님 앞에 이상적인 부부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본문 7:8-16절 말씀을 통하여 이상적인 부부관계에 이어 구체적으로 “결혼과 이혼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란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미혼자 1. 미혼자들과 과부들에게 충고(8-9) 사도 바울은 먼저 미혼자들과 과부들에게 충고합니다. 이들은 결혼이나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데 특징이 있습니다. 혼자 사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독신의 은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신의 은사가 아닐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교훈입니다. 본문은 사도가 결혼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 음행과 관련하여 이를 치유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첫째, 미혼자들과 과부들에게 그냥 혼자 사는 것이 좋습니다(8). 본문 8절에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미혼자인 남성과 과부인 여성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가 여성과 남성만을 특정하여 말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에게 동등하게 원칙들을 적용해 온 것이 지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미혼자들과 과부라고 할 때 미혼여성과 상처한 남자에게도 적용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일차적으로 미혼자와 과부들에게 말하기를 사도와 같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바울 자신과 같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제가 있습니다. 절제의 은사를 받았을 경우로 제한합니다. 독신의 은사임을 점검하는 첫 번째 기준은 절제의 은사를 받았느냐에 있습니다. 이 부분은 9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둘째, 그러나 결혼한 것이 더 나은 경우가 있습니다(9절). 본문 9절에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서용하면서 8절의 말씀대로 혼자 살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 자들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남자나 여자, 혹은 과부가 스스로 절제할 수 없으면 결혼하라는 겁니다. 정욕으로 불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편이 낫습니다. 절제의 은사를 받았다면(7절) 미혼 남성이나 여성, 또는 결혼에 실패한 남자나 여자 모두는 혼자 사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좀은 절제할 수 없을 때는 결혼하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내적으로 정욕적인 마음으로 가득하여 있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정욕으로 불타는 상태에서 “단정한 몸가짐으로 그리고 온전한 정신으로 주를 섬기기”(35절) 는 불가능합니다. 결혼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5:22-33절 말씀을 통하여 신성하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한 남자와 여자와 결혼을 통한 연합은 결국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인 성도들과의 연합으로 승화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음행으로 하나 된 연합이 파괴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결혼은 이를 치유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설명합니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더욱 음행으로 불타 있다면 차라리 결혼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음행으로부터 절제의 은사를 받았다면 자신과 같이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사도는 이러한 절제의 은사를 받았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혼의 유책자 2. 결혼한 자들에 대한 가르침(10-11) 첫째,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10). 본문 10절에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결혼한 사람들에게 권면한 이 말씀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라고 전제합니다. 그 명령은 아내는 남편과 헤어지면 안 된다고 합니다. 절제의 은사를 받아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으나, 이미 결혼한 사람들은 그 결혼을 깨뜨려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사도는 이혼을 금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백한 가르침으로 충고합니다(막 10:2-12, 마 19:3, 눅 16:18, 마 5:31). 유대교에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로 남자가 여자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신 24장). 사도는 헬라적 관습에서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이혼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이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옵니다. 고린도 교회 상황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이혼을 금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부분을 언급하며 권면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둘째, 남편은 아내를 버리면 안 됩니다(11). 본문 11절에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라고 합니다. 만일 헤어지더라도 혼자 그냥 지내든지 아니면 남편과 다시 화해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고 합니다. 10절에서는 “아내는 그의 남편으로부터 갈라서지 말 것”을 말씀하고 11절에서는 “남편은 그의 아내를 이혼하지(내버리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또한 13절에서는 “아내는 … 그의 남편을 이혼하지(내버리지) 말 것”, 14절에서는 “남편은 … 그의 아내를 이혼하지(내버리지) 말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는 13~14절에서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10~11절은 유대교적 관습을 염두에 두면서 말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이혼을 금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혼은 피할 수 없이 발생합니다. 이런 경우를 바울은 괄호 안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결혼이 깨지는 일이 발생하면, 아내는 결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든지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라고 충고합니다. 물론 이 충고는 역시 남편에게도 적용됩니다. 불신자와 결혼시 3.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결혼(12-16) 신약에서 예수님은 유대인과의 관계 속에서 결혼에 대해 교훈을 하셨습니다. 문제는 초대교회의 헬라 세계의 선교지에서 주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결혼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교훈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의 결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사도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충고 역시 예수님의 결혼과 이혼에 대한 가르침에 근거하여 새로운 상황에 비추어 새롭게 해석하고 그것에 새롭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결혼할 때 가르침입니다(12-13). 본문 12~13절에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라고 합니다. 본문 12절에 사도는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말이라고 하면서 특수한 상황의 결혼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믿는 남자에게 믿지 않는 아내가 있을 경우입니다. 믿지 않는 그녀가 남편과 함께 살려고 하거든 그녀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13절에서는 또 믿는 여자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을 경우, 남편이 아내와 함께 살려고 하거든 그를 버려서도 안 됩니다. 사도는 고린도 후서 6:14-7:1절에서 대 원칙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결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언급한 대로 결혼하는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이 믿지 아니하였을 경우인 혼합결혼의 지속은 비그리스도인인 배우자에게 달려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가 결혼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인 남편이나 아내는 이혼하지 말고 같이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형태의 결혼 유지에 대한 가르침은 현행 우리 한국교회가 한국이라는 국가의 실정법에는 적용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은 교회 내에서 이혼에 대한 적법성 여부를 판단할 때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유책 사유가 그리스도인이 아니 비그리스도인의 배우자에게 있는 자 여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집니다. 둘째, 비그리스도인 배우자로 인해 결혼이 부정되지 않습니다(14). 본문 14절에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를 통해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않는 아내”가 믿는 남편을 통해 거룩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녀들도 깨끗지 못할 것이지만, 이제는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 혹은 아내가 믿는 아내와 남편으로 인해 연합되어 살아가므로 간접적으로 그리스도의 주권 영역으로 가까이 와 있게 됨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다고 했습니다. 거룩함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산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그 의무를 내포합니다. 따라서 비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결혼함으로 거룩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도는 비그리스도인과 결혼하므로 그리스도인의 결혼이 더럽혀지고 거룩하지 못하다는 말에 대한 반론을 제시합니다. 비그리스도인 배우자가 그리스도인의 배우자에 의해 그리스도의 주권과 창조주 하나님을 의식하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지 않는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에 의해 거룩해진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런 부부의 자녀도 “거룩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이혼에 대한 상반대 견해와 해결책은 무엇입니까?(15-16) 본문 15절에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라고 합니다. 만일, 혹 믿지 않는 쪽에서 떠나고 싶어 하거든 떠나게 하라고 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믿는 사람은 그런 일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평화롭게 살라고 우리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화평 중에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믿는 배우자가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을 했다면, 화평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화평에 실패하면 믿지 않는 자가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와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일단 그런 결혼을 했다면 화평을 위해 부르신 하나님은 다음 16절 말씀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16절에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믿는 아내가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고 믿는 남편이 믿지 않는 아내를 구원하게 될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대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호주의적 윤리, 즉 남편과 아내에 대해 철저히 동등한 권리와 의미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혼 금지에 대한 가르침을 대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배우자가 그대로 있기를 원한다면 믿는 배우자는 구속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의하지 않는다면 믿는 자는 구속받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는 결혼 계약이 구속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배우자 동의한다면 결혼 계약에 구속됩니다. 교훈과 적용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에 대한 성경적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싶게 결혼하고 너무나 쉽게 이혼하는 그런 시대적 상황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결혼은 신성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인 그리스도인과의 관계는 신비적 연합에 있습니다. 이러한 신비적 연합의 관계를 이 지상에서 결혼을 통한 부부관계를 통하여 보여줍니다. 결혼할 때는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배우자가 불신자, 즉 비그리스도인일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믿는 배우자는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먼저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즉 믿는 자는 이혼의 귀책 사유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결혼 유지의 유책 사유가 믿지 않는 배우자에게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 배우자가 결혼 유지에 동의하지 않고 거부하고 떠났을 때 결혼 계약을 파기했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배우자와 화평하지 못한 원인으로부터 책임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믿는 배우자는 화평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믿지 않는 배우자에게 전도하여 하나 된 부부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믿지 않는 배우자에게 전도하여 구원받게 하려고 그와 결혼하게 했을는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외에 없습니다. 기도했으면, 사도 바울이 권면한 부부관계에서 충실한 남편의 의무, 아내의 의무를 잘 감당해야 합니다. 집안에서 사랑의 만족을 느끼지 못하면 밖으로 나돌게 된다는 점고 늘 명심해야 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
목회자가 오히려 설교의 권위를 추락 시킨다설교는 설교자의 성경관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느냐에 따라 설교의 내용이 달라진다. 설교는 반드시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해야 하고 그 파악된 본문의 내용과 의미에 따라 적용해야 한다. 적용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주석적으로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은 쉬지 않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을 주석하여 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심지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고 쉽게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아예 이런 문제에 관심도 없어 보인다. 이런 경우 유혹은 다른 사람이 준비해 놓은 설교를 베끼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표절이 나온다. 쉽게 설교하는 일에 익숙해 져 있는 오늘의 설교자들에게 석의의 과정은 몹시 수고스럽고 진액을 짜는 일에 습관화 되어 있지 않다보니 생략된 채로 설교를 준비하고 임하는 현실이 되었다. 이러다보니 한 편의 설교를 위해 일정 시간을 투자하거나 진액을 짜는 수고는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이런 과정을 미련하고 지혜롭지 못한 행동으로 치부하기도 하다. 한국의 개혁신학을 부르짖는 교회는 성경의 계시적 권위와 무오성을 수용하는 교리적인 건전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의 무오한 계시로서의 성경에 대한 믿음을 교리적으로 전폭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설교와 교육에서 그 믿음을 저버리는 모순적인 경향이 농후하다. 그래서 자신은 개혁주의자요, 개혁신학에 근거한 정통보수신학을 부르짖고 있으면서도 오순절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성령론이나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한 내용을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제 설교는 교단의 벽을 허물어 버렸다. 설교를 통해 모든 교파를 넘나드는 교리적인 연합정신은 역사적으로 많은 시행착오와 변증을 통해서 확증된 성경해석과 신학적 지평과 그 적용을 통해 교회를 지키려는 선배들의 수고를 허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제 설교는 목사보다 장로와 집사들이 더 잘할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언급되면서 특별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고민하지 않더라도 소위 설교에 부담 없이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히려 설교의 권위를 무너지게 할 뿐이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월터 카이저(Walter Kaiser)의 지적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교회가 많은 부분에서 건강하지 못하다는 이 전 세계적인 현상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교회는 방부제와 인공색소 그리고 화학조미료로 범벅이 된 불량식품을 지속적으로 먹은 까닭에 지극히 쇠약해지고 말았다. 교회는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영양결핍으로 인해서 너무 오랫동안 고통을 받은 결과 마침내 자신들의 무기력과 허약함이 해롭고 치명적인 음식을 섭취한 결과라는 사실 조차도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암 8:11)이 세계의 모든 교회에서 더욱 거세지고 있고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본 교단(예장합동) 총회를 대표하는 인사들의 공적 자리에서 행해진 설교를 듣다보면 지금 설교가 선포되고 있는 자리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격려사나 축사가 설교와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 반대로 설교가 격려사나 축사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설교의 독특한 생명력과 위엄이 사라지고 있다. 요즘 교회뿐만 아니라 공적인 자리에서 설교를 할 때 설교자는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을 여러 개혁신학의 계열 신학자들의 주석서 정도는 한번 정독하고 설교에 임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설교자들이 오히려 설교의 권위를 무너지게 하는 장본인이라는 사실에 우리 모두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
신비의 계시 로마서 제1강 : 성경관과 삼위 하나님 중심 성경 이해성경을 통한 신앙의 근본을 추구하기 위해 성경을 묵상하는 자들이나 설교의 사명을 받은 목회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성경관을 가지고 있다. 성경 묵상이나 설교자의 성경관은 자신의 성경에 관한 관점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어떤 신학과 신앙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성경의 관점이 달라진다. 여기서 신학이란 결국 성경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며, 역으로 이 신지식을 어떻게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신학이 달라진다. 그러한 신지식의 바탕 위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 세계와 일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결정된다. 목회자의 성경관이 무엇이냐에 따라 설교가 달라지고 실천적 행위와 그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생각과 사고가 달라진다. 성경을 과격하게 이해하면 과격한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목회자의 설교 문제는 결국 어떤 방법론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성경관에 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
예장합동, 동성애 독재법인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을 강력히 규탄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는 지난 5월 9일부터 11일까지 강원도 홍천에 있는 소노캄 비발디파크에서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제59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의 동성애 독재법인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을 강력히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성명서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의 동성애 독재법인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을 강력히 규탄한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비상대책위원장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박주민 의원은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법 추진을 밝혔고 법사위 중심으로 공청회를 통해 의견 수렴 수순을 밟고 있다. 동성애 독재법안인 차별금지법과 같이 국민적 반대가 많은 쟁점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당과 야당의 동수로 구성되는 법제사법위원회의 안건조정위원회에서 먼저 통과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민주당이 당내위원을 탈당시켜 법사위 소속 의원으로 사보임함으로 안건 조정위원회의 구성을 인위적으로 변경시키는 꼼수를 통해 사회적 합의가 없는 차별금지법까지 강행 통과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 연대도 4월 내에 차별금지법 통과를 요구하면서 국회 앞에서 단식 투쟁과 텐트 농성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적극적인 민주당 박주민 의원 권인숙 의원 김영배 의원 등과 사전에 모종의 상호 협의가 있어 보이고 심지어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기간 국회 앞 대부분의 텐트가 철거됨에도 차별금지법 단식 텐트를 영내로 들여와서 취임식장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재정시위 농성을 벌임에도 국회 사무처가 방관하고 있음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이는 새 정부가 들어서 자리 잡기 전에 국회 다수 의석을 이용하여 동성애 독재법인 차별금지법안을 서둘러 통과시키려는 시도로 밖에 볼 수 없고 대다수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이므로 공당이 취하지 말아야 할 태도임을 분명히 한다. 차별금지법은 결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될 수 없으며 진영 논리와도 전혀 관련이 없다. 이상과 같이 민주당 지도부가 차별금지법 통과를 시도할 경우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알아 한국 기독교계의 엄청난 반발을 받게 될 것을 엄중히 경고하며 아래와 같이 촉구한다. 하나, 종교를 탄압하며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 하나,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훼손하고 가정과 교회를 파괴하는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적극 중단하라. 하나, 동성애를 반대하는 대다수 국민을 범법자로 만들고 우리의 자녀들에게 동성애 옹호를 종용하며 청소년을 병들게 하는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장 백광식 목사 외 제59회 전국 목사장로기도회 참석자 일동.
-
[고전 강론 19] 세상법정으로 가는 교회들본문 / 고전 6:1-11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 6: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5:9-13절 말씀을 통하여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라는 말씀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왜 교회에서 내쫓으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교회의 거룩성과 성결성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내쫓으리라는 말씀은 오늘날 ‘출교’에 해당합니다. 물론 회개하면 됩니다. 모든 징계, 즉 권징(권선징악의 준말)은 회개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교회의 거룩성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작은 누룩이 되어 교회 전체에 확산하여 교회가 커다란 혼란에 빠집니다. 이번에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문제”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이 문제는 교회의 본질과 연결된 문제입니다. 교회는 특정 국가 안에 존재합니다. 국가 안에 존재한 교회는 국가법과 교회법을 동시에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 영역과 국가 영역에서의 소송의 문제 역시 중요합니다.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1. 소송 문제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질문형식으로 문제를 제기합니다(1-7). 사도 바울은 본문 1~7절까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7가지를 질문 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책망합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탐욕으로 인한 과도한 소송, 즉 고소·고발에 대해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책망은 두 부분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책망합니다. 사도는 이러한 소송은 결국 복음에 대한 오명과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로 인해 교회의 본질인 거룩성이 훼손된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차라리 성도들이 손해를 보더라도 고통을 참고 소송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호소해야 합니까? (1) 본문 1절에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책망한 첫 번째 부분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질문형식을 통하여 책망한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신자들이 서로 다툼이 생겼을 때 교회 내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끼리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성도들 앞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고소·고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감히’라는 강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의 불신자에게 맡기고 호소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모욕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성도들’과 ‘불의한 자들’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여기 ‘성도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자들’이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자들을 의미합니다. 즉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여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칼빈은 사단의 사주를 받은 불경건한 자들은 복음의 가르침 속에서 무엇인가 결점을 발견할 기회를 언제나 노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때 신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내놓으면 그들은 교회를 조롱할 수 있는 황금 기회로 포착하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고민은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 법정에서 우리의 권리를 보호받기를 회피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칼빈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들의 법정에서 우리의 권리를 보호받기를 회피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불가피한 경우에 믿지 않는 세상 법정에 소송을 하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법에 고소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책망하는 것은 그 방법이 아닌 다른 해결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손으로 믿는 형제들을 불신앙의 세상 법정에 먼저 고소하는 것은 잘못이다.” 칼빈은 그러나 “만일 당신을 상대로 한 고소 사건이 발생하였다면, 순서상 법정에 출두하여 당신의 사건을 해명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상황에 적용한다면 믿는 신자들이 세상 법정에 가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기본권으로 어느 누구도 이를 침해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옳은 일은 아닙니다. 이 사실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둘째, 세상을 심판할 성도들이 그 정도 사소한 사건 하나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까? (2) 본문 2절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종말에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마 19:2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심판권은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배심원과 같은 성도들도 이 심판에 참여합니다. 장차 세상을 심판하게 될 성도들이 교회 내에서 서로 이해관계로 인한 갈등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해결 능력이 없어서 세상 법정인 불의한 자들에게 교회 문제를 맡기느냐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교회 안에서 문제해결을 포기하고 불신자에게 이를 맡긴 일에 대해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내에서, 혹은 교인들 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믿음 안에서 해결하고 판단(판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좋은 길인지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셋째, 천사들도 판단할 성도들이 이런 일 하나 감당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3) 본문 3절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라고 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천사들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일쯤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최후의 심판에 동참할 성도들은 천사들도 심판하는데 그들의 일상생활에 관계된 사건들을 심판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입니다. 갈 1:8절에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장차 미래에 타락한 천사들에 대해 심판할 수 있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세상 법원에 맡길 수 있느냐는 책망입니다. 넷째, 교회 문제에 세상 재판관을 세워야 하겠습니까? (4) 본문 4절에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세상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세워서야 되겠느냐는 사도 바울의 책망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다툼을 판정해 주도록 불신자들을 심판자로 세우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섯째, 교회 내 교인들 간의 문제를 해결해줄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까? (5) 본문 5절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라고 합니다. 사도는 계속 책망하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한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 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그렇게도 없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문제, 성도들 간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임을 말씀합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도 없느냐”라고 하는데 자기 형제들 가운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가 한 사람도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여섯째, 신자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꼭 재판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6) 본문 6절에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라고 합니다. 신자가 신자를 고소하여,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꼭 재판을 받아야 하겠느냐는 질문으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교회의 문제, 교인들 간의 문제와 갈등을 조정하고 판단해 주고 해결해 줄 지혜로운 자가 있기는커녕, 형제와 형제, 신자가 신자와 더불어 송사합니다.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송사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차라리 소송하지 말고 손해를 보거나 속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7) 본문 7절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라고 합니다. 교회 내에서 서로 소송하는 것은 성도로서 이미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차라리 소송할 수 있지만 소송하지 않고 손해를 보거나 속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소송은 결국 탐욕과 이기적인 욕망이 사랑과 정의를 압도해 버렸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송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송사로써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사랑과 정의를 포기한 것입니다. 따라서 송사에서 이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승리가 아닌 패배를 의미합니다. 2.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저는 너의 형제로다”(8) 본문 8절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라고 합니다. 소송의 상대는 교회 안에서 같은 믿음을 갖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소송, 즉 고소ㆍ고발을 통해 불의를 행하고 상대를 속입니다. 소송을 통해 스스로 불의를 행하면서 속여 빼앗습니다. 그것도 교우들에게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격렬하게 고린도 교회에 책망한 이유는 부당한 탐욕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너희 형제로다”라는 말씀은 소송 대상자를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형제들을 자신의 탐욕을 위해 악하게 이용하는 것이 바로 소송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일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 아닌 것처럼 상대를 세상 법정에 고소한 행위는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죄악의 목록(9-10) 첫째, 죄악의 목록들입니다 (9). 본문 9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라고 합니다. 본문에는 오늘날 모든 죄악의 목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동성연애도 여기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여 교회 안에서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고소하면서까지 악을 계속하고자 하는 시도의 악행을 지적합니다. 여기서 사도는 악행의 모습, 불의한 모습과 함께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의한 자’는 본문에서 세상 법정에 형제를 고소하면서 형제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이란 말씀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내포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대 전제하에 악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결국 악행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일 수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한 자”, “탐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 “탐색”이란 헬라어 ‘말라코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가볍고 얇은 의복을 지시합니다. 이 의복은 부자나 지위가 높은 자들이 입었습니다. 이 단어가 본문에서는 도덕성과 연관되어 사용할 때는 자신을 사치스럽고 방탕한 삶에 던져 버리는 자들을 지시합니다. 이들은 방종을 인생의 최대 목적으로 생각합니다. 탐색은 방탕과 육체적인 쾌락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이런 육체적인 방종과 음행은 탐색과 연동되어 있습니다. 이런 탐색이 고린도 지역에 팽배해 있었으며, 이것이 고린도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바로 누룩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특히 “남색하는 자”란 헬라어 단어인 ‘아르세노코이타이’는 이교도들에게 흔한 악행들입니다(롬 1:27). 이런 악행이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는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죄악들이 있습니다 (10). 본문 10절에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라고 합니다. 도둑과 탐욕이 많은 사람과 술 취하는 사람과 욕설을 일삼는 사람과 착취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둘째, ‘그러나’라는 단어를 세 번 사용하면서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11). 본문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본문 말씀은 “너희 중 몇은 이와 같은 자들이었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일부 신자를 의미하면서도 전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는 그 누구도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까지는 이 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였을 뿐입니다(칼빈). “너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영으로 그러나 씻겼고, 그러나 거룩해졌고, 그러나 의롭게 되었다”라는 말씀입니다. 강조의 효과를 위해 세 번 되풀이하는 ‘그러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고전 12:13). 그때 그들이 죄의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9절에서 나열한 죄 목록을 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며 사는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세상 법정에 쟁송은 아직도 그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권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삶의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증명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명령입니다. 4. 교훈과 묵상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교회 성도들이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주어진 기본권을 박탈 내지 침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상 법정에 소송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는 청구의 개인의 권리입니다. 그 청구는 고소·고발로 이어집니다. 교회 문제로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는 권리를 행사하였을 때 교회에 유익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심지어 소송의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됩니다. 교회 안에서 발생한 문제로 나에게 주어진 권리로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거룩한 하나님 교회의 본질을 지켜내기 위해 소송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 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볼 때 교회 안에서 교회 담임목사와 교인들과의 관계, 교인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서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법원 소송으로 이어지면 안 됩니다. 마 18:15-16정에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계속하여 17절에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교회에 말하고”라는 말씀은 교회 치리 기관(징계기관)을 의미합니다. 장로교회에서는 이 치리 기관이 당회입니다. 교회 당회의 권위가 서 있어야 합니다. 교회 문제는 교회 당회를 통하여 적법한 절차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진행되어야 합니다. 당회가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집니다. 당회가 분쟁이 발생하면 교회 분쟁이 일어납니다. 법원 소송으로 가지 않고 교회의 권위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문제가 있어서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며, 이는 불행한 일입니다. 소재열 목사(김포 새사랑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