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논단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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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휴전협정 70주년(1953.7.27.-2023.7.27)휴전 협정 조인식 © 리폼드뉴스 한국 전쟁 정전협정(1953년 7월 27일) 70주년을 맞이했다(2023. 7. 27)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Dwight David Eisenhower)는 미국의 34대 대통령(1890~1969)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유럽 연합군 최고 사령관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52년 11월에 한국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어 1956년에 재선되었다. 아이젠하워(좌)와 스탈린(우) © 리폼드뉴스 당선 직후 아이젠하워는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인들은 한국에 온 미국의 대통령을 열열히 환영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에서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952년 11월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53년 3월 5일에는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했다. 강철에 사나이라는 공산권 최고 통치자가 죽음 것이다. 이는 곧 전쟁 종식이 멀지 않았음을 뜻했다. 스탈린의 장례식 직후 소련은 긴급 각료회의를 열었고 그 자리에서 휴전대담 재개를 결정했다. 새 지도부는 소련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래서 휴전 회담은 급물살을 탔다. 1953년 4월 10일에 유엔측과 공산측은 부상포로 협정에 서명했다. 회담장에서 포로 문제가 논의된지 1년 4개월 만이었다. 부상포로 교환은 4월 20일부터 시작되었다. 유엔측은 6천 6백 70명을 보냈고 공산측은 684명을 돌려보냈다. 이승만 © 리폼드뉴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부상포로들도 북으로 돌아갔다. 포로들은 이동중에 인공기를 흔들며 비록 포로의 신분이지만 아직 공산주의 정신이 건재함을 드러내려 했다. 그들은 유엔측이 제공한 옷과 신발, 담배 등 자유 진영의 모든 것을 벗어던졌다. 부상포로 교환이 시작되자 한국에서는 휴전 반대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서울에서는 연일 휴전 반대 집회가 열렸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만 명의 군중이 집회에 참석했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대규모 시위가 연일 벌어졌다.이들이 외친 구호는 “통일없는 휴전은 결사 반대”였다. 남한 사람들은 피흘리는 이 전쟁이 그만 끝나기를 바랬다. 그러나 지금 휴전을 받아들이기에는 불안감이 너무나 컸다. 그것이 사람들을 거리로 나서게 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정전을 코 앞에 둔 6월 18일부터 약 5일간, 2만 6천 명이 넘는 반공포로들을 석방해 버렸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특사까지 파견해 가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설득했다. 이때 미국은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로버트슨 특사를 파견해 이승만과의 타협을 모색했다. 한국전쟁 발발 3년이 되는 1953년 6월 25일 로버트슨 특사가 한국에 도착했다. 이튼날부터 이승만과 로버트순 특사와 작은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보름간의 줄다리기 끝에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상호방위조약과 경제원조를 보장받는 대신 휴전을 방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휴전협정을 눈 앞에 둔 7월 공산군의 마지막 대 공세가 펼쳐졌다. 공산군의 공세는 한국군의 방어하고 있는 중부전선 금성지구에 집중되었다. 남한의 유일한 전력 공급은 화천발전소가 그곳에 있었다. 이 시기 포탄 소비량은 전쟁 기간 중 최대치를 기록했고 사상자도 15만 명에 달했다. 금성 전투는 한국 전쟁 말기인 1953년 7월 휴전이 임박해지고 있을 때, 금성 지역 북방에 위치한 금성지구에서 대한민 국군과 중공군이 치른 전투이다. 7·13 공세라고도 한다. 휴전햡정 서명지 © 리폼드뉴스 전쟁의 끝, 그날이 다가왔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159회 본회의를 끝으로 정전 협정이 조인되었다. 양측 대표인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미 육군 중장과 북한과 중국 공산군을 대표한 남일 조선인민군 대장은 2년 전 첫 화담 때처럼 인사 한마디 없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현정 문서에 서명을 했다. 이날 협정의 정식 명칭은 ‘정전협정’이었다. 현정문은 “한국 충돌을 정지하기 위하여”라고 언급된 전문과 5조개 64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협정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조미전쟁 휴전협정-정전협정본문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하기의 서명자들은 쌍방에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충돌을 정지시키기 위하여서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할 목적으로 하기조항에 기재된 정전조건과 규정을 접수하며 또 그 제약과 통제를 받는데 각자 공동 상호동의한다. 이 조건과 규정들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이며, 이는 오 한국에서의 교전 쌍방에만 적용한다. 한국 전쟁을 종결하는 조인식장 어디에도 남한 관계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수석 대표들의 서명 후 군사협정문은 군사 지휘관들에게 전달되었다.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가 문산 유엔군 전방 사령부에서 협정문에 서명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그날 오후 10시 평양에서 서명했다. 다음날 개성에서 중공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가 서명하므써 휴전조인이 마무리 되었다. 협정문에 서명하면서 1950년 북한 공산군의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된 지 3년 1개월 2일 만인 이날 밤 10시에 한반도에서 긴 총성이 멎었다. 이승만만이 참전 당사국 중 유일하게 협정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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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청회 발표 논문] 길길성 교수의 능동적 순종 및 순종의 의미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신학부는 지난 11일 총회 회관에서 제107회 수임사항인 "능동적 순종"과 "회심준비론"에 관한 공청회를 가졌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전 조직신학 교수인 김길성 박사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 관련된 건”에 관해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 전문은 아래 첨부 파일로 열람하여 확인할 수 있다. 본 논문은 107회기 총회 신학부에서 연구 의뢰한 논문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 관련된 건”으로 필자에게 의뢰된 건에 대한 연구논문이다. 김길성 교수는 "최근 수년 동안 국내에서 조직신학이나 역사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 특히 역사적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순종 교리를 중심으로 열띤 논쟁이 있었다"라고 먼저 언급했다. 그동안 드러난 논쟁에 대해 "한편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구분하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구분을 부인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자체를 아예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라고 말하면서 이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 전문 아래 첨부 파일로 확인할 수 있다. 김길성_교수의 능동적순종및 순종의의미.hwp (churchla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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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목사 구속사 설교 해설 6] 네덜란드에서의 구속사론과 모범론의 논쟁©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 네덜란드에서 1930-40년대에 개혁교회의 성경 해석과 설교는 설교자들이 역사적 본문을 설교하면서 본문에 언급된 사람들을 의례히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한다는 형식의 설교였다. 여기서 ‘모범적 설교’라는 말이 생겼다. 역사적 본문에 대한 모범적 설교는 루터나 칼빈조차도 이 전통적인 설교 방법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모범적인 설교의 주장자는 바빙크(Herman Bavinck와는 구별), 데이크(구속사 측의 Van Dijk와는 다름), 다우마, 하이젤, 스켈하아스, 스트래이프케이크 등이다. 이들은 모범적 설교에 대한 극단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모범적 접근의 합리성과 배타적인 구속사적 접근의 불합리성을 주장했다. 모범론적 설교를 주장한 다우마는 “우리의 조상들은 구속사가 그리스도를 그 중심에 두는 통일된 구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성경에 묘사된 특정 인물들을(성경의 자료들을 이용하여) 따로따로 취급하여 그들을 심리학적으로 그려내고, 그들의 투쟁과 시험, 그들의 힘과 연약함을 말하고, 그리고는 성경 인물들의 경험과 오늘날 신자들의 투쟁 사이에 평행선을 긋는 일이었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우리 조상들은 성경 인물들의 미덕을 모두에게 모범으로 추천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악과 연약함을 경고로 제시하기도 하였다.”라고 했다. 모범론 측의 주장을 함축적으로 보여 준 대목이다. 모범론 측은 구속사적 방법만을 배타적으로 사용할 경우, 객관적인 설교, 단순한 설명, 구속사에 관한 강의, 현실에 대한 적실성이 없는 설교가 되어 버린다. 이런 이야기는 구속사적 설교를 주장한 사람들에게 보여 준 공통된 특징이었다. 모범론 측은 모범적 “요소”의 정당성을 지지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객관적인 그것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것까지 원하고, “설명뿐만 아니라 적용”까지 원하며, 하나님의 행동뿐만 아니라 사람의 반응까지 원한다. 그들은 구속사적 방법 그 자체를 반대하지 않지만, 모범적 “요소”를 배제하고서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반대했다. ▲ ©리폼드뉴스 이러한 모범론에 반대한 구속사론 주장은 스킬더, 스피엘, 판 데이크, 판 트 피엘, 페인호프 등이었다. 구속사 설교 접근에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스킬더는 “여기저기서 우리가 만나는 사순절 설교들은 여전히 그리스도 주변의 인물들이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설교들이다. 거기에는 유다, 베드로, 빌라도, 헤롯, 산헤드린, 마리아 등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그들의 내적 갈등, 그들의 위로, 그들의 굳어진 마음). 그러나 그 반면에 첫째 되고 가장 우선된 문제, 곧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무엇을 체험하게 하셨는가, 성자께서 당신 주위에 있는 인물들의 행동 안에서 또 그것을 통하여 무엇을 체험하셨는가 하는 것은 잊혀져 있다”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셔야 하지,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구속사론 자인 판 데이크는 “역사적 본문들을 모범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말씀의 사역’이라고 옳게 불리울 수 없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모범론 반대자들의 교리적 건전성이 아니라, 그들이 역사적 본문을 취급하고 설교하는 그 방식이다. 그리고 그런 설교의 내용에 관한 논쟁점은 우선적으로, 선포되는 진리들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진리들이 그 설교 본문에 실제로 계시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판 데이크는 “말씀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본문에서 주시는 그 메시지를 회중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필자의 고민은 모범적 설교는 ‘모범적 적용’이 문제가 아니라 ‘모범적 해석’이었다. ‘모범적 해석’과 ‘모범적 적용’은 다르다. 구속사론이 ‘모범적 적용’도 반대하고 ‘모범적 해석’도 반대한 것이다. 이것이 옳은 주장이냐에 대한 논쟁이었다. 모범론 자들이 적용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본문을 모범적인 해석에 대한 주장은 문제가 되었다. 구속사론 자들은 설교에서 적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범론이나 개혁신학의 전통하에서 설교란 “설명뿐만 아니라 적용”, 즉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명 및 적용”을 주장해 왔다. 설교란 본문에 대한 해석과 그에 따른 적용으로 본다. 그러나 구속사론자들은 여기서 적용을 부정한다. 설교에 있어서 본문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하고 해설하면 적용은 자동적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이런 이유로 적용은 성경 본문에 덧붙인 이원론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원론이란 설교에서 먼저 본문에 대한 설명과 그다음으로 진행된 적용의 형식을 의미한다. 구속사론자들은 이원론적 적용을 거부한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회심한 자의 거울로,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된 반면, 회심하지 않은 자의 경고를 받을 수 있다. 유다가 회심하지 않은 자의 거울로, 경고의 모범으로 제시되는 반면, 회심한 자들이 위로받을 수 있다. 이런 형식의 모범적 해석과 적용을 거부한다. 여기서 구속사론자들은 적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더 엄밀하게 말해서 적용의 성격이 다르다. 본문 해설 후 적용하는 형태의 설교가 아니라 본문을 구속사적으로 설명하면 자동적으로 적용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구태여 적용을 덧붙일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속사적 설교는 모범론자들에 의해 그것은 구속사에 관한 강의나 현실에 대한 적실성이 없는 설교라고 주장한다. 모범론자들은 ‘모범적 적용’은 물론 ‘모범적 해석’을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본문을 해석할 때는 성경계시의 유기적인 통일성에 의한 하나님의 구속사.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외면하면서 인물들의 모범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모범적 해석은 성경 본래의 의도오아 부합하느냐가 문제이다. 한국교회에서 구속사적 설교와 모범론적 설교에 대한 논쟁은 네덜란드에서 있어서 논쟁의 핵심 이슈에서 벗어난 한국적 구속사적 설교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 문제를 계속 알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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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목사 구속사 설교 해설 5] 삼위일체론적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사적 설교 개념©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 삼위일체 신앙을 믿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미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삼위일론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이해와 설교가 필요하다. 필자는 앞으로 네덜란드에서 논의되었던 구속사 설교와 모범론적 설교에 관해 확인하면서 양자 논쟁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한국에서 제기된 구속사 설교는 네덜란드에서 제기된 구속사 설교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구속사적 설교를 기준으로 평가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단지 네덜란드에서 제기된 구속사 설교는 단순히 모범적 적용을 반대하는 형식으로만 알려지는 경우가 많다. 구약성경 모든 본문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를 해야 한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 기독교는 구원의 유일한 길로로서 그리스도만을 믿는 종교라면 가능하다. 이때 그리스도만을 강조하는 것은 옳은 견해이다. 그러나 성경의 독특한 신지식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외면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강조해야 한다면 이는 성경의 원리를 반영하지 못한 결과임이 틀림없다. 이는 구속사 설교의 한계이다. 하나님, 성령을 말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강조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라고 주장한 구속사 설교의 주장은 성경을 오해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모든 종교는 초월한 신(神)을 믿는다. 구원이 발생하려면 초월하신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하는 신을 믿어야 구원이 발생한다. 독일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초월 세계와 현상세계로 구분하며 초월한 신을 현상계에서 신을 안다고 할 때 그 신은 이미 신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계시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기독교는 초월해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으로 말씀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통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와 성육신 교리를 중요한 기둥으로 삼는다. 이 두 교리를 인정할 때, 이신득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가 형성된다. 이 세 교리를 지탱하게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려고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도에 관한 말씀을 가르치고 확실하게 이해하게 하는 일을 한다. 성령 오심의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증거이다(행 1:8).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로 세우셨다. ▲ ©리폼드뉴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임재하신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 충만한 성령의 임재는 성령의 지배를 의미한다. 유대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믿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는 하나님이여야 구원이 임한다고 말씀한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설교학 교수인 김창훈 교수는 “극단적인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서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삼위일체론’ 교리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 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주제인 창조, 타락, 구원의 전 과정에서 서로 구분되지만, 본질은 동일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동등하게 강조되어야 하고, 기독교 신앙과 복음도 삼위 하나님 관점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한다.”라고 했다(김창훈, 『삼위 하나님 중심 설교). 원리를 적용하여 설명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총신대 신학대학원 설교학 김대혁 교수 역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믿어야 할 구속사 이야기의 전반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것과 더불어, 그 구속의 이야기 속에서 성도가 본문 세계가 요구하는 것을 살아내어야 하는 인생 이야기를 함께 담아내도록 하는데 충실한 설교 방법론이어야 한다.”라고 한다(김대혁, “본문성이 드러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한 제안”, 『복음과 실천신학』). 전 총신대 신학대학원 설교학 교수인 류응렬 교수는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장대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구속사적 설교의 한 방법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말하는 설교 철학이라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류응렬, “구속사적 설교” 「신학지남」). 류응렬 목사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을 본문에 적용하여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리 적용과 해석(설명)을 구분하고 있다. 구약의 역사적 본문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 중심의 삼위일체론적인 하남의 구원에 대한 선포가 구속사 설교에서 복음 선포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신구약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적용된 논지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속사 적 설교는 해석이 아닌 적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앞으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확인해 보고자 한다. 구속사적 설교에서 이 부분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삼위일체론적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사 설교의 원리를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에 어떻게 적용하여 설교(설명)할 것인가가 필자의 주장에 대한 논지이다. 이런 개념은 구속사적 설교는 본문 해석이 아닌 설명을 위한 적용적 원리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설교자가 강단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신앙강좌 형식으로 행한 설교는 풍성한 하나님의 계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없다. 설교롤 신앙고백적 지식이나 적용 일변도의 설교로는 한계가 있다. 이를 설교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설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신앙강좌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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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목사 구속사 설교 해결 4] 한국교회에서 구속사 설교 연혁©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에서 1985년 1월에 김영구 목사에 의해 일반대학교원 석사학위 논문이 발표되었다. 논문 제목은 “구속사적 설교론”이었다. 부제목으로 “Greidanus 와 Clowney의 이론을 중심으로”였다. 이 논문에 대한 지도는 정성구 교수였다. 1985년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득원의 “구속사적 해석 원리에 관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정성구 교수는 제자의 구속사 설교 논문을 마친 이후 1987년 「신학지남」(제54권 4집)에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와 방법”의 논문을 발표했다. 총신대학교에서 김영구 목사의 논문이 발표된 해의 봄에 신성종 교수는 “해석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 강단의 문제점”(「신학지남」(제52권 1집)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모두 다 그레다이누스의 박사학위 논문에 근거했다. 구속사 설교 논쟁의 한 중앙에서 이를 변호했던 네덜란드 (작은) 캄펜신학교의 구속사를 옹호했던 고재수(N.H.Gootjes) 교수가 부산 고신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면서(1980~1989년) 1987년에 「구속사적 설교의 실재」(CLC)를 출판했다. ▲ ©리폼드뉴스 필자는 1986년 2학기에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Th.M)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류호준 교수(백석대학교 구약교수로 은퇴)로부터 “구약사”에 대한 한 한기 강의를 들었다. 이 강의는 철저히 원고에 의한 강의였다. 여기서 필자는 많은 도전을 받았으며, 구약성경에 관한 성경관을 학문적으로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강의는 총 9강으로 진행되었는데 미국 칼빈신학교를 졸업하고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1970년에 실천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시드니 그레이다누스(Sidney Greidanus)의 “Sola Scriptura: Problems and principles in preaching historical texts”(오직 성경: 역사적 본문에 대한 설교의 문제점과 원리들)의 논문을 소개하기도 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필자는 1987년 신학교 때에 “에스더서와 구속사와의 관계성”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칼빈」(1987, 제5집). 부산 고신대학교 교수인 고재수 교수를 서울로 초빙하여 강의를 듣기도 했다. 필자는 1989년에 총신신대원 재학시 “구속사적 성경이해와 설교 이해에 대한 논문 및 자료 모음집”을 편집했다. 당시 한국교회 최초로 발표된 구속사적 설교와 관련된 학위 논문들을 모은 자료집이었다. 이 자료는 구속사 설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필자가 1989년 5월 보급한 구속사 설교 자료집 © 리폼드뉴스 정성구 교수는 1987년에 구속사 설교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이후 자신의 설교학의 방향을 결정하기도 했으며, 당시 총대학교 신대원의 설교학은 구속사적 설교였다. 박희천 교수의 설교학은 구속사적 설교는 아니었다. 두 교수의 총신에서 설교학은 목회자들에게 그대로 투영되었다. 구속사 설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는 구속사 설교의 열풍이 불었다. 1980년대 후반 한국교회의 성장 이면에 원초적인 문제인 성경해석에 의한 설교에 관한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주로 주제설교와 모범적 설교에 한계를 느낀 많은 목회자들이 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구약성경을 설교할 때 역사적 본문들을 단순히 하나의 모범적으로 사용할 때가 많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을 예로 들면서 우리도 이를 본받자는 설교를 아무런 비판없이 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계시의 역사성을 완전히 배재 해 버린 것으로 성경의 가록목적이 아니라는 논리가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 언급한 그레이다누스의 박사학위 논문이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1989년)가 출판되었다. 초판에는 번역본에 자신의 구속사적 설교에 대한 학설을 서론에 첨부하였으나 나중에 이 부분이 삭제되었다. 구속사에 대한 붐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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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목사 구속사 설교 해설 3] 기독교(그리스도교)의 성경 이해와 설교성경을 어떻게 이해하여 설교할 것인가? 설교는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넘어야 할 태산과 같은 고지이다. 설교는 성경을 그 원천으로 하여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는가? 우리는 성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으면서 그분을 경외하며 숭배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성경에 대한 하나님에 관한 이해와 믿음이 모호하면 신앙생활 자체도 모호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하나님 계시의 말씀으로 믿고 그 성경 계시를 통해 하나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오늘날 설교와 신앙생활의 전 영역에서 너무나도 소중하다. 우리 교회를 기독교(그리스도교)라고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구원을 말할 때 죄로부터 구원을 말한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만큼은 그냥 용서해 주시는 일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훼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에게 임하여야 영생과 구원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영생과 구원을 받는 방법은 인간 땅에는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구원이 임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기독교)라고 한다. 최근에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라는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도서출판 다함). 이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와 성경 읽기의 원리의 실제를 부제목으로 했다. 우리는 여기서 심각하게 질문해야 하는 것은 왜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변이 없는 한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또 다른 시행착오를 범할 것이다. 그리스도만을 강조한다는 것은 모든 성경을 다 말한 것은 아니다. 클라우니는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회당에서의 설교와 달리 구속의 드라마 전체를 고려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을 그리스도와 연관지어 보는 것은 그것을 더 큰 문맥, 즉 계시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목적의 맥락에서 본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중심을 오해하는 경우에 대해서 “그렇다고 본문이 주는 특정 메시지를 무시하거나, 만능으로 써먹을 수 있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마무리를 써 놓고 매주 필요할 때 골라가며 쓰라는 말은 아니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구약에 계시된 살아계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확실히 성육신 사건은 아직 그림자 속에 있던 구약의 가르침에 빛을 비추어 주었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구속사는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에 따라 세워졌다”라고 했다. 특히 “구속사의 각 시대들은 삼위일체 제2위 격의 주되심을 보여준다. 구속사 속 모든 시대의 정점은 주의 오심이다”라고 한다. 그는 구약성경을 구속과 계시의 역사를 통해 성취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여 오늘날 설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해석에 있어서 도덕주의로는 성경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라고 말하므로 성경에 대한 적용 적 설명을 도적주의로 적용하여 설명하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모범적 적용과는 다른 개념이다. 클라우니는 전형적인 구속사 설교에서 “구속 역사는 언제나 계시 역사와 함께한다.”, “구속사와 계의 역사가 전개되면서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과 행적이 함께 엮인다.”, “구약은 인간 역사와 구속사를 위한 하나의 위대한 계획을 따라간다. 이 계획은 구분으로부터 시작될 뿐이니라 성육신하신 아들 가운데 드러난 그분의 임재를 중심으로 세워진다”라는 주장 등은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주장들은 종래의 구속사 설교가 “구속사적 설교는 구속사적 해석이 아니라 구속사적 적용의 결과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참조, 채경락, “구속사적 설교는 해석인가, 적용인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설교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속사 설교는 왜 그리스도 중심인가? 여기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의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기에 결국 그리스도 중심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본다면 결국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일 수밖에 없다. 논점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강조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강조한 이유가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구원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강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말할 수 없다. 이러한 형식논리가 무너지면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범할 것이다. 구속사적 성경해석과 설교 논의에서 이 점이 간과한 점은 없는가를 심각하게 되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적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이해, 설교여야 한다. 이러한 형식논리를 리딩하지 못한다면 성경의 핵심 논지를 놓치게 될 것이며, 2천 년 동안 무엇 때문에 기독교(그리스도교)가 투쟁해 왔는가를 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 바른 성경 이해와 하나님에 관한 계시에 의한 지식, 믿음,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으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여기에 자신의 반성 능력이 새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소재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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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목사 구속사 설교 해설2] 팀 켈러 목사와 김창훈 교수 구속사 설교 평가미국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했던 팀 켈러 목사(Timothy James Keller, 1950-2023)가 72세를 일기로 지난 5월 19일(이하 현지 시각) 췌장암으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팀 켈러 목사는 소천하기 이틀 전 유언처럼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제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저를 본향으로 보내 주소서(I’m ready to see Jesus. I can’t wait to see Jesus. Send me home).” 그의 목회와 설교는 “복음 중심적”(gospel-centered)인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은 복음 설교로 알려져 있다. 그에게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적 설교에 영향을 끼친 사람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실천신학 교수였던 에드먼드 클라우니 박사(Edmund Clowney, 1917-2005)로부터 배웠다는 것이 류호준 교수의 설명이다. 클라우니 박사의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가 최근 번역하여 출판되었는데 이 책의 원리가 팀 켈러 목사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팀 켈러가 훗날 뉴욕 한복판에 리디머 장로교회를 개척하여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개척은 그의 신학교 스승인 하비 콘 교수였다. 하비 콘(Harvie M. Conn, 1933-1999) 교수는 팀 켈러의 목회학 박사의 지도교수였다. 하비 콘 교수는 과거에 총신대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그가 한국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도시 선교학을 가르쳤다. 그때 팀 켈러가 훗날 뉴욕 한복판에 리디머 장로교회를 개척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팀 컬러의 도시 선교와 사회적 정의에 대한 목회에 영향은 신학교 스승인 하비 콘의 영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팀 켈러에게 영향을 끼친 교수는 하비 콘 교수의 목회와 에드먼드 클라우니 박사의 성경해석과 설교에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 중심적 구속사 설교였다. 이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인 김창훈 교수는 팀 켈러 목사에게 전형적으로 구속사 설교의 한계가 있다며 「신학지남」(88/1, 2021)을 통해 “‘극단적’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비평적 연구”로 평가했다. 이 평가에서 김 교수는 팀 켈러 목사의 설교는 “오늘날 강단의 회복을 위한 탁월한 설교학적 제안들을 제공하고 있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특히 “무엇보다도 그가 강조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오늘날 강단이 놓치고 있는 설교의 본질에 대한 강한 도전을 준다.”라고 먼저 긍정적인 부분을 평가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러의 설교학적 제안을 ‘극단적인 구속사적 설교’”라고 평가하였다. 구체적인 평가에서 “무엇보다도 극단적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문제는 ‘그리스도 일원론’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리스도 일원론적 설교’란 ‘삼위 하나님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만을 별도로(또는 특별히) 강조하는 설교’를 의미한다.”라고 했다. 김창훈 교수는 대안으로 “복음을 바르고 온전히 전하기 위해서는 ‘삼위 하나님의 관점’에서 전해야 한다고 믿는다. 구원을 계획하시고 시작하시고 진행하시고 완성하신 성부 하나님, 하나님의 계획을 몸소 실행하시고 성취하신 성자 예수님 그리고 그 구원을 적용시키고 이끌어 가시는 성령 하나님이 함께 언급되고 강조되어야 한다”라고 한다. 또한 “전체적인 그의 설교를 종합할 때 많이 양보한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그리스도 일원론의 위험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극단적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의 그리스도 일원론을 극복하고 ‘삼위 하나님 관점에서 구속의 전 과정을 포함하는 온전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두 번째로 해석학적 오류로써 ‘모형론화와 영해’를 들고 있다. “극단적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해석학적 오류’의 가능성”을 지적했다. 모든 설교는 “바른 주해에 근거해야 하고 해석학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여러 가지 해석학적 오류의 함정들이 곳곳에 대기하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더더욱 그렇다”라고 평가했다. 모형론 화와 영해의 문제점으로 “모형론 화와 영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이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역사적, 성경적, 신학적 근거 없이 ‘마음껏’ 또는 ‘자기 원하는 대로’ 사건이나 인물이나 제도에 구속사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예수님을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영해와 모형론 화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설교자가 말씀의 청지기(또는 종)가 아니라 말씀의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말씀이 자신 원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있다.”라고 평가했다. 다음 세 번째로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설교학적 오류: 모범적 설교의 배척 또는 무시”라고 지적했다. 이 문제는 구속사적 설교가 뜨거운 논쟁의 대상으로서 “극단적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또 하나의 문제는 설교학적 오류, 즉 모범적 설교의 배척 또는 무시(또는 모범적 설교를 구속사적 설교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모범적 설교에 대한 배척은 “오늘날 극단적 구속사적 설교를 강조하는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과 그래암 골즈워드(Graeme Goldsworthy)에게서도 발견된다.”라고 했다. 김 교수는 “팀 켈러가 탁월한 통찰력과 실행력을 가진 이 시대에 영향력 있는 사역자요 설교자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전제한다. 하지만 “그의 설교학적 제안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였으며, “그의 설교학적 제안이 ‘극단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결국 “극단적 구속사적 설교는 신학적으로, 해석학적으로, 설교학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심각한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그러한 오류들은 극단적 구속사적 설교를 주장하는 분들에게서 자주 발견되곤 한다. 팀 켈러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김창훈 교수는 결론적으로 “극단적 구속사적 설교에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오류로서 ‘그리스도 일원론적 설교,’ ‘모형론 화와 영해,’ ‘모범적 설교의 배척 또는 무시,’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왜곡’”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극단적인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문제 또는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 ‘(삼위) 하나님 중심적 구속사적 설교’”를 제창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하나님 중심적 설교』(God-Centered Preaching)(호밀리아 刊)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현재 총신대학교 설교학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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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목사의 구속역사 해설1]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리스도 중심“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24:44) 2천 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논쟁 중의 하나가 성경의 신적 권위와 그 성경에서 계시한 유일신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신지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성경의 계시는 그가 피조물이 아닌 영광과 권능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을 때만 가능한 진리요, 교리이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칼빈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은 그 어떠한 구원과 사랑과 기도 응답도 주신 일이 없다고 말한다. 구약성경의 모든 계시는 정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약속의 말씀, 구원의 말씀이며, 신약은 이러한 예언과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말씀한다. 이제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설명돼야 하며, 그 설명을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어떻게 구원하시는 알게 한다. 그 하나님의 삼위일체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 말씀임을 믿는다. 그 성경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통해 하나님을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유일신이 삼위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에게 구원이 임한다.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의로우심이 우리에게 임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이다. 기독교(基督敎)를 크리스트교(Christian religion) 또는 그리스도교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지식하고 구원이 임한다는 종교이다. 종교가 아닌 생명이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종교라고 부른다. 기독교의 원천은 성경이요, 그 성경은 신구약 성경이며, 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인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래서 기독교, 즉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 선포 형식이요, 구원의 형식이며, 신앙의 원리임과 동시에 설교의 형식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만 강조하면 그만이라는 것이 아니다. 이를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monism)이라 한다. 오직 예수란 그 예수를 통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자기계시와 구원이 불가능하므로 ‘오직 예수’이다. 이를 믿는 종교라 바로 기독교, 그리스도교라고 한다. 신약은 물론 구약성경을 말할 때도 이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기독교(그리스도교)는 구약과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삼는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타나크( Tanakh, Hebrew Bible, 유대교 성경)는 유대교의 경전으로, 기독교의 구약성경에 해당한다. ‘타나크’는 성경을 구성하는 세 분류명인 토라(תורה), 네비임(נביאים), 케투빔(כתובים)을 늘여서 쓴 형태이며, 각 분류명의 맨 앞 글자를 따서 약칭으로 ‘타나크(תנ"ך)’가 된 것이다. 이를 히브리 성경이라 한다. 유대교의 히브리 성경과 기독교의 구약성경에 해당하나, 유대교는 신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신약성경을 전제한 구약이라는 용어를 원치 않는다. 그냥 히브리 성경이라 한다. 문제는 유대교가 히브리 성경을 해석하는 것과 기독교가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다르다. 본문의 문맥과 역사적인 배경, 문학적인 배경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히브리 성경의 신지식과 구원에 대해서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맥락에서 해석한다. 여기서 오늘날 우리 설교자들이 구약의 역사적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하여 설교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는 구속사적 해석과 모범론적 해석으로 논쟁이 있어 왔다. 구속사적 설교의 장단점, 즉 공헌한 점과 잘못 이해한 부분, 모범론적 해석 역사 공헌한 점과 잘못 이해한 부분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 강단설교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중요한 요건이 생각하여 시리즈로 연재하고자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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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훈교수 신학 논단 1] 부흥의 당위성바른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제도적인 개혁과 변화와 함께 반드시 필요한 것은 부흥이다. 그동안 부흥이라는 용어가 많이 잘못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부흥을 단순히 숫자가 많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부흥은 일차적으로 ‘다시 살아나는(Re-vival)’ 것이고, ‘신앙의 생동감과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혁은 영적인 갱신과 부흥이 뒤따르지 않으면 오히려 어려움과 부작용을 낳는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자주 경험하였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나 부동산 정책들이 늘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였는데, 그것은 제도가 나빠서가 아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도입하여도 국민들의 기본적인 자세가 변하지 않으니까 실제적인 효력을 볼 수 없었다. 교회 개혁도 마찬가지다. 개혁과 영적인 부흥은 늘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미지근하게 신앙생활하기를 원치 않고 구원받은 기쁨과 감격으로 뜨겁고 열정적으로 신앙 생활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부흥이다. 이렇게 다시 살아나는 영적인 부흥이 있을 때 바른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교회 되도록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은 분들은 모두 부흥을 경험하였다. 부흥의 원형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이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하여 엄청난 영적인 변화와 부흥을 경험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 2000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건인 종교 개혁을 주도하였던 사람들도 모두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루터는 심각한 신앙의 번민 속에서 로마서 1:17의 말씀을 통하여 복음의 본질을 깨닫고 영적인 변화와 부흥을 경험하였다. 칼빈은 어떻게 부흥을 경험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성경 다음으로 영향력이 있는 책으로 평가받는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기 1-2년 전에 예상치 못한 성령의 임재로 회심과 헌신을 결단하는 영적 부흥을 경험했다고 한다. 루터와 칼빈과 함께 3대 종교 개혁자의 한 사람인 쯔빙글리도 흑사병으로 인한 생사의 기로에서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고 종교 개혁의 선봉이 되었다.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영적 변화와 은혜를 경험하였는데, 그러한 영적인 부흥을 경험할 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성경적 교회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위대한 종교개혁에 헌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부흥은 사회를 변화시킨다. 18-19세기에 존 웨슬리(John Wesley),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조나단 에드워드(Johathan Edwards), 찰스 피니(Charles G. Finny) 등을 통해서 일어났던 영국과 미국의 신앙 부흥 운동은 당시에 타락과 부패가 극치에 달했던 영국과 미국 사회를 바꾸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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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좌우익 갈등과 이승만 대통령의 좌익 전쟁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 8. 15) (리폼드뉴스) 1945년 8월 15일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을 받았다. 해방(解放; 풀어 높다)이라는 의미는 “구속이나 속박을 풀어 자유롭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하여 하나님이 죄에 얽매여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해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아 그들에게 억압을 받은 상태에서 그 속박으로부터 풀어 자유롭게 된 날이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지만, 한반도는 독립국가로서 자치권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혼란이 있었다. 해방 전에 일본은 우리의 적이었으며, 일본의 적은 우리 편이기도 했다. 미국이 일본의 적이었으므로 미국은 우리 편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해방 후 사회주의를 표방한 좌익 공산주의는 미국을 적으로 삼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좌익인 공산주의자들은 1945년 9월 8일에 남한에 진입한 미국의 하지 장군의 군정 때문에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미국이 적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 하지 중장이 지휘하던 제24 군단은 1945년 11월로 예정된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하여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 장군을 해방 후 38도 이남 남한지역 미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본이 항복할 당시 그 부대가 가장 빨리 한국으로 이동해 올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양 지역 미군 총사령관 더글라서 맥아더 장군은 1945년 8월 27일에 하지 장군을 주한 미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45년 8월 29일 하지는 맥아더로부터 소련군이 미군보다 먼저 서울지역을 점령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 대해 통보를 받았다. 9월 1일부터 수일 동안 미군 비행기들은 서울과 인천지역에 수십만 장의 전단을 공중에 살포하여 “한국인들의 분별없고 경솔한 행동은 다만 불필요한 인명의 손실과 아름다운 한국 땅의 황폐화와 재건 기간을 연장시키는 사태만을 초래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1875-1965)은 맥아더(1880-1964) 장군의 주선으로 임정 요인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한국을 떠난 지 33년 만에 도쿄(東京)에서 맥아더의 전용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돌아왔다. 서울 도착 이튿날 오전 10시 중앙청 광장에 5만 명을 헤아리는 환영 군중이 몰렸다. 하지 장군은 이승만에 대해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일생을 바쳐온 ‘위대한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이에 이승만은 답사를 통해 38도선과 소련을 맹렬히 비난한 후, 한국민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했다. 이때 그 유명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구호가 회자되였다. 이승만은 이미 1945년 12월 17일에 방송 연설을 통해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모국이라고 부르면서 한반도를 소련의 일부로 만들려고 한다.”라고 하면서 “우리가 이 문제를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돌로 쪼개져 내전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1950년 6·25 전쟁으로 그대로 적중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 취임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남한 단독으로 실시되었다. 198명의 제헌의원을 선출했다. 제헌국회는 5월 31일에 소집되어 188표를 얻은 이승만을 초대 국회의장으로 뽑혔다. 북한에서 선출될 대의원을 위하여 의석 100석을 공석으로 남겨 두었다. 해방이 된지 5개월째가 되던 1946년의 새해가 밝았다. 1월 14일에 경북궁에서 태극기 게양식이 거행되었다. 1945년 9월 8일에 미군의 진주 이후 관공서에 태극기 게양을 금지했던 규정을 풀고 이날 해방 후 처음으로 애국가가 울러퍼진 가운데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1946년 해방 후 처음으로 맞게 된 제27주년 삼일절 기념식은 해방된 조국에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그러나 좌우가 각각 남산과 보신각에서 별도로 기념식을 개최했다. 38선 이북에서도 삼일절 기념 행사가 있었다. 그러나 항일 운동에 가장 큰 민족적 성과를 기념하는 날 삼일절 기념식은 김일성에 대한 찬양으로 시종일관 진행되었다. 반탁을 주장한 조만식을 제거한 북한은 이미 김일성 체제를 굳혀놓고 있었다. 1946년 5월 15일 미군정은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 공산당이 당비를 조달하는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만들어 시중에 유통 시켰다며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에 관련자 공판이 있던 날 좌익 진영에서는 미군정에 조작극이라고 항의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일으켰다. 미군정은 강경하게 대했고 이날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중 한 명이 사망했고 50여 명이 검거되었다. 미군정은 이를 계기로 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반면 공산당 활동을 전면 불법화 시켰다. 당시 경찰 집계에 의하면 이 무렵 약 1년 동안 경찰에 검거된 좌익이 12만 명 사상자가 750명에 달했다. 이때부터 좌익은 지하 활동으로 전환했다. 얼마 후 박헌영은 월북했다. 1946년 이전에 남한 인구는 19,369,000명이었다. 해방 1년 만에 200여 만 명이 증가했다. 1946년 8월 15일에는 첫 해방 기념일이 있었다. 좌우익은 기념일마저 별도로 진행되었다. 미군정의 탄압에 직면한 좌익은 9월을 기해 총 파업에 들어갔다. 10월 1일에는 대구 폭동이 일어났다. 공산당의 불법 투쟁 노선에 의해 시작된 폭동은 식량 배급 문제와 맞물려 순식간에 경상도와 전라도 일원으로 확산 되었고 이 사건으로 200여 명의 경찰, 천여 명의 관리와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내세워 미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김구와 여운형은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자신들의 통합의지만으로는 역부족임을 느꼈다. 좌우의 갈등은 신탁통치 문제로 더욱 심해졌고 그 여파는 남한 사회의 전체에 파급되었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영역에서 그 갈등은 대립으로 어수선했고 불안한 사회는 해방의 기쁨과 희망을 빼앗아 갔다. 1947년 3월 1일 제28회 삼일절 기념식이 열렸는데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좌익은 남산에서 각기 따로 가졌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이제 좌우익의 갈등은 언제 폭발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 연령 측이 신탁통치 문제로 소용돌이 쳤다. 양 측이 시가행진에 들어갔으며, 결국 남대문에서 충돌하였다. 서로를 불신하고 증오감으로 서로 맞서서 갈등하고 있을 때 최초로 좌와 우, 남과 북이 함께 부르는 노래가 등장했다. 그것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안석규 작사, 안명원 작곡)이라는 노래였다. 1947년 4월 21일에 이승만이 도미외교 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1946년 연말에 미국으로 출국하여 외교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미 국정 사령관 하지의 중도세력 육성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돌아왔다. 4월 29일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의 환영대회가 8만여 명의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그는 “총선을 통해 남북통일을 위한 남한 과도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좌우 합작을 추진하던 몽양 여운형이 유력한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15분 여운형은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 청년에 의해 피살되었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좌우 합작 동력은 힘을 잃었고, 중도 노선은 설 자리를 잃었다. 1947년 8월 15일은 해방 2주년 기념일이 있었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은 100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다. 우익계 인사들만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1948년 5월 10일에 유엔의 감시단에 의해 남한만의 총선이 실시되었고 그 이후 7월 20일 국회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형이 당선되었다. 7월 24일에 대통령, 부통령에 취임하였다. 해방된 지 만 3년만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이승만은 “오늘 거행하는 이 식은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족이 새로 탄생하는 것을 겸하여 축하하는 날입니다. 이 날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 40여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 온 결실이 표현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최초로 대통령 국군 사열식을 거행했다. 만 3년의 미군정 시대는 막을 내렸다. 1948년 7월 24일 북한에서는 태국기가 내려지고 인공기가 게양되었다. 인공기로 전면 교체하기 시작했다. 남과 북을 이어주던 태국기는 그 후 북한 땅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래전에 통치체계를 갖춘 김일성은 자신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는 선언만은 남한 정부 수립 뒤로 미루어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를 선언했다. 정부 수립의 기쁨이 채 끝나기도 전인 10월 20일부터 27일까지 여수 순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여순반란 사건이라 한다. 제주도의 4ㆍ3 사건 이후 한라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있는 남로당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 예정이었던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 중이었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반란군은 여수를 점령한 뒤 순천으로 이동했으며 이후 전라남도 일대를 점령했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한 뒤, 5개 연대를 투입해 여순 지역 탈환에 성공했다. 진압 과정 중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당했으며, 1714명의 반군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그 중에 866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1949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을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1949년 5월 20일에 국회프락치 사건이 검찰에 의해 발표되었다. 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소장파 의원 13명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고 있다는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소장파 의원이 중심이 된 반민특위는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급기야 6월 6일 반민특위가 경찰에 의해 무력으로 강제 해산되어 친일파 문제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49년 6월 26일 12시 50분 경 백범 김구가 안두희라는 포병 소위에 의해 피살되었다. 안두희는 김구가 이끌고 있는 대동청년단 소속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장례는 최초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6월 29일 미군은 철수를 모두 끝냈다. 미군은 떠나면서 500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겨 두었다. 미군 철수로 파장을 최소화 하기 위한 조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되었지만 독립국가로서는 멀고도 먼 여정이었다. 좌우 대립은 독립국가로서 미래가 암담했다. 좌익의 출현은 민주주의 체제를 파괴하고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이미 북한에서는 이러한 국가 수립이 소련의 군정으로 착실이 준비되어 왔었다. 그러나 남한은 미국이 있었고 이승만이 있었다. 결국 제헌국회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였으며, 대한민국이 독립국가로서 독립정부가 들어섰다.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을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았다. 그때가 바로 1949년 12월 12일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해방후 좌우익의 갈등 양산이 재현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함을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 누가 이 나라를 지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