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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선교사 입국과 조선의 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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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선교사 입국과 조선의 개항

조선의 개항과 더불어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본격적으로 복음 증거


부산항 일본인 거주지역.jpg



통상수교 거부정책인 쇄국 정책을 폈던 조선은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강제로 개항하게 되었다. 흔히 강화도 조약이라 불리는 이 조약에서 일본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라고 요구했다. 187610월 부산항이 가장 먼저 개항하였다. 1876(고종 13)에 부산포란 이름으로 개항되었으며, 1898년 매립공사로부터 1906년 부두 축조공사를 함으로써 항구의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개항 당시 부산항은 지금의 부산항과는 차이가 있다. 개항장으로 제공된 곳은 용두산 주변으로 지금의 동강동과 광복동에 해당한다. 지하철 남포역 주변이다. 이곳에는 왜관이 있었다. 왜관이란 조선과 일본의 교섭 창구이자 중개 무역의 전진기지였다. 따라서 왜관 주변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잦은 접촉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일본사람들이 조금씩 드나들게 되었고 왜관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식으로 개항이 되자 일본사람들이 그야말로 물밀듯이 들어 왔다. 일본인의 거류지는 넓어졌고 일본식 가옥들이 들어섰다.

 

190511일 경부선이 개통되었다. 개통 당시 종점은 초량역이었다. 1901921일에 부산 초량에서 일본 자본의 회사인 경부철도 주식회사에 의해 기공되어 4년 후인 19041227일 완공되었다. 190511일을 기하여 전선(全線)의 영업이 개시되었다. 그해 525일에 서울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 광장에서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경부선은 일제의 우리나라 침략 정책 수행의 구체적 발판이었다. 부산역은 3년 뒤인 1908년에 문을 열었다.

 

경부선이 개통되자 같은 해 1905911일에는 부산과 일본을 정기적으로 오가는 여객선 이키 마루가 취항했다. 이키 마루처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를 연결하는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이라 했다. 부관은 두 도시의 이름의 앞 자로 지은 이름이다.

 

연락선이 닿는 곳에는 기차역이 있어서 곧바로 대륙까지 연결되었다. 부산에서는 경부선을 통해 서울로, 다시 경의선을 통해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연결되었다. 일본은 대륙으로 진출하는 발판으로써 부산을 집중하여 개발했고 그렇게 성장한 도사를 활보하고 다닌 것은 일본인이었다.

 

1880년 함경남도 원산이 부산에 이어 두 번째로 개항했다. 원산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에 의하여 1880(고종 17)에 강제 개항되었다. 통상적인 견지에서라기보다는 러시아와 영국의 군사력에 대비하여 일본에 의하여 개항되었다. 아시아 동쪽 끝까지 노리는 영국과 남진해 오는 러시아와 맞서기 위해 원산을 먼저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원산항은 관북의 관문의 역할을 유지했다.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에는 인천이 개항했다. 인천에 작은 포구였던 제물포가 개항장으로 정해졌다. 조선 초 제물포란 군항으로 서해의 수비를 맡던 군사 요충지였고 제물포조약에 의해 1883년에 강제로 개항되었다. 조선에서는 서울과 가까운 인천에 개항을 꺼렸지만, 일본은 바로 그 이유로 인천을 개항장으로 요구했다.

 

개항 후 제물포에는 일본은 물론 중국과 서구의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국적인 건물들이 개항장인 제물포의 풍경을 만들어 갔다. 외국인들이 자기들의 방식대로 건물을 지었다. 조선의 관문이 된 제물포는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호텔들도 생겼다. 1889년 문을 연 대불호텔은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다. 제물포는 외래 문물이 들어오는 창구로 계속 발전했고 일자리를 찾아 우리나라 사람들도 몰려들었다. 인천의 관가는 중심지가 된 제물포로 옮겨갔다.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1897년에는 목포가 개항했다. 당시 일본은 쌀 부족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안정적으로 쌀을 확보하기 위해 전라도 지역에도 개항장을 두고자 했다. 목포는 영산강을 통해 한반도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와 연결되었고 중국과 통하는 길목이라는 이점도 있었다. 유달산 기슭에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었고 그 주변으로 일본인 거주지역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899년 전라북도 군산, 경상남도 마산, 함경북도 성진이 동시에 개항했다. 군산 개항은 일본이 본토의 식량수급을 원활히 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디. 군산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에 쌀을 보급하는 기지로 이용되었다. 호남평야 일대에는 일본인 농장이 속속 들어섰고 군산항에는 일수탈하기 위해 군산을 개항하게 되었다.

 

군산항에서 외부로 나가는 물품 중 90%를 쌀이 차지할 정도였다. 마산의 개항장은 현재의 경남대학교 일대인 월영동과 신월동 일대였다. 마산을 군항으로 개발하여 러시아를 막으려는 일본이 경쟁적으로 토지를 매입했는데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일본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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