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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33] 예배 때 여자는 왜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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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 33] 예배 때 여자는 왜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하는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 여자는 남자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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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전 11:2-16


지난 시간에 고린도 전서 10:23-11:1절 말씀을 통해 “우상숭배와 그 제물에 대한 결론”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8장에서부터 10장까지 우상숭배는 허상이지만, 그 잔치에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것인지에 대해 말씀을 했습니다. 


바울의 첫 번째 가르침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에 관해 묻지 말고 먹을 수 있습니다. 또한 두 번째 가르침은 불신 이웃의 초청을 받을 때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세 번째 가르침 그러나 식사 때 우상에 바쳐진 제물이라고 할 때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를 보고 형제가 상처를 받을 때,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제한하여야 합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한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치는 돌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고린도 전서 11:2-16절 말씀을 통하여 “예배 때 여자는 너울을 쓰라”라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시달렸습니다. 교회 구성원들은 다양한 상황에 있었던 8-10장에 있었던 식탁 교제였다면 11장은 예배 시간에 여자가 너울을 쓰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성찬식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번에는 예배 때 여자가 너울을 쓰는 문제와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남자와 여자

 

1.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대 원칙(2-3)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여자가 외출 때 머리를 덮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헬라)에서도 양반집 여자들은 외출 때 머리를 덮은 너울을 썼지만, 유행에 따라 관습이 변하기도 했습니다. 초기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고린도 교회에서도 초기에는 예배 때에 여자들은 머리에 너울을 쓰고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뒤, 고린도 교회 참자유를 부르짖으며 열광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여자들이 예배 때에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고 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여자들은 예배 때에 너울을 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3-16). 이러한 가르침을 뒷받침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먼저 본문 2절에서 자신을 기억해 준 고린도 교회를 칭찬합니다. 그 칭찬의 구체적인 내용은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지키고 있다”라는 점이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전통’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좋은 법은 나쁜 관습 때문에 생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칼빈이 인용한 속담입니다. 사도는 구체적으로 그 전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칼빈은 여기서 언급된 전통은 교리의 요소나 구원에 필요한 것들이 아니라고 봅니다. 대신 “교회의 질서와 정치에 영향을 주는 것들”로 해석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특별한 교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각 교회가 그 교회의 현실에 적합하고 또 그 교회에 유리한 정치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칼빈).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의 처음 기초를 놓았던 바울은 교회 내에서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좋은 형태를 제시했습니다. 이를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계속 유지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 그 전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장차 고린도 교회에 대해 교훈하기 위해 과거의 전통을 실천한 행위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사도는 구체적으로 4~6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여자는 너울을 써야 한다”라는 교훈에 대한 신학적인 원칙을 말합니다. 본문 3절에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 지역의 시대적, 문화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영향 중에 교회 예배 때에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예배의 질서을 바로 잡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머리’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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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너울을 여자만 써야 한다고 말한 이유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차별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남자는 베일을 씀으로써 여자와 같아 보여서는 안 되고, 여자는 남자와 같이 머리에 쓰지 않으므로 남자와 같은 행색을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 고린도 사회는 베일을 쓰면 여자로 쓰지 않으면 남자로 보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로 인하여 교회에서 남녀가 구분 없음으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해서 고린도 교회에 베일 쓰는 문제를 신학적인 원리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첫째, ‘마리’는 그리스도이다. 둘째,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즉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머리’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때로는 한 공동체의 우두머리(지도자)를 의미하였습니다(삿 10:18). 헬라어에서는 ‘기원’ 등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머리’(케팔레)는 ‘권위’를 의미하며, ‘유기체적인 복종’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의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담의 갈비뼈를 빼내어 지어졌습니다. 후자의 의미로 불 때에 여자의 ‘머리’(기원)는 남자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고 합니다. 반면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만 쓰고 “남자의 형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그것을 실행하는 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기원’이고 순종의 대상으로서 그리스도의 ‘머리’이십니다. 그러나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창조의 중보가 되심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머리에 너울 쓰는 문제

 

2. 남자가 너울 쓰는 문제와 여자가 너울을 쓰지 않는 문제(4-6)


너울 쓰는 문제 중에 남자와 관계된 것과 여자와 관계되는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첫째, 남자가 너울을 쓰는 기도나 예언을 하면 안 됩니다(4).


본문 4절에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라고 합니다. 칼빈은 여기 기도는 공적 예배시의 기도에 대해서 언급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또한 예언은 14장에서 말씀한 것처럼 듣는 자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신비를 해석하여 말씀을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 회당에서는 남자들만 기도하고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남자들은 구약의 전통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으로 자신의 머리에 덮개를 썼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덮개로 가리지 않은 얼굴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면서 그의 형상으로 변하여 갑니다(고후 3:1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남자가 머리에 덮개를 쓰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사하지 못 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둘째, 여자는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합니다(5).


본문 5절에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라고 합니다.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거나 말씀을 전하면 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지만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말씀을 전하면 그녀의 머리인 제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여자의 머리는 민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자들은 유대 여자들과는 달리 공적 예배에 당연히 참석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석할 때 당시 유대 사회나 헬라 사회에서는 여자가 머리를 감추지 않은 여자는 남자들을 유혹한다고 하여 상스럽게 여기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공적 예배 때에 머리를 너울로 감추고 기도하고 예언해야 합니다. 여자가 머리를 너울로 감추지 않고 드러내고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은 그의 머리를 면도로 민 것만큼이나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머리를 민 것과 같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수사학적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디모데 전서 2:12절에서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제지한 이후 여자가 벗은 머리로 예언하는 것을 금한 것은 불필요하게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칼빈은 “그러므로 여자들은 머리에 무엇을 쓰고라도 예언할 권리가 없으며, 또 분명한 결론은 바울이 여기서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를 논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사실이다”라고 말합니다.


셋째, 여자가 머리를 미는 것이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려야 합니다(6).


본문 6절에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가정하여 여자가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은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다고 언급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끄러움을 피하려면 머리에 무엇을 쓰라고 합니다. 칼빈은 이 부분에서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 남자에게 여성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성들의 욕망을 일으키며 여자들을 볼품없게 만들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는 머리에 너울을 쓰라고 합니다. 이는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을 경우, 머리를 깎거나 밀어야 하는 데 이는 여자에게 수치와 부끄러움이 되기에 머리에 무엇을 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

 

3.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 여자는 남자의 영광(7-12)


사도는 본문 7-12절 말씀을 통하여 이미 4~6절에서 제기한 충고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입니다(7).


본문 7절에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라고 합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을 지녔기 때문에 머리에 아무것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입니다.


사도 바울은 창세기 1:27절에 근거하여 남자를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남자가 머리를 가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가리는 일이라 하여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창세기 2:22절에 근거하여 여자는 남자에게서, 남자를 위해 지음받은 자이므로 “남자의 영광”이라고 부르고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둘째,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습니다(8-9).


본문 8절에서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라고 합니다. 이어서 9절에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8절에서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여자의 기원이 남자에게 있습니다. 여자는 돕는 배필로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칼빈).


셋째, 천사들 때문에 남자의 권세 아래 있다는 표로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합니다(10).


본문 10절에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 때문에 남자의 권세 아래 있다는 표로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에서 천사들을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지키는 자로 보고 있습니다. 예배 공동체에 천사들이 침석하여 올바른 예배 질서에 벗어나면 진노한다고 보았습니다. 아마 바울도 비슷한 생각에서, 여자들이 예배 때 창조의 질서를 어기면 예배에 참석한 천사들이 진노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넷째, 남자와 여자는 한 몸으로 연합하여야 합니다(11).


본문 11절에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합니다. ‘그러나’라는 단어는 남자와 여자의 구분 한계를 해체하는 말로 이어지는 말이 아닙니다.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나쁘게 대하지 않도록 남자들을 제지하고 다른 한편 여자들을 격려하여 그들의 순종이 고통의 근원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부가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분명한 권위의 범위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한 몸으로 연합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특히 본문에서 “주 안에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말은 교회 밖의 일반적인 사회의 관습에 따른 이야기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주권 영역 안에서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본문 12절에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라고 합니다.


12절에 여자가 남자에게서 창조된 것과 같이 남자도 여자를 통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11절에서 언급한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없이 남자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은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그 근원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남자들은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지만, 여자들은 너울을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관례

 

4. 논쟁이 아닌 하나님의 모든 교회 관례 (13-16).


13절에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라고 합니다. 사도는 지금까지 계속 여자의 머리에 너울 쓰는 문제를 말한 이후 고린도 교회에 질문을 하면서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판단해 보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 계속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라고 말하면서 여기 ‘본성’(퓌시스)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제1조에 합동 측은 “본성의 빛”으로 번역했는데 통합 측은 “자연의 빛”으로 번역했습니다. 자연(自然)이란 단어는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창조물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식 신앙고백 문서나 교리에서 ‘자연’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혹은 ‘만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본문 14절에서도 자연이라 하지 않고 본성으로 해석합니다. 사도는 ‘만일’ 남자가 긴 머리를 하고 다니면 그것이 자기에게 수치가 된다는 것을 본성이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는 남자의 짧은 머리를 하나님의 뜻의 반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에 근거하여 여자는 머리를 덮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이는 그 당시에 용인되었단 관습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5절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긴 머리는 자기에게 자랑이 됩니다. 그것은 여자의 긴 머리가 쓰는 것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6절에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라고 합니다.


여기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라는 말을 표현함으로 바울은 이 문제로 더 이상 교회가 분쟁이 있으면 안 된다는 취지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분쟁을 일으키는 데서 기쁨을 찾습니다. 이들은 때로는 진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소모적인 논쟁으로 유용한 관습을 깨뜨릴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은 논쟁을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보다는 그 논쟁 자체를 저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여자의 머리에 너울 쓰는 문제에 대한 논쟁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말씀을 전하는 그런 관습이 없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당시 일관된 관습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가르침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사도바울은 창조의 질서와 인간의 본성, 당시의 사회적인 관습에 따라, 여자는 공적 예배 때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 반드시 너울을 써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이 문제를 질의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는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관습에 대한 문제라고 하면서 이 문제를 성경적으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머리’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이러한 예배 질서 회복의 문제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울은 남자와 여자의 머리에 대한 주제로 설명합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기에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기에 머리에 무엇을 쓰고 예언이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바울시대 고린도 사회의 문화와 관습 속에서 보면 예배 시에 여자가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으면 남녀의 구별이 없이 혼란함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 내의 질서를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남자와 여자의 창조 질서 속에서 각각 말합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미사 때에 여자들이 너울을 씁니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쓰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머리에 너울을 쓰는 문제를 통해 설명한 창조 질서에 대한 문제는 오늘날 우리에게 계속하여 진리로 계승됩니다. 그러나 그를 설명하는 너울을 쓰는 문제는 오늘날 교회가 관습으로 쓰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예배 시간에 창조 질서에 의해 교회가 관습적으로 예배의 모습들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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