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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32] 우상숭배와 그 제물에 대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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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 32] 우상숭배와 그 제물에 대한 결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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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전 10:23-11:1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 )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 전서 10:14-22절 말씀을 통해 “우상숭배 잔치에 참여 금지”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우상숭배는 구분해야 합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허상일 뿐입니다. 문제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은 사탄의 하수인인 귀신이 이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우상숭배의 잔치에 참여하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분명히 하여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권면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고린도 전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와 그의 잔치에 참여하는 문제, 그리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것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고린도 전서 9장에서부터 10장에 이르기까지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8장에서부터 10장까지 우상숭배와 그 잔치에 참여하는 문제, 그리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것인지에 대해 말씀을 했습니다. 이제 사도는 본문인 고린도 전서 10:23-11:1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한 결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는지를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기중심적 외고집


1.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대원칙(23-24)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8장에서부터 우상에 바쳐진 제물 즉,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원칙을 전제로 하여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을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이미 8장과 9장에서 우상의 잔치에서 음식을 먹는 것이나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는 무슨 이익이나 손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스스로 제한해야 합니다.


사도는 10장에 와서 우상숭배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귀신과 연결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연합된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우상의 잔치를 피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도는 지금까지 논지를 통하여 우상의 잔치에 참여 금지와 우상숭배를 하는 이방인 이웃들과 관계를 맺고 사는 문제를 구분합니다.


우리는 불신자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방인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그들의 우상숭배를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상숭배와 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금지한다고 하여 이방인들과 관계를 금지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이 있고 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 23절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유를 주셨습니다. 죄악과 모든 풍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자유는 방종을 위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섬기고, 둘째는 이웃을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이웃을 섬기도록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섬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복음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를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으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오로지 자기중심의 신앙생활은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고통스럽게 합니다. 외고집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생각과 그 실천은 교회 지체인 구성원들의 하나 됨을 파괴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도는 본문 23절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즉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그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지나치면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기도 합니다.


이어서 24절에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라고 합니다. 여기 ‘누구든지’라는 단어를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와 네가 다 함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와 사랑의 실천 원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을 위하고 또한 우리 이웃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그러한 섬김이 곧 나의 유익이 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제자도 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섬김을 통하여 이를 입증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열매를 보면서 내가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의 것


2. 사도 바울의 첫 번째 가르침 : (시장에서 파는 고기) 묻지 말고 먹으라(25-27)


첫째, 가르침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25)


본문 25절에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여기서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무엇이든 양심에 거리낌 없이 먹어도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장에는 많은 고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고기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시장에 유입되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많은 고기들이 우상숭배의 잔치가 끝난 다음에 그 잔치에 사용됐던 고기들이 무더기로 시장에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장에서 고기를 구입할 때 그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인지를 묻지 말고 자유롭게 사서 먹어도 됩니다. 본문은 “묻지 말고 먹으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자들이나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진 자들은 그 고기를 보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은 결코 올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둘째, 왜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의심하지 말고 먹어도 됩니까? (26)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왜 의심하지 않고 먹어도 되는지 그 이유를 본문 26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라고 합니다. 즉 25절에 묻지 말고 먹어도 되는 이유는 26절에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24:1절에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것이요, 선물입니다. 그 모든 선물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주신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 자체로서 깨끗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음식은 깨끗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것들을 먹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20절에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끼므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인, 성경적인 원칙에 따라(26) 25절에서 가르치는 말씀의 정당성, 즉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의심하지 않고 먹을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3. 두 번째 가르침 : (불신 이웃의 초청을 받을 때) 묻지 말고 먹으라(27)


본문 27절에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의 가정에서 초대를 받아 가서 식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차려 주는 음식은 무엇이든지 양심에 거리낌 없이 먹으라고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근거하여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이를 양심에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우상의 잔치에 참여하여 그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고전 10:14-22)와는 다릅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먹어도 된다”라는 것은 불신자 집에 초청을 받아 식사할 때 그 고기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먹어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상의 잔치에 참여하여 고기를 먹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유 제한

 

4. 세 번째 가르침 : (그러나 식사 때 우상에 바쳐진 제물이라 할 때) 먹지 말라(28-30)


본문 28절에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라고 합니다. 불신자, 혹은 이방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 식사할 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식사하기 전에 “누군가가” 식탁의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라고 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은 그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됩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을 밝혀야 합니다. 이런 때에는 우상숭배 문제와 그 우상에 바쳐진 고가에 대해 분명한 거부 의사를 밝혀야 합니다. 


식사 중에 이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고 말하면서 보통 고기와 다르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자는 대접한 주인일 수 있습니다. 불신자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제사하고 그 신의 복을 받은 고기를 먹는 것을 커다란 축복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귀한 고기를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결국 초대받은 손님에게 자신이 믿는 신을 말하고 그를 믿게 하려고 초청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초대받은 그리스도인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고 지적한 자의 양심을 고려해서 그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합니다. 즉 이러한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고기로 대접한 그 주인의 우상숭배 행위에 대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해야 합니다.


또한 본문의 “그 양심을 위하여”라는 말을 달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함께 초대를 받은 약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함께 초대받은 약한 그리스도인이 식탁에 올라온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약한 그리스도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소위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강한 자들에게 믿음이 약한 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약한 자 앞에서 강한 자로서 그러한 고기를 먹을 때 약한 자들의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강한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본문 29절에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양심’은 “너희 것이 아니요.” 다른 사람의 양심입니다.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판단을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씀입니다.


사도는 30절에서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라고 합니다. 감사하고 먹으면서 왜 내가 감사하는 그 음식 때문에 남의 비판을 받아야 하느냐며 반문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5. 우상의 제물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 (31-11:1)


사도는 본문 10:23절에서부터 말씀하신 내용에 대한 결론뿐만 아니라 이미 8장에서부터 말씀한 우상숭배, 그리고 그 잔치에 참여하는 문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고기)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을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1).


본문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의 삶을 통해, 전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우상숭배와 같은 죄를 범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참된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 믿음이 약한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하면 안 됩니다. 시험들게 하면 안 됩니다. 낙심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로 인해 주님의 지체인 형제가 상처를 받고 시험에 든다면 그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때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 거치는 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32).


본문 32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라고 합니다. 첫째, 유대인에게나 둘째, 이방인에게나 셋째,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 가치는 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인생이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거친 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런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촛불이 자신을 태우므로 주변을 환하게 밝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헌신과 희생이 주변을 환하게 밝힌다면 하나님은 나의 인생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 자신의 유익이 아닌 많은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33).


본문 33절에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나와 같이 모든 일”이라고 합니다. “나와 같이”, 즉 나처럼 모든 일에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첫째,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라고 합니다. 둘째,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셋째,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에 보면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하나님께 구원받게 하려는 이유로 우리는 섬김과 희생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내 중심의 신앙이 아닌 약한 우리 이웃을 위한 헌신과 섬김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넷째,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 (11:1).


본문 11: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모범을 언급합니다. 이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바울의 모범을 본받으리라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빌립보서 3:17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6절에도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우상숭배와 그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였습니다. 이를 사도 바울에게 답변을 구했습니다. 결국은 신앙의 대원칙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 자유를 가졌지만, 그 자유는 얼마든지 복음 전도와 약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고 섬기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런 원칙은 바로 복음과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이 정신은 이웃을 위한 희생, 섬김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길을 갔던 바울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바울이 그토록 이루기를 원했던 바로 그 복음을 위해서 우리 역시 헌신해야 합니다.


교훈과 적용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술과 담배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술을 마셔야 합니까? 담배를 피워야 합니까? 이런 문제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적어도 한국교회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 미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술과 담배가 우리의 신앙의 정체성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정체성 평가의 기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러한 복음과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들이 술과 담배를 한다고 하여 지옥갈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할지라도 우리는 술과 담배를 할 때 믿음이 약한 자들이나 불신자들이 양심에 상처를 받아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중심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우리 이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 자유로운 행동이 상대방에게 시험이 된다면 그들을 위해 나의 자유로운 행동을 제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희생정신이요, 섬김의 정신입니다.


마태복음 2:27-28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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