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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27]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 지식에 앞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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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 27]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 지식에 앞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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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전 8:1-13


지난 시간에 고린도 전서 7:31-40절 말씀을 통해 “결혼할 것인가, 독신으로 지낼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5장에서는 음행에 대한 문제, 6장에서는 일상생활에서의 분쟁을 결정하기 위해 이방 법정에 호소하는 문제 등을 다루었습니다. 7장에서는 결혼에 대한 문제, 8절에서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후 11장에서는 예배와 성만찬 문제를 다룹니다. 그리고 12장에서는 예배시에 방언하는 자들의 은사에 대한 우월감으로 예배가 무질서해지는 문제를 14장까지 언급합니다. 그리고 15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생각이 잘못 오해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번에는 본문 8:1-13절 말씀을 통해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 지식에 앞선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배경


1. 본문 이해를 위한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


본문(8:1-13)에서 바울은 분명히 “우상 제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먹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교회에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 자체 보다 교회 내에서 그러한 문제가 생겨난 원인으로서 교회 내의 사랑의 결핍과 성도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식 있는 자들과 약한 자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지식 있는 자들의 권리를 부정하지 않고 있고, 오히려 우상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지식 있는 자들과 약한 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열의 원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의 우상숭배와 많은 접촉이 있었습니다. 첫째, 우상에게 바쳐졌다가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는 경우입니다. 둘째, 이방인의 사원에서 우상에 대한 제사 의식과 더불어 베풀어지는 식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상에게 바쳐지는 의식을 거치지 않고 도륙되어 시장에 나오는 고기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시장에 나온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집에 초대되어 대접받는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인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적어도 이웃집에 초대되어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부유층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은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사원에서 열린 종교적 잔치에서 고기를 얻어먹으려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한 말씀이 본문 말씀이 되겠습니다.


지식에 앞선 사랑


1. 교만한 지식이 아닌 덕을 세우는 사랑 (1-3)


본문 1절에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본 자들(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로 얻은 지식을 내세우며 그것을 먹는 자유를 주장한 자들(강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후자의 주장을 다루면서 그의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본문 1절에 “우리가 다 지식을 가졌다”라는 주장에 바울은 일단 이들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곧장 사랑과 연결시킵니다.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 은사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지식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한 지식은 그들로 자만하게 하고 남을 업신여기게 합니다. 사도는 이들에게 사랑을 강조하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문제에 대해서 지식을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할 뿐이지만 덕을 세우는 것은 사랑입니다. 지식은 부풀게 한다면 사랑은 올려세우는 일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올려세우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갖고 자랑할지 모르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사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라고 합니다.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그마한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상대를 억압하고 상처를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로 바른 지식을 가졌다면 겸손해집니다. 벼가 익으면 머리를 숙이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박사학위 과정과 논문을 마친 후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학문 앞에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라고 합니다. 본문 3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한 사람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하나님 지식


2. 우상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 (4-6)


본문 4절에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여기서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래 너희 말이 맞다’라고 말하면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우상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라고 합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우상 숭배행위를 이용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상 자체를 실재가 없는 한 조각의 목석에 불과하다고 보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지식”을 인정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본문 5절에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것들은 다 가짜입니다. 그러나 6절에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한 분뿐이십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또 우리의 주님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십니다. 이차적인 의미로 그의 아들을 통하여 그의 자녀들이 된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 우리가 아버지라고 한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양심


3. 우상 제물로 알고 먹으면 양심이 더러워짐(7-10)


본문 7절에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라고 합니다.


본문 1절에서와같이 모든 신자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일부 신자들은 우상이 영적인 어떤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오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에도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도 어떤 종교적인 힘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은 종교적인 어떤 영적 의미가 있다고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약한 자들”이라 칭합니다(9:22, 롬 14:15, 21). 


이들은 양심이 약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소심한 자들입니다. 이런 일로 초조해하며 근심하며 두려워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은 그들의 양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먹으면 그들의 양심이 더러워집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본문 8절에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즉 음식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나쁜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나을 것도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 강한 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다고 하여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신분이나 자유를 조금도 잃을 것이 아니다.”

“‘약한 자들’ 같이 안 먹는다고 해도 무슨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강한 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그 반대의 이야기도 말하면서 소위 “강한 자들”의 입장을 교정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의 계속된 가르침은 9절로 이어집니다.


9절에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라고 합니다. 강한 자들의 가리지 않고 먹는 자유가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우상을 먹는 권리와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걸림돌이 됩니까? 이 이야기는 10절에서 말씀합니다.


본문 10절에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라고 합니다. 지식이 있다는 자들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 먹는 것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 본다면 그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그도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우상의 사원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앉아 그 제물을 먹으면, 그것을 보고 “약한 자”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용기를 얻어 “강한 자”를 따라 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약하여 전에 가졌던 우상에 대한 의식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강한 자”를 따라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으면서도 그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고 불안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약한 자”의 양심이 상처를 입게 됩니다.


형제 실족 금물


4. 약한 형제를 실족게 하지 말라(11-13)


본문 11절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라고 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지식 때문에 믿음이 약한 그 사람은 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형제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같은 형제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 형제를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그런 자는 아닙니다. 이 형제가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 형제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형제를 무시해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곧 형제에 대해 죄를 범한 것과 같습니다. 나아가 형제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해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 12절에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라고 합니다.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결론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죄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도 다시는 제물을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형제에 대한 사랑에 의해 제한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에 근거하여 교회를 세우는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훈과 적용


고린도 교회에서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강한 자들”과 “그러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라는 “약한 자들”에 대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 유대교적 영향을 받았다면, 그는 분명하게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8장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그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지식 있는 자들이 제기한 주장들과 태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바울은 가리지 않고 먹는 자유가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9절). 바울은 “음식”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가 8:13절에서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라고 말한 것 역시 약한 형제를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지 음식 자체가 부정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술과 담배 문제, 주일성수 방법 문제, 사치스러운 풍족한 생활에 문제 등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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