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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25] 절대화하지 말고 상대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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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 25] 절대화하지 말고 상대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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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전 7:29-31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지난 시간에 고전 7:25-28절 말씀을 통하여 “처녀들에 대한 바울의 권면”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교린도교회가 바울에게 편지로 자신의 문제를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사도는 그에 대한 답변을 써서 고린도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가 되었습니다. 질문 중에 처녀에 대한 문제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처녀에 대한 문제에 관해 답변합니다.


질문의 요지는 처녀가 결혼해야 하느냐는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처녀에 대한 말씀을 교훈으로 주신 일은 없지만 사도 바울은 주의 은혜로 자신의 의견을 답변형식으로 보냈습니다. 임박한 종말의 환난을 이야기하면서 사람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충고는 결혼은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본문인 고린도전서 7:29-31절 말씀을 통하여 “절대화하지 말고 상대화하라”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미혼자에게 계속하여 충고(7:32-40)하기 전에 본문 29~31절에서 그 충고에 근거에 해당한 신학적인 원칙에 관해서 언급한 내용이 본문 말씀이 되겠습니다. 본문은 다섯 가지의 형태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1.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살라(29).


본문 29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쉽게 설명하면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이제부터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같이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는 먼저 “내가 이 말을 하노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결혼하든지 하지 않든지 우리의 삶은 곧 개인적인 종말을 향해 갑니다. 이 개인적인 종말이란 ‘죽음’을 의미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때가 “단축하여진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녀가 결혼한 것도 좋고, 결혼하지 않는 것도 좋지만,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일시적입니다. 우리 인생이 시작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이 마치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이 인생을 살아갈 때 세상적인 일로 너무나 집착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보다 더 가치 있게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온갖 세상적인 향락에 전 인생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원칙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여야 한다.”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풍요 역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때가 그리 얼마나 남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축복을 누리면서 우리는 어떤 자세와 태도로 살아갈 것인지를 궁리해야 합니다. 


사도는 아내 있는 자들이, 혹은 남편 있는 자들이 아내가 없는 자 같이, 혹은 남편 없는 자 같이 살라는 것은 상대를 무시하고 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절대화하거나 신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와도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본인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자에게도 결코 좋은 일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아내에게 신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못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생각과 태도를 좋게 보지 않습니다.


사도는 결혼 내의 부부관계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이 결혼이 지상의 최고의 거치나 목표로 삼지 말로 진정으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에 대한 소망으로 상대화하라는 가르침입니다.


2.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살라(30, 상).


본문 30절에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라고 합니다. 여기 상반절에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라고 합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울고 싶다고 하여 울면서 매일 매일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상대를 만나면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만날 때마다 징징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날 때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서러워서, 고통스러워서, 힘들어서는 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 울지 않는 자같이 태연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울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는 듯이 울지 않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대처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내가 울면서 약한 모습들 보여 동정을 사려고 하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세상이, 친구들이 그렇게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표정을 지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울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마치 세상에 종말이라도 오는 것처럼 땅이 꺼져라 통곡하만 안 됩니다. 내 마음의 중심을 잡고 참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과 삶의 태도와 자세입니다.


3.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살라(30, 중).


본문 30절 중반절에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라고 합니다. 보편적으로 부자는 돈을 자랑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는 자들이 돈 좀 생기가 그것을 떠벌리며 자랑합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기쁜 일이 없는 것처럼 냉정하게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내가 기쁜 일이 있다고 하여 그것이 마치 내 생명과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것을 마치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합니다.


나에게, 우리 가정에 제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그것을 자랑하지 못해 병이 날 정도가 되면 안 됩니다. 묵직해야 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지라도 중심을 잡고 또 일하러 갑니다. 나에게 기쁜 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또 그런 기쁜 일을 위해 일하러 가는 것입니다.


사도는 비록 우리에게 기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절대화하여 온 마음을 그 기쁜 일로 빼앗기자 말라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다면, 좋은 일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더 책임 있는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이웃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그런 기쁜 일들로 자유로워야 합니다.


4.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라(30, 하).


30절 하반절에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물건들을 사는 자들은 그것을 소유하지 않은 자 같이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라져가는 이 세상의 물건이나 이 세상이 제공하는 기회들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절대화합니다. 마치 그것으로 영원토록 이 세상에서 즐기면 살아갈 줄 압니다. 그것들에 우상화하면 안 됩니다.


장치 주실 하나님의 소중한 희망과 소망, 영생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 것들에 절대적 가치를 두면 안 됩니다. 값비싼 자동차를 매입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차에 기스를 냈습니다. 그것이 뭐라고 난리가 납니다.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한숨을 쉽니다. 그리고 책임을 묻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바로 이런 부분에 우리들이 약합니다. 우리들의 가치관이 바르게 정립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 것들로 짓눌려 살게 됩니다. 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자유로워야 합니다.


5. 세상 물건을 쓰는 사람은 다 쓰지 못하는 사람같이 하라(31).


본문 31절에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라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칼빈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물질을 사용함에 있어서 우리의 인생 여정에 물건을 감추거나 그 사용을 지연시키지 말고 그 목표를 향하여 우리가 잘 진행하여 가도록, 물질을 온전하고 훈련된 방법으로 사용하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한 후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라고 합니다. 여기 지나간다는 단어는 단순히 ‘스쳐 지나간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본문에서는 ‘없어지다’ 또는 ‘소멸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임시적이며 무상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그 형상조차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시 103:15).


이 세상은 불변하지 않습니다. 외형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사라질 것들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에게 만족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입니다. 이 세상적인 것들을 그리스도보다 더 가치를 두면 안 됩니다. 


교훈과 적용


우리가 보통 대화 중에 “절대로 안 돼”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이 말은 종종 “결사반대”(決死反對)라는 말을 합니다. 이는 보통 시위 현장에서 자신들의 주장에 결코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는 죽기를 각오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반대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결사반대’나, ‘절대로’라는 말들은 자기주장이 너무나 강하여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이러한 사상들은 다른 사람과 대화할 기회가 차단된다는 면에서 인간관계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용어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많은 사람과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서로 마음 문을 열어 놓고 대화하며 서로 다른 의견을 좁혀가면서 서로 화합하고 타협하고 격려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이때 서로 대화가 가능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결사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의견을 절대화하여 접근한다면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관계 역시 단절되고 말 것입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 앞에서 고민하고 좌절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적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은 언제나 세상적인 가치관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적 가치관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가치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중한 가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그때마다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하여 그것이 내 목숨과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지혜와 원리는 세상적인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들이므로 거기에 목숨을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절대화하지 말라”라는 권면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이야기는 현재 내가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그것을 절대화하지 말고 없는 것 같이 살라는 겁니다. 있는 자들은 없는 것 같이, 없는 자들은 있는 것 같이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거짓된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적인 것들에 목숨을 걸지 말고 있으나, 없으나 그런 것들로 자유로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이 세상의 소유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자들은 언제나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갖고 살아가는 자들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거기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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