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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23]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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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 23]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한 사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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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전 7:17-24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 전서 7:8-16절 말씀을 통하여 “결혼과 이혼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하였을 때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결혼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고후 6;14-7:1). 그러나 지난 시간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혼합 결혼에 관해 말씀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결혼상태에 있는 부부 중 한쪽 배우자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한쪽은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비그리스도인인 남편이나 아내가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이혼하지 말고 같이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한 후 믿는 배우자는 하나님 앞에서 화평의 사람으로 부르셨으므로 화평하여 함께 살아야 함을 천명합니다. 여기서 이혼의 조건은 우리나라 현행법으로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소명


1.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17).


본문 17절에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에 가르친 말씀은 각 사람은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은혜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구원으로 불러주셨다면 부르심 당시의 생활을 계속 유지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런 내용입니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교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주인 조덕삼 집의 마부인 이자익이 한글을 배우고 선교사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같은 교회에 주인과 마부가 함께 교회에 출석합니다. 머슴인 이자익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면 이제 머슴인 마부를 그만두어야 합니까?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가르침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머슴의 상태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부르심을 받을 당시 마부의 일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본문 17절에서 언급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다양한 삶의 자리로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하여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당시에 이런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삶의 질서를 혁명적으로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내가 처해 있는 삶의 현장의 질서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그런 형식의 혁명은 성경이 가르친 바는 아닙니다. 기존의 질서에서 자신의 삶에 충실하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은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입니다. 그 은사로 현재 처한 삶의 현장에서 묵묵히 그 사명을 감당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으로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는 그 은혜의 영광을 위하여 은사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은혜와 은사를 구분하여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 구원받은 자가 달란트에 따라 은사를 받았다면 그 은사는 나의 삶의 현장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나의 삶에 충실하면서 그 은사를 감당하여야 합니다. 가정을 버리고, 직장을 버리고 은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에 충실하면서, 직장에 충실하면서 받은바 은사에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상대화하라


2. 교회에서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취할 태도(18-20)


본문 18절에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라고 합니다. 이어서 19절에는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안에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출석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 또한 이방인 중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방인 중에는 당시 노예이거나 노예에서 해방된 자도 있었습니다. 특별히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 있었지만,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도 있었습니다. 사도는 줄기차게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할례가 구원의 조건으로 믿었다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아 교회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이제 믿음 안에서 이제 할례를 받은 자나 받지 않는 자나 할 것 없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할례를 절대화할 수 없습니다. 상대화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서울 승동교회 역사를 보면 승동교회 전신인 곤당골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미국 븍장로회 선교회 소속 사무엘 포먼 무어(Samuel F. Moore, 1846-1906)가 이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무어 선교사가 담임하고 있었던 곤당골교회에 백정들이 출석했습니다. 백정의 신분은 가축(소와 돼지, 닭)을 도살하는 일을 전담하는, 천인 중에서도 가장 천하고 낮은 신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가장 무시당하고, 소외된 계층이었습니다. 백정은 결혼할 때도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탈 수 없었고, 죽어서도 지게에 실려져 조용히 장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백정인 박성춘이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어 교회에 출석했다. 그런데 양반들은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곤당골교회에서 무어 선교사가 백정에게 세례를 주고 교인으로 받았다는 이유로 교인의 절반 이상이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무어 선교사는 백정이나 양반은 교회 안에서 같은 그리스도의 자녀라고 하면서 그들을 용납했습니다. 그러나 양반들은 거부했습니다. 백정인 박성춘의 아들인 박동열은 공부를 잘하여 1907년에 세브란스 의과대학 제1회 졸업생 7명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것같이 할례자나 무할례자는 모두 하나라는 것은 곧 백정이나 양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두가 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제 백성과 양반이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화할 수 없습니다.


사도는 본문 18절에서 부르심을 받기 전에 할례를 받았다면 할례받은 표를 없애려고 애쓰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할례를 받지 않았다면 굳이 받으려 하지 말라고 합니다. 본문 19절을 주의하여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19절에 할례를 받든 안 받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쓸데없는 기준을 신앙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 유혹은 결국 내가 이만큼 괜찮은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남다르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려는 욕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것으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우리 정체성을 확인받아야 합니다. 


사도는 20절에서 결론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20절에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태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기존에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한 삶의 현장을 무시하지 말고 그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절대화 금물


3. 사회적 신분의 상황에 적용(21)


이제 구체적으로 사도의 가르친 내용의 원칙을 통해 사회적 신분의 상황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본문 21절에 “네가 종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현재 처한 삶의 현장에서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는 자의 신분이 어떠하든지 간에 비록 그 신분이 종, 즉 노예일지라도 염려하거나 걱정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거든 차라리 그 길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의 신분이 노예라고 한다면 자유의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로 계속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자유인이 될 수 있거든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22절에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라고 합니다. 노예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비록 노예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인입니다. 반대로 자유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사단의 세력을 결박하고 해당한 자유인입니다.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백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양반과 같은 자유인입니다. 그렇다고 양반이 예수를 믿었을 때 교회 안에서까지 양반일 수 없습니다. 그들 역사 교회 안에서는 백성이나 양반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자신의 신분에 대해 절대화하면 됩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사람의 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은 본문 23절에 보니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은 24절은 그가 가르친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소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마치 이 세상 신분을 생명처럼 절대화하면 안 됩니다. 상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곧 내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사회적인 신분이 내 생명이나 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대수롭지 않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신분에 대한 변동이 마치 죽음이 찾아온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에게 좀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사라질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또 다른 길을 나에게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내 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교훈적 적용


그리스도인의 직업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소명이라는 차원에서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직업은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은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은 소명이 다를 뿐이지 우리는 그것에 값을 매겨 가치관의 준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한 사명이 있습니다. 직업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명과 직업은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원명이나 불평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최선을 다하다 보면 하나님은 또 다른 사명, 직업을 허락할 것입니다. 문제는 사도가 가르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면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의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순종하게 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 있다면 이는 대단한 축복입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내가 살아갈 이유가 있다는 것은 곧 나에게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였습니다.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참고 인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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