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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맥스웰과 바실 홀의 한국 접촉과 성경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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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맥스웰과 바실 홀의 한국 접촉과 성경전달

서천 마량진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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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웰(Muray Maxwell) 대령

 

 

영국의 배질 홀(Basil Hall)은 에딘버러대학을 졸업하고 해군에 입대하여(1802), 초급장교 시절에는 주로 북미주에 근무했다. 1812년부터는 프리기트함 볼테이지(Voltare) 호의 장교로 동인도회사에 근무했다. 


이때 그는 스루프형의 범선 리라(Lyra)를 타고 중국 광동성을 찾게 되는데 그 귀국 길에 알세스트호(Alceste)의 선장 맥스웰(Muray Maxwell) 대령과 함께 서해를 탐사하였다. 홀은 「조선서해탐사기」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반도 서해안을 탐사한 것은 1816(순조 16년) 9월 1일부터 10일까지였다. 


그의 일행은 잠시 육지에 상륙하여 비인(庇仁) 현감 이승렬(李升烈)과 마량진(馬梁鎭) 첨사(僉使) 조대복(趙大福)을 만나 수화(手話)로써 의견을 나누면서 성경을 전달했다.


1816년 9월 1일에 황해도 백령도(白翎島), 대청도(大靑島), 소청도(小靑島) 등에 상륙해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했다. 그들이 비인만(庇仁灣) 마량진(馬梁鎭)에 도착했을 때, 첨사(僉使) 조대복(趙大福)을 초청해 알세스트 호에 안내했고, 다시 조대복과 비인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承烈)을 리라 호에 안내해 구경시켰다. 


그들은 조선에 오기 전에 중국에 들렀는 데, 그때 중국에 있던 선교사 모리슨(Robert Morrison)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부탁 대로 조선사람에게 중국어 성경을 전했는데, 첨사 조대복은 이 성경을 정중히 받아 조정에 전달했다. 즉, 1816년 9월 4일에 개신교 성경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달된 셈이다. 순조 실록에는 당시 상황이 “한 권은 첨사에게 한 권은 현감에게 주어 책을 펴본즉 알 수가 없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순조실록 16년(1816) 7월 병인조(丙寅條)에 의하면, 이때 홀 일행을 만나 사람은 마량진(馬梁鎭 첨사(僉事) 조대복(趙大福)과 비인(庇仁) 현감 이승렬(李升烈)로 되어 있다. 당일자 실록에 실린 충청 수사(忠淸水使) 재홍(李載弘)의 장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량진(馬梁鎭) 갈곶[葛串] 밑에 이양선(異樣船) 두 척이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그 진(鎭)의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지방관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이 연명으로 보고했습니다. 


표류하여 도착한 이양선을 인력과 선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4일 아침에 첨사와 현감이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떠 있는 곳으로 같이 가서,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젖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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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한참 동안 힐난하였으나 마침내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에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 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쳐 보았지만 역시 전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었으므로 되돌려 주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에 받아서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책을 주고받을 때에 하나의 작은 진서(眞書)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거래하는 문자인 것 같았기 때문에 가지고 왔습니다. 사람은 낱낱이 머리를 깎았고, 


머리에 쓴 모자는 검은 털로 만들었거나 노끈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동로구[銅鑪口: 구리로 만든 거푸집]와 같았습니다. 의복은 상의는 흰 삼승포[三升布]로 만들었거나 흑전(黑氈)으로 만들었고 오른쪽 옷섶에 단추를 달았으며, 하의는 흰 삼승포를 많이 입었는데 행전(行纏) 모양과 같이 몹시 좁게 지어서 다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버선은 흰 삼승포로 둘러 쌌고, 신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발막신[發莫]과 같고 끈을 달았습니다. 가진 물건은 금은 환도(金銀環刀)를 차기도 하고 금은 장도(金銀粧刀)를 차기도 하였으며, 건영귀(乾靈龜)를 차거나 천리경(千里鏡)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의 수는 칸칸마다 가득히 실어서 자세히 계산하기 어려웠으나, 8, 90명에 가까울 듯하였습니다. 


또 큰 배에 가서 실정을 물어 보았는데, 사람의 복색, 패물, 소지품이 모두 작은 배와 같았고, 한문이나 언문을 막론하고 모두 모른다고 머리를 저었습니다. 사람의 숫자는 작은 배에 비하여 몇 갑절이나 될 것 같은데, 배 위와 방 사이에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였으며,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등 매우 어수선하여, 하나 둘 세어 계산하기 어려웠습니다. 


서책과 기물(器物)은 작은 배보다 갑절이나 더 되었습니다. 큰 배나 작은 배를 물론하고 그 제도가 기기 괴괴하며, 층이나 칸마다 보배로운 그릇과 이상한 물건이 있었고, 기타 이름을 알 수 없는 쇠와 나무 등의 물건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또 여인이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본 것은 단지 한 명뿐이었는데, 흰 베로 머리를 싸매고 붉은색 치마를 입었습니다. 


두 배에 모두 대장간이 설치되었는데, 만드는 것은 모두 대철환(大鐵丸), 화살촉 등의 물건이었습니다. 첨사와 현감이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서북풍이 불자 크고 작은 배가 불시에 호포(號砲)를 쏘며 차례로 돛을 달고 바로 서남 사이 연도(煙島) 밖의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첨사와 현감이 여러 배를 지휘하여 일시에 쫓아갔으나 마치 날으는 새처럼 빨라서 사세상 붙잡아 둘 수 없었으므로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앞의 배는 아득하여 형체가 보이지 않았고 뒤의 배는 어슴프레 보이기는 하였으나 해가 이미 떨어져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배의 집물 적간건기(什物摘奸件記)와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진서전을 모두 베껴 쓴 다음, 첨부하여 올려보냅니다.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서전 내용에, 영길리국(英吉利國) 수사 관원(水師官員)에게 글을 주어 진명(陳明)하는 일로 해헌(該憲)에 보내니, 잘 알기 바랍니다. 금년 윤 6월 초순 사이에 우리 영길리국에서 5척의 배로 우리 영국왕(英國王)이 차정한 사신과 수행한 사람들을 보내어<중략> 출처 : 『조선왕조실록』 순조 16년 7월 19일(병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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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진이 성경이 최초로 한국에 전래된 지점이라는 것은 최근에서야 역사적 사실로 고증되었는데, 2002년 당시 공주고등학교 교사였던 유승광씨가 조선왕조실록에서 ‘마량진에서 책을 받았다’는 기록을 보고 이 책이 성경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서천군의 발 빠른 노력으로 이러한 사실이 충남도청과 문화체육관광부에 공식 브리핑되었고, 마침내 ‘서천 마량진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사업위원회’가 조직되어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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