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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19] 세상법정으로 가는 교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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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 19] 세상법정으로 가는 교회들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는 문제


슬라이드1.JPG

 

본문 / 고전 6:1-11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 6: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5:9-13절 말씀을 통하여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라는 말씀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왜 교회에서 내쫓으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교회의 거룩성과 성결성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내쫓으리라는 말씀은 오늘날 ‘출교’에 해당합니다. 물론 회개하면 됩니다. 모든 징계, 즉 권징(권선징악의 준말)은 회개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교회의 거룩성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작은 누룩이 되어 교회 전체에 확산하여 교회가 커다란 혼란에 빠집니다.


이번에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문제”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이 문제는 교회의 본질과 연결된 문제입니다. 교회는 특정 국가 안에 존재합니다. 국가 안에 존재한 교회는 국가법과 교회법을 동시에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 영역과 국가 영역에서의 소송의 문제 역시 중요합니다.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1. 소송 문제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질문형식으로 문제를 제기합니다(1-7).


사도 바울은 본문 1~7절까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7가지를 질문 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책망합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탐욕으로 인한 과도한 소송, 즉 고소·고발에 대해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책망은 두 부분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책망합니다. 사도는 이러한 소송은 결국 복음에 대한 오명과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로 인해 교회의 본질인 거룩성이 훼손된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차라리 성도들이 손해를 보더라도 고통을 참고 소송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호소해야 합니까? (1)


본문 1절에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책망한 첫 번째 부분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질문형식을 통하여 책망한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신자들이 서로 다툼이 생겼을 때 교회 내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끼리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성도들 앞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고소·고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감히’라는 강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의 불신자에게 맡기고 호소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모욕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성도들’과 ‘불의한 자들’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여기 ‘성도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자들’이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자들을 의미합니다. 즉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여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칼빈은 사단의 사주를 받은 불경건한 자들은 복음의 가르침 속에서 무엇인가 결점을 발견할 기회를 언제나 노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때 신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내놓으면 그들은 교회를 조롱할 수 있는 황금 기회로 포착하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고민은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 법정에서 우리의 권리를 보호받기를 회피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칼빈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들의 법정에서 우리의 권리를 보호받기를 회피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불가피한 경우에 믿지 않는 세상 법정에 소송을 하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법에 고소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책망하는 것은 그 방법이 아닌 다른 해결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손으로 믿는 형제들을 불신앙의 세상 법정에 먼저 고소하는 것은 잘못이다.”


칼빈은 그러나 “만일 당신을 상대로 한 고소 사건이 발생하였다면, 순서상 법정에 출두하여 당신의 사건을 해명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상황에 적용한다면 믿는 신자들이 세상 법정에 가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기본권으로 어느 누구도 이를 침해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옳은 일은 아닙니다. 이 사실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둘째, 세상을 심판할 성도들이 그 정도 사소한 사건 하나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까? (2)


본문 2절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종말에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마 19:2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심판권은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배심원과 같은 성도들도 이 심판에 참여합니다.


장차 세상을 심판하게 될 성도들이 교회 내에서 서로 이해관계로 인한 갈등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해결 능력이 없어서 세상 법정인 불의한 자들에게 교회 문제를 맡기느냐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교회 안에서 문제해결을 포기하고 불신자에게 이를 맡긴 일에 대해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내에서, 혹은 교인들 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믿음 안에서 해결하고 판단(판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좋은 길인지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셋째, 천사들도 판단할 성도들이 이런 일 하나 감당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3)


본문 3절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라고 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천사들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일쯤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최후의 심판에 동참할 성도들은 천사들도 심판하는데 그들의 일상생활에 관계된 사건들을 심판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입니다. 


갈 1:8절에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장차 미래에 타락한 천사들에 대해 심판할 수 있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세상 법원에 맡길 수 있느냐는 책망입니다.


넷째, 교회 문제에 세상 재판관을 세워야 하겠습니까? (4)


본문 4절에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세상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세워서야 되겠느냐는 사도 바울의 책망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다툼을 판정해 주도록 불신자들을 심판자로 세우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섯째, 교회 내 교인들 간의 문제를 해결해줄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까? (5)


본문 5절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라고 합니다. 사도는 계속 책망하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한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 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그렇게도 없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문제, 성도들 간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임을 말씀합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도 없느냐”라고 하는데 자기 형제들 가운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가 한 사람도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여섯째, 신자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꼭 재판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6)


본문 6절에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라고 합니다. 신자가 신자를 고소하여,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꼭 재판을 받아야 하겠느냐는 질문으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교회의 문제, 교인들 간의 문제와 갈등을 조정하고 판단해 주고 해결해 줄 지혜로운 자가 있기는커녕, 형제와 형제, 신자가 신자와 더불어 송사합니다.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송사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차라리 소송하지 말고 손해를 보거나 속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7)


본문 7절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라고 합니다. 교회 내에서 서로 소송하는 것은 성도로서 이미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차라리 소송할 수 있지만 소송하지 않고 손해를 보거나 속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소송은 결국 탐욕과 이기적인 욕망이 사랑과 정의를 압도해 버렸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송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송사로써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사랑과 정의를 포기한 것입니다. 따라서 송사에서 이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승리가 아닌 패배를 의미합니다.


2.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저는 너의 형제로다”(8)


본문 8절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라고 합니다. 소송의 상대는 교회 안에서 같은 믿음을 갖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소송, 즉 고소ㆍ고발을 통해 불의를 행하고 상대를 속입니다. 소송을 통해 스스로 불의를 행하면서 속여 빼앗습니다. 그것도 교우들에게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격렬하게 고린도 교회에 책망한 이유는 부당한 탐욕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너희 형제로다”라는 말씀은 소송 대상자를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형제들을 자신의 탐욕을 위해 악하게 이용하는 것이 바로 소송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일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 아닌 것처럼 상대를 세상 법정에 고소한 행위는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죄악의 목록(9-10)


첫째, 죄악의 목록들입니다 (9).


본문 9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라고 합니다. 본문에는 오늘날 모든 죄악의 목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동성연애도 여기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여 교회 안에서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고소하면서까지 악을 계속하고자 하는 시도의 악행을 지적합니다. 여기서 사도는 악행의 모습, 불의한 모습과 함께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의한 자’는 본문에서 세상 법정에 형제를 고소하면서 형제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이란 말씀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내포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대 전제하에 악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결국 악행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일 수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한 자”, “탐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 “탐색”이란 헬라어 ‘말라코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가볍고 얇은 의복을 지시합니다. 이 의복은 부자나 지위가 높은 자들이 입었습니다. 이 단어가 본문에서는 도덕성과 연관되어 사용할 때는 자신을 사치스럽고 방탕한 삶에 던져 버리는 자들을 지시합니다. 이들은 방종을 인생의 최대 목적으로 생각합니다. 탐색은 방탕과 육체적인 쾌락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이런 육체적인 방종과 음행은 탐색과 연동되어 있습니다. 이런 탐색이 고린도 지역에 팽배해 있었으며, 이것이 고린도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바로 누룩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특히 “남색하는 자”란 헬라어 단어인 ‘아르세노코이타이’는 이교도들에게 흔한 악행들입니다(롬 1:27). 이런 악행이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이는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죄악들이 있습니다 (10).


본문 10절에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라고 합니다. 도둑과 탐욕이 많은 사람과 술 취하는 사람과 욕설을 일삼는 사람과 착취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둘째, ‘그러나’라는 단어를 세 번 사용하면서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11).


본문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본문 말씀은 “너희 중 몇은 이와 같은 자들이었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일부 신자를 의미하면서도 전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는 그 누구도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까지는 이 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였을 뿐입니다(칼빈).

 

“너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영으로 그러나 씻겼고, 그러나 거룩해졌고, 그러나 의롭게 되었다”라는 말씀입니다. 강조의 효과를 위해 세 번 되풀이하는 ‘그러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고전 12:13). 그때 그들이 죄의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9절에서 나열한 죄 목록을 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며 사는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세상 법정에 쟁송은 아직도 그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권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삶의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증명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명령입니다.


4. 교훈과 묵상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교회 성도들이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주어진 기본권을 박탈 내지 침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상 법정에 소송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는 청구의 개인의 권리입니다. 그 청구는 고소·고발로 이어집니다. 교회 문제로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는 권리를 행사하였을 때 교회에 유익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심지어 소송의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됩니다. 


교회 안에서 발생한 문제로 나에게 주어진 권리로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거룩한 하나님 교회의 본질을 지켜내기 위해 소송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 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볼 때 교회 안에서 교회 담임목사와 교인들과의 관계, 교인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서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법원 소송으로 이어지면 안 됩니다.


마 18:15-16정에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계속하여 17절에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교회에 말하고”라는 말씀은 교회 치리 기관(징계기관)을 의미합니다. 장로교회에서는 이 치리 기관이 당회입니다. 교회 당회의 권위가 서 있어야 합니다. 교회 문제는 교회 당회를 통하여 적법한 절차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진행되어야 합니다. 당회가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집니다. 당회가 분쟁이 발생하면 교회 분쟁이 일어납니다.


법원 소송으로 가지 않고 교회의 권위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문제가 있어서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며, 이는 불행한 일입니다. 

 

소재열 목사(김포 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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