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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16] 교회 음행과 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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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 16] 교회 음행과 출교

교회의 거룩성과 성결성을 유지하고 계승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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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전 5:1-5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지난 시간에 본문 고전 4:14-21절 말씀을 통하여 ‘바울의 권면과 방문 계획’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처음 부분인 1장에서 4장까지의 말씀을 통해 강조한 것은 그릇된 세상 지혜였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분쟁의 원인은 바로 이러한 세상 지혜, 헬라 지혜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의 지혜를 거부한 결과 교회는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이를 지적하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를 통한 성도의 신앙을 언급했습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바로 잡겠다는 뜻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본문 5:1~5절 말씀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 음행 사건(사단에 내어 준 자’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는 이제 5장에서부터 6장 20절까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잘못된 자유로 인한 방종, 도덕적 타락을 지적하며 교정합니다. 앞으로 6장 2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확인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에서 온 소식에 대해 지혜와 분쟁, 음행, 소송, 분쟁의 근거에 대해서 설명합니다(고전 1:10-6:20절). 다음은 사도는 고린도로부터 온 편지에 대에 답변합니다(고전 7:1-16:4). 결혼, 우상에 바친 제물, 그리스도인의 집회, 성령의 은사, 부활, 헌금 등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음행에 대한 말씀으로 사도가 고린도로부터 온 소식에 대해 세상 지혜와 분쟁이라는 주제에 이어 음행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게 됩니다. 


1. 사도 바울의 음행 지적(1)


본문 1절에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5장으로 이어지면서 고린도 교회의 거룩성을 위해 구체적인 죄의 모습을 지적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위 권징 시벌입니다. 권징이란 권선징악의 준말입니다.


첫째, “너희 가운데 음란함이 있음을 내가 확실하게 들었으니”라고 합니다(1, 상).


본문 1절 상반절에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라고 합니다. 본문은 ‘심지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는 사도가 들은 소식에 대해 확실함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사도는 말하고자 하는 음행 사건은 직접 목격한 사건이 아닙니다. 전해준 사람의 말을 듣고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지만 확실한 증거를 갖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듣게 된 일에 대해서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자신이 들은 일은 매우 긴박하고 예상치 않았던 일입니다. 경악해야 할 일입니다. 이 일은 음란에 관한 일입니다. 사도는 이 음란을 “이런 종류의 음란”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실 음란 자체에 놀랐기보다는 이런 음란이 “너희들 가운데”, 곧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라는 데 경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고린도전서 3:16-17절을 살펴볼 때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이 거룩한 성전임을 말했습니다. 어떤 자가 “하나님의 전을 멸한다면 하나님이 그를 멸할 것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특별히 교회는 한 사람의 범죄는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사도는 이 음란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러한 음란은 이방인들 가운데도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1, 중).


본문 1절 중반절에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일이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의 심각성을 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이방인과 비교하면서 음란의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로 간주하여 책망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다양한 음란의 형태를 지적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성결을 강조하였습니다(레18:1-30). 사도는 이방인도 하지 않는 음란의 일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며 질책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방인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셋째, “누가 아버지의 여자(부인)를 취하다”라고 합니다(1, 하).


사도 바울은 본문 1절 하반절에서 이 음란이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음란은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어떤 부인”을 취한 일이었습니다. 여기 쓰인 “여자를 취한다”라는 표현은 결혼과 같은 관계를 의미할 때 사용됩니다. 사도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이 일이 단순한 스켄들 이상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여기 표현된 “아버지의 부인”은 계모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계모와 같이 산다는 의미입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한 사람이 그의 계모를 데리고 산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식의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 감히 행해지지 않는 악질적인 일입니다. 음행을 저지른 남자에게만 그 책임을 추궁한 것으로 보아 그 계모는 아마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 남자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2. 사도의 책망(2)


본문 2절에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첫째, “통회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하여졌다”라고 합니다(2, 상).


사도는 곧바로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런 음행을 두고 통곡하고 그 행위자를 쫓아내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영적 부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한 교만함 때문에 복음과 거룩함이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악한 죄악을 보면서 그 어떤 대응도 없이 잠잠히 있습니다. 그들의 영적 심령이 무디어졌습니다. 거룩함의 거치나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잃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슬퍼하고 통회해야 할 때인데 고린도 교회는 오히려 교만이 가득합니다. 이 ‘교만’은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결과입니다. 그러니 신앙에 대한 일반적인 구원과 거룩에 대한 개념이 모호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과 분쟁으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둘째,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않고 있다”라고 합니다(2, 하).


본문 하반절에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정상적인 교회라고 한다면 그런 사건이 있다면 ‘통한히’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다”라고 책망합니다.


여기서 사도는 “너희 중에서”, 혹은 “너희 가운데서”라고 언급합니다. 이 일 행한 사람은 여전히 고린도 교회 구성원으로 있습니다. 음행하자는 여전히 교회의 가운데 있습니다. 교인들과 함께 교제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배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사도는 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통한히 여기지 않았다”라고 판단했습니다. ‘통한히’라는 단어는 ‘통회하라’라는 의미입니다. 곧 통회 자복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된 지체인 교회로서 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끌어내라”, “쫓아내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음란을 교회에서 제거하는 내용은 누룩과 반죽의 비유로 계속 반복적으로 말씀한 내용입니다(5:6-8).


사도는 동일한 이야기를 무교병의 비유를 통해 말하면서 모든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을 제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누룩과 같은 존재로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누룩 없는 ‘순전한 떡’이 되기 위해서는 이 사람이 추방되어야 함을 사도는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3. 사도의 심판(3-4)


본문 3절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라고 합니다.


첫째, “내가 이미 심판하였다”라고 합니다(3).


본문 3절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절에서 이 일 행한 사람을 내어 쫓으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본문 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이미 심판하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그들을 교회에서 쫓아내고 끌어내야 할 이유는 “이미 내가 이렇게 이 일 행한 사람을 심판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가 내린 심판의 특징을 두 가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도의 심판은 ‘즉각적인 심판’이었습니다. 사도는 ‘이미’라고 하여 심판이 지체 없이 긴급하게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사안이 지체할 수 없는 긴급을 요하는 사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는 누룩처럼 퍼저가 교회의 거룩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도의 심판은 ‘완료적 심판’이었습니다. 

 

사도는 이 사람에 대한 심판이 이미 완료되었음을 고린도 교회에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사도의 ‘완료’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경고한 이유는 이미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에서 떨어진 것으로 그 자체로 심판과 징계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판은 결국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사도는 이 사람의 음행이 다시는 재론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너무도 분명한 중범죄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그에 대한 판결이 끝났으므로 다시는 재론이 금지되고 있습니다. 이미 ‘심판의 완료’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미 완료된 심판의 긴급성을 언급하면서 회개 역시 긴급성이 요구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둘째, “육으로 떠나 있으나 영으로 함께하여”라고 합니다(4, 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여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떠나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교회에서 말씀으로 양육했습니다. 사도의 표현대로 육체로는 고린도 교회에 있지 않고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육으로는 함께 하지 않았지만, 영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마치 함께 있는 것처럼 이런 일 행한 자를 심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영으로 함께하여 내린 이 심판의 정당성입니다. 이 심판은 사도가 밖에서 판단하여 내린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함께 참여하는 가운데 안에서 내린 심판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심판은 사도의 개인적 판단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고린도 교회의 판단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사도가 내리는 판단은 고린도 교회와 함께 한 공신력 있는 정당한 심판이었습니다. 


또한 이 심판은 육체를 따른 판단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와 사도 바울의 영이 함께 하여 내린 판단입니다. 이러한 영의 판단은 보편적으로 영의 속성 가운데 온전성과 거룩성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판단은 영적인 판단으로 흠이 없이 완전하며 교회의 계속된 거룩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셋째, “나의 영과 너희가 함께 모일 때”라고 합니다(4, 하)


본문 4절 하반절에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라고 합니다. 사도와 고린도 교회의 영적 일체성을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부가적으로 이 심판이 그의 영이 고리도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모일 때 이루어졌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교회 모임의 신비로운 성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육체적으로 이 사람의 심판을 위해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이 모임은 전적으로 육체에 속하지 않은 영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도의 영과 고린도 교회가 함께 모인 ‘영적인 모임’과 같은 효력이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모여서 결정하였다면 당연히 징계의 심판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반대할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모와 함께 사는 자를 어떻게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넷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합니다(4, 하).


사도는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라는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서들에서도 중요한 선언적 진술을 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이 명칭은 신자들이 주를 부를 때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공식적인 명칭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교회에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교회는 존재의 가치를 얻으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심판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교회가 내리는 심판의 법제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하고 합니다(4, 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는 이 교회를 통하여 내려지는 심판의 효력에 대한 입증입니다. 이 심판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 수행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세상 권세를 이기신 참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교회의 머리되 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며 교회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사도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언급하면서 이 심판이 가지게 되는 구속력 및 실효성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 안에서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 한 심판임을 보여줍니다. 그 심판의 실효성 있는 심판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함께” 이런 일 행한 자에 대한 심판이 완료되었음을 보여줍니다.


4. 교회의 징계(5)


본문 5절에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첫째, “이 사람을 사단에게 내어 주라”라고 합니다(5, 상).


본문 5절은 성경신학자들에 의해 난해한 구절로 논의된 말씀입니다. 즉 5절 말씀을 단일구절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3절과 연결된 본문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3절과 “이미 판단하였노라”라는 말씀과 연결된다면 5절에 “사탄에게 내주었으니”라는 말씀은 사단에게 내어 준 행위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5절이 독립적 명령형으로 이해할 때 사단에게 내어 준 행위는 이제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미래로 아직 완료되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대체로 교회의 실제적인 징계는 3절에 언급된 “심판하였다”와 연결되어 이해합니다.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5절에 이미 심판하여 사단에게 넘겨준 것이 됩니다. 즉 완료형으로 이미 그렇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오면 미래에 구원이 완성될 때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입니다. 


심판이 이미 완료되었다는 의미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때 심판과 사단에게 내어 줌이 동시에 완료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남은 것은 실제로 이 사람을 분리하여 교제권 밖으로 쫓아내는 것만 남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단에게 내어 주는 것을 미래적으로 

남겨둘 경우, 심각한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사단에게 넘겨줌은 ‘출교(excommunication)’에 해당합니다. 출교의 목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사도 바울이 말씀한 “적은 누룩이 전체의 떡 반죽을 부풀린다”(고전5:6-8)라는 말씀에서 “적은 누룩을 조심하라”라는 경고의 말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단에게 넘겨주었다”라는 말씀은 교회의 권세와 보호 밖으로 쫓아내었음을 의미함이 계속된 문단의 진행에서 밝혀집니다. 


둘째, “육체를 진멸하도록”라고 합니다(5, 중).


본문 5절에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 중에 “육체를 진멸하도록”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는 멸망(‘올레트로스’)하는 단어를 여기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살전5:3; 살후1:9; 딤전 6:9)를 참고해 볼 때 매우 강한 실제적인 멸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실제적 멸망을 위해서 이 사람은 사단에게 넘겨집니다. 


셋째, “그 영이 구원받도록”라고 말씀합니다(5, 중).


본문 5절에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여기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징계에 있어서 육체의 멸함과 영의 구원을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이 대립은 평등한 문장 구조에서의 등위 대립이 아니라, 문장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사이에서의 대립입니다. “영을 구원하기 위해서 육을 사단에게 내어 주라”라고 말합니다.


그 음행자를 사단에게 넘겨주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단을 꺾으심으로 성립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함으로써 사단의 주권 영역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주권의 영역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쫓아낸 것은 예수 그리스도 주권의 영역에서 사단의 주권 영역으로 쫓겨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면 종말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망의 권세’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2:14에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단에게 사망의 세력을 주시고 이것을 죄인들에게 행사하도록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음행자를 교회 밖으로 쫓아내야 하는 이유는 심판과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순결성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는 구약 성경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약적 배경에서 한 사람의 범죄는 언약의 관계를 훼손하여 이스라엘 언약의 공동체 전체에 재앙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의 음행자 같은 행악자는 교회 공동체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훼손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5, 하).


영의 구원은 “주의 날(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완성됩니다. 이렇게 하여 사도는 이러한 일을 행한 자의 처리가 주의 날, 곧 심판의 날에 완성됨을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먼저 음란을 한 자를 사단에게 주어 그 육체를 멸하게 하는 것은 시간적 긴급함을 요구하는 사항이었습니다. 사도는 “이미”와 “내가 심판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종말에 심판과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음행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앞으로 종말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에 기회가 주어져 있음을 보여준 말씀이기도 합니다.


5. 교훈과 적용


성경에서 ‘교회’라는 개념은 ‘건물’이나 ‘예배당’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배를 드리는 장소나 예배당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는 믿는 무리의 모임, 집합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주님의 몸된 교회, 주님을 몸으로 하여 성도들은 그 몸의 각 지체라고 합니다. 각 지체가 심각한 범죄에 빠졌다면 이를 권면하고 회개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교회는 그를 출교해야 할 것입니다. 출교는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독립된 교회 교인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상실시키는 개념이 있습니다. 둘째는 아예 그리스도와 교제를 단절하여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 개념이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후자의 경우입니다.


이런 종류의 출교는 본문에서와 같은 범죄는 회개하지 아니하면 사단에게 내어 주는 의미에 해당한 출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말에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 용서를 받아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권징은 결국은 영적으로 회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종교개혁교회가 교회를 운영하는 원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가 말하는 이방인도 하지 않는 그러한 음행의 범죄는 결국 교회의 거룩성과 성결성 훼손을 막기 위해 교회 밖으로 쫓아야 합니다. 문제는 교회가 영적으로 무디어져 있습니다. 거룩에 대한 개념과 이를 지키고 운영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이 좋다고 하면서 심각하고 통탄한 범죄도 묵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교회의 거룩성과 성결성 유지를 위해 헌신한 주의 백성들에게 크신 능력과 은총을 주신다는 점도 본문이 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축복 속에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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