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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13] 변명하고 싶은 바울의 심정(인간의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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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 13] 변명하고 싶은 바울의 심정(인간의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은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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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고전 4:1-5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3:18-23절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속이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라는 문제로 자신을 드러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음을 말씀한 내용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자신들이 선호한 사역자들 중심의 파당을 만들어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다’라는 파벌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 파벌 의식은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교회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시 ‘복음과 세상 지혜’를 대조하며 복음이 가치를 설명합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신을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서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으로 평가를 받고 싶으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본문 고린도전서 4:1-5 말씀을 중심으로 ‘변명하고 싶은 바울의 심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변명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이런저런 구실을 대며 그 이유를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 때문에 어떤 심정으로 자신을 변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충성스러운 일꾼(1-2)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자 믿는 무리가 생겼습니다. 그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따르고 함께 뜻을 모아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나자 바울에 대해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다시 인간의 판단과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합니다.


첫째, 바울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알아달라고 합니다(1, 상반절)


본문 1절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먼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알아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일군”이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 ‘일꾼’은 ‘종’을 의미합니다. 그 종은 세상의 종도 아니요, 바울의 종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여기 종이란 헬라 세계에서 주인이나 상관을 수종 드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 기록될 때 그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종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청지기와 같은 동의어가 바로 종입니다. 이들을 본문은 일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교회에서 일꾼이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은 자신의 주인에 복종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종이 주인보다 더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은 것은 문제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언급된 일꾼이 곧 주인을 수종 드는 종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주인은 자동차가 없는데 종은 값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 주인은 걸어서 가고 종은 자신의 자동차를 타고 갑니다. 이것이 곧 한국교회의 현실은 아닙니까?


둘째, 사도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알아 달라고 합니다(1, 하반절)


본문 1절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합니다. 하반절에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비밀”이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가 그의 종들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최초의 서신에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 내용이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16에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라고 했습니다. 18절에 보면 그곳에서 3년 동안을 보냈습니다.


도올 김용욱은 사도 바울이 불교 수도승이 도를 닦듯이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동안 도를 닦아 깨달은 바가 있어서 전파하는 것이 바울 종교라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은 거짓이라고 합니다. 민중들이 이런 사상에 환호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시대 전형적인 거짓 교사임이 틀림없으며 거짓 교리입니다. 이단적 사상입니다.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 철학자 칸트(Kant, I., 1724~1804)의 우산 아래 있는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라비안 광야에서 3년 동안 철저히 자신을 반성하며 경건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 그리스도의 계시에 충실하고 순종하기로 했다. 이 훈련은 자신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피조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계시를 받아 여기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기로 결단했습니다. 바울은 3년 동안의 훈련을 마친 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철학자 칸트나 현대신학자들, 이들의 후예인 도울 김용욱 같은 철학자는 하나님의 계시, 그리스도의 계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의 신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의한 진정한 일꾼, 사역자, 종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그 하나님의 비밀을 복음으로 선포하는 선포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해 계시받은 자입니다. 이 계시(복음)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업을 경영하는(경륜) ‘청지기’였습니다.


 셋째, 자신들을 충성스러운 일꾼임을 알아 달라고 합니다(2절).


본문 2절에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합니다. 청지기들에게 요구된 것은 충성입니다. 누구에게 충성합니까?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일꾼들에게 자신에게 충성해 달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무서운 범죄입니다. 자신들이 주인이 받아야 하는 대접을 받겠다는 심보입니다. 이러한 생각하는 자들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함께 망하기 때문입니다.


청지기(일꾼, 종, 비밀을 맡은 자)는 자기 일을, 자기 멋대로, 적당하게 두루뭉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일을 해야 합니다. 주인으로부터 받은 권한 내에서 성실하게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모든 일꾼에게 따라오는 오는 의미는 ‘집사’입니다. 이 집사의 의미는 식탁에서 수정 드는 종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를 ‘식모’(食母) 라고 했습니다. 식모란 남의 집에 고용되어 그 집에서 먹고 자면서 주로 부엌일이나 청소 따위를 맡아 하는 여자를 의미했습니다. 요즘은 이 식모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가사 도우미’라고 합니다. 모두 다 집사에 해당한 의미의 일꾼으로서 종입니다.


교회 모든 일꾼은 ‘내가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종이요, 청지기’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를 보이고 순종하는 자가 바로 진정한 일꾼입니다. 거짓 일꾼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포장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기 전에 빨리 그런 행동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2. 사도 바울의 변명(오직 하나님의 심판에 맡김) (3~4절)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변명하고 싶어 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에 관한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에게서는 직접 말을 하지 못하고 사도 바울 뒤에서 자기들끼리 바울에 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2~4절에서 자신의 견해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책잡힐 그런 행동을 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말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첫째,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3, 상반절).


본문 3절에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합니다. 여기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상반절)라고 합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종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사명에 대한 충실도일 것입니다. 사도는 이미 3:14절에서 “만일 세운 것이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있으면 상을 받을 것이나”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인간들이 복음의 선포하는 자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주님의 일꾼, 청지기들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런 판단과 심판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일꾼을 판단하고 심판할 자들은 성도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월권입니다. 


둘째,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3, 하반절).


본문 3절 하반절에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일꾼들의 판단과 심판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꾼의 사명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사도는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감 놔라 배 놔라 했을까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신자들의 판단을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그들의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의 투정 정도로 넘어갑니다. 


그러면서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꾼이 실패한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한 판단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나를 판단하여 무너진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나를 좌절의 늪으로 끌고 갑니다. 자신이 자신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사역을 포기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예도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나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입니다. 내 안에 나의 아집과 교만을 버립니다. 철저히 자기 자신을 성찰합니다. 자신을 비판합니다. 그러면 내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앞서갑니다. 그 주님의 은혜 때문에 나의 존재 의미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라며 자신의 심정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심정 고백은 주님의 은혜임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자신을 학대하면 안 됩니다. 사역자가 자신이 자신에게 좌절과 공포감을 주면 안 됩니다. 오뚝이처럼 일어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주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내가 양심에 가책을 받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4, 상반절)


본문 4절에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 상반절에 보면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깨닫다’로 번역된 동사는 원래 ‘양심’이란 명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4절을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내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로써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사역에서 조금도 불충실하게 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양심에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14-15절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8:10절에서도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면서 양심의 중요성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 양심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그가 윤리적 규범을 지키고 있는가, 아니면 이를 어기고 있는가를 의식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긴 경우, 가책을 느끼게 할 뿐이지, 의를 이루는 기능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으로 그가 의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넷째, 그렇다고 내가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4, 중반절)

 

본문 4절 중반절에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하여 그는 의로운 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도가 자신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자신에 관해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정도로 문제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의롭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이런 논리는 우리가 보통 “내가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의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교인들에게 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정도로 잘못을 한 일은 없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섯째,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님이라고 합니다(4, 하반절)


본문 4절 하반절에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라고 합니다. 결국 모든 판단과 심판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사도는 이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 5: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최후 심판 때에 주님이 바울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또한 그가 그를 의롭다 선언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성급하게 자신의 견해에 따라, 자신들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사도 바울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난 일입니다. 늘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행위에 관한 점검을 받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나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은 축복임이 틀림없습니다.


3.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심판(5절)


사도 바울은 본문 4:1절에서부터 시작한 이야기에 대해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서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첫째,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5, 상반절).


본문 5절 상반절에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주님 재림과 더불어 일어나게 될 최후의 심판 전에, 인간들로서 서로를 심판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심판할 자격도 없습니다. 또한 올바른 심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심판과 판단은 자기 관점에서,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오판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다신 오실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둘째,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다 밝혀질 것입니다(5, 중반절).


본문 5절 중반절에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라고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고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누가 드러냅니까? 우리가 드러낸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 들어내실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 때에 다 드러날 것입니다. 심판의 빛에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인간의 비판과 판단이 중요치 않듯이 인간의 칭찬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에 절대적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칭찬한다고 하여 우쭐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비판하고 판단한다고 하여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최후의 심판 때에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칭찬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복음 선포자는 교인들의 비판이나 칭찬에 좌우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복음 선포자인 목회자가 자신이 주의 종임을 내세워, 양심의 깨끗함을 내세워 독선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런 경우 교회 규범은 이들을 시벌하는 경우가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교훈과 적용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주신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여전히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계시’로 말미암아 주어졌습니다.


그 계시를 전하는 복음 선포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영원 전에 감추어졌는데, 이 역사의 현장에 드러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계시를 받아 이를 전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이를 증거하고 전파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사명이었습니다.


사도는 이러한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불필요한 행위, 즉 남을 판단하고 주의 종인 사도 바울을 판단하여 사역자가 낙심케 하는 경우들에 대해 지적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복음의 선포자를 격려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최후 심판 때에 그의 행위를 인정해 주시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고귀한 가치관에 의해 사명을 감당하는 주의 종들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이를 믿고 믿음 안에서 역동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주의 종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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