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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10] 복음 선포자(사역자, 디아코니아)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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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10] 복음 선포자(사역자, 디아코니아)의 책임

교회의 파당은 결국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


바울 고린도 전도.png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

 


본문 / 고전 3:5-15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지난 시간에 고전 3:1~4절 말씀을 통하여 “육신적인 분쟁의 모습을 보인 교회”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의 은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은 파당을 짓습니다. ‘나는 바울파’, ‘나는 아볼로파’, ‘나는 게바파’, ‘나는 그리스도파’라는 식의 분파는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분쟁이 일어납니다. 이는 결코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거나 징계일 것입니다. 이는 사도가 전한 바른 복음으로 인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감격스러운 은혜를 깨닫지 못했거나 체험하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이번에는 본문인 고전 3:5-15절 말씀을 통하여 “복음 선포자(사역자, 디아코니아)의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변화를 받고 유대교의 교리에 반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율법 준수를 통해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는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된 교리였습니다. 이방인에게는 전혀 구원이 없다는 것이 유대교가 가르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른바 제2차 선교여행 중 A.D. 50~51년의 겨울에 고린도에 도착하여 약 1년 반을 머무르면서 그곳에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 A.D. 55년에 고린도전서를 썼습니다. 그때에는 아직 복음서가 없는 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그곳에서 3년을 지낸 뒤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3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게바를 만나 그와 함께 15일을 머물렀습니다(갈 1:17-18).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유대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돌아섰습니다. 사도는 여전히 본문 말씀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초석임을 말씀합니다. 그러한 초석 위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자(종)의 책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 교회를 세워가는 사역자들의 역할(5-9)


사도 바울은 농사의 비유를 통하여 교회를 세워가는 사역자들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사역자들은 역할은 서로 다르지만, 동역자로서 자기의 일한 대로 상을 받을 것을 말합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며 집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교회 내에서 지도자 사역자는 디아코니아(diakonia) 입니다(5).


본문 3:5절에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 내에서 지도자들을 두고 서로 자신들이 선호하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당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교회 내에서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는 질문형식이지만 책망의 성격이 강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지도자를 두고 파당을 삼는 것은 전혀 옳지 않습니다. 이는 신령한 복음의 진리를 사모한 자들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내 지도자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교회 내 지도자는 주님이 시키신 대로 일하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사역자’라는 단어를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교회 내에서 지도자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교회 내 지도자는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들이라고 강조합니다.


여기 ‘사역자’라는 ‘섬기는 종’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디아코니아(diakonia)로서 원래 식탁에서 시중드는 자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곧 섬기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종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교회의 직분들에 대한 칭호를 살펴보면 구별 없이 한결같이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교회 내에서 모든 직분은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직도 섬기는 직분입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고전 12:5). 그러나 모든 직분은 섬기는 자입니다. 각 직분에 값을 매겨 차등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직분을 계급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모든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 섬기는 종입니다. 종은 계급이 없습니다.


둘째, 농사의 비유를 통하여 교회를 세워가는 사역자들의 역할을 언급합니다(6-7).


본문 3:6~7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과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그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들어야 믿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구원 사역을 위해 고용된 종들입니다. 주인으로부터 고용되어 임무를 수행한 머슴들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성도들을 섬기도록 위임된 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임된 종들은 성도들의 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후 4:5절에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사역자들은 자신을 전파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심을 전파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성도들의 종이 되어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각각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받은 모든 신자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각자 그 은사를 통하여 섬기게 합니다. 섬기는 종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하여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 은사를 통한 자기 자랑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에게도 각각의 은사를 주셔서 섬기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진리를 자신과 아불로를 예로 들면서 설명합니다.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합니다. 심고 물을 주는 모든 사역자는 섬기는 자들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 은사일 뿐이라고 합니다. 누가 더 낫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믿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를 ‘심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나자 그 뒤로 아불로는 그의 은사와 사명에 따라 고린도 교회를 양육하였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성장시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교회를 성장시킨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어떤 직분을 맡았다면 그 직분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면 됩니다. 나에게 맡겨지고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며 원망하고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셋째,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사명을 감당하는 동역자입니다(8-9). 


본문 3:8~9절에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라고 합니다. 심는 사람과 물을 주는 사람은 하나입니다. 각자 자기가 일한 대로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사와 사명을 받은 모든 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역자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밭이며 건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성장시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과 아볼로 같은 사람에게 각각의 은사와 사명을 주셔서 교회를 섬기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아볼로는 같은 복음 선포자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밭’, ‘심는 일’, ‘건물’ 등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림 언어입니다.


렘 1:10절에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라고 합니다. 또한 24:6절에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를 세우고 양육하는 하나님의 일에 일꾼들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맡은 일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모두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는 같습니다. 다만 각자가 받은 은사와 사명에 따라 자신의 직분을 감당할 뿐입니다.


2. 지혜로운 건축자 같이 기초를 놓은 바울(10-11)


첫째,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복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10).


본문 3:10절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로운 훌륭한 건축가가 되어 기초를 놓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 위에 건물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물을 세우는 방법에 대하여 각자가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라고 합니다. 그는 에베소서 3:7절에서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은혜의 선물을 따라 일꾼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엄격한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로 행했던 자신을 다메섹도 상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로 불러 주셨습니다. 사도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서 교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 뒤 다른 복음 선포자들이 와서 바울이 닦아 놓은 기초 위에 집을 지어가는 일을 하였습니다.


자신은 ‘지혜로운 건축자’(사 3:3)같이 그 기초를 잘 놓았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사명자는 사도 바울이 세워놓은 기초 위에 어떻게 교회를 세울지 조심하고 주의할 것을 언급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11).


본문 3:11절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에 의해 이미 놓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아무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언급한 다른 복음을 의미합니다. 당시에 다른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로 주어지는 복음에 반대하여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자신이 닦아 놓은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기초는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엡 3:3). 이러한 계시에 의해 사도 바울이 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석 외에 다른 기초를 놓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약화시키고 변질시킨 율법, 세상적인 지혜, 인간의 공로 등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다른 복음에 해당합니다. 


3. 어떤 재료를 써서 집(교회)을 세워야 합니까?(12-15)


첫째, 건물의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12).


본문 3:12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고 말씀합니다. 건물을 세울 때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세우는 사람도 있고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초가 튼튼하고 견고해야 온전한 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건축 재료라는 그림 언어를 통해 복음 선포의 진정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복음 선포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다른 복음 선포는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나 인간의 공로 사상은 복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마치 모래 위에 지음 집과 같이 허물어질 것입니다.


둘째, 심판 때에 복음 선포자 사역의 질이 드러날 것입니다(13).


본문 3:13절에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심판 날에는 각자의 일한 결과가 불로 시험을 받아 밝혀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사역에 대한 공적으로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14).


본문 3:14절에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복음 선포에 충실한 종들은 심판 날에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사역으로 인한 해약이 심판의 불로 태워져 버릴 것입니다. ‘상’의 개념은 이 세상에서 같은 개념의 상은 아닐 것입니다. 그 상도 은혜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찬양하는 그런 상일 것입니다. 즉 자기 자랑을 위한 상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셋째,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은 사역자들이 있을 것입니다(15).


본문 15절에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공적이 타 버리면 상을 잃고, 그런 사람은 구원을 얻어도 마치 불 속에서 간신히 헤쳐 나온 것과 같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 스스로는 구원을 받긴 하지만, “불로 통과한 자 같이” 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또한 ‘행위의 심판’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의 공로를 쌓아 우리의 구원을 확실히 하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은 신앙의 대원칙이며, 이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 믿음의 순종의 삶을 책임 있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임은 분명합니다.


롬 1:5절에서 바울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의 삶이 복음과 상관없을 경우, 종말의 대 심판 때에 불로 태워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순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상이 있을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엡 2:20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시므로 이 모퉁이 돌이 고린도 교회 초석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 초석 위에 건물(교회)을 세울 때 주의해야 합니다. 건물의 재료인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 등이 있습니다. 각 사람의 세우는 공적이 그날에 불로 나타나 밝혀질 것입니다. 


건축은 터 위에 집을 짓는 일로써 건축 재료에 따라 달라집니다. 불에 타도 없어지지 않는 금, 은. 보석으로 건물을 짓는 것과 불과 타서 없어질 나무, 풀, 짚으로 집을 짓는 것으로 대조하는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공적이 불타서 없어지면 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받지만 불 가운데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 사역자들이나 직분자들은 교회를 섬길 때 분명한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기준이 모호하면 신앙도 모호합니다. 직분을 감당하는 것도 모호하여 분쟁을 유발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분쟁이 따라다닐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지 아니하면 실수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적인 지혜나 공덕 사상, 기복사상으로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양육하고 이런 식의 복음을 전한다면 다른 복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는 믿음의 순종을 통하여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그 말씀으로 운영됩니다. 인간의 욕망을 위한 교권의 수단으로 교회를 이용하면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은 불로 태울 때 없어질 공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평생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헛수고’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수 있으려면 바른 복음 안에 거해야 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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