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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9] 육신적인 분쟁의 모습을 보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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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9] 육신적인 분쟁의 모습을 보인 교회

교회의 파당은 세속적인 교인이라는 것을 입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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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고전 3:1-4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지난 시간에 고전 2:10-16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지혜를 깨닫게 하신 성령’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지혜를 하나님의 구원계획으로 설명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인 구원계획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설명했습니다. 

 

사도는 성부 하나님만을 인정하는 유대인들과 다르게 성자, 성령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며, 이러한 구원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와 구원계획은 ‘육에 속한 사람’은 깨닫지 못합니다.


이번에는 본문 고전 3:1~4절 말씀을 통하여 “육신적인 분쟁의 모습을 보인 교회”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는 이미 1:10-17에서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지적했습니다. 지적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라는 분파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쟁은 신령한 자가 아닌 육신적인 자들의 모임에서 발생한 것들입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음의 초보적인 이야기만을 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그 초보적인 단계에서 서로 파당을 만들어 교회를 혼란케 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한 내용이 바로 본문 말씀입니다.


1. 신령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한 신자와 교회(1-2)


첫째,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신령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1).


본문 3:1절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교회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신령한 사람, 곧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 수준이 낮은 마치 어린아이들을 대하듯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은 과거 시제로 ‘하였노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당도하여 복음을 선포하야 교회를 세울 때에 고린도인들은 육적인 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만에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이었기에 초보적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에게 심오한 하나님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에 관해 수준 높은 진리를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기본적인 복음의 핵심만 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그들은 과거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수준이 결국은 시기와 분쟁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달라져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에서 파당과 분쟁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문제를 지적하며 계속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2: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 되기 때문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육에 속한 사람을 언급합니다. ‘육에 속한 자’(프슈키코스)란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 본문인 3장 1절과 3절은 ‘육에 속한 사람’인 불신자와 같은 사람이 아닌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언급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육신에 속한 자’(싸르키노스 혹은 싸르키코스)란  육적 신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2:15에서 언급된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란 ‘신령한 신자’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고전 2:15).


그런데 본문 3:1절에 와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신령한 자”라고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령한 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2:14절에서 언급된 불신자에 속한 ‘육에 속한 자’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는 각 분파로 분쟁을 일삼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본문 3:1절과 3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인 ‘육신에 속한 자’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3절과 4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 ‘지금 나는 신령한 자입니까?’, 아니면 ‘육신적인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는 하나 전혀 믿지 않는 자는 아닙니까? 혹은 믿음을 흉내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5절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둘째, 영적인 수준을 젖 먹는 어린아이와 같이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2).


본문 3:2절에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 하리라”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영적 수준은 단단한 음식을 먹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영적으로 믿음이나 복음의 진리에 관해서 어린아이의 수준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너무나 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믿음이 약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 이유가 정확히 드러납니다. 에베소서 1:17-19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도들이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그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위해 바르게 믿고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알아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사도는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그것만큼 성장합니다. 성숙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세상적인 지혜가 아닌 오직 계시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믿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해 주셔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는 하나 아직 어린아이의 수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런 자들은 영적인 단단한 음식으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너무나 쉽게 오해합니다. 그리고 시험에 듭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어린아이의 수준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사탕 하나 줄까’라며 접근하는 수준입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오묘한 하나님의 신비의 세계를 말씀으로 접근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식대로 살아갑니다. 자기 고집대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자기 수준으로 판단합니다. 


2. 분쟁을 좋아하는 육신에 속한 신자와 교회(3)


지금까지 신령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한 신자와 그들로 구성된 교회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분쟁을 좋아하는 육신에 속한 신자와 그들이 소속된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3:3절에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먼저 신령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한 신자가 있는데 그들은 신령하지 못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풍성한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분쟁을 좋아합니다. 본문은 ‘시기와 분쟁’이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의견으로 다툼이 일어납니다. 서로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용서하지 못 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 할 일이 없습니다. 용서와 이해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내려놓은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것은 감정싸움, 자존심 싸움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나를 쳐 복종시키면 됩니다.


이러한 시기와 분쟁은 신령한 영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면 안 됩니다. 신자가, 영적인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믿음과 은혜로 살아가지 않고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의 모든 판단과 평가는 세상적인 기준이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문제가 된 것이 교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세상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두 영역은 적용하고 평가하는 기준이나 가치관이 다릅니다.


3. 육신의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파당 싸움(4)


본문 3:4절에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상황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파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아볼로파다.’ 하고 말하면서 파당을 짓습니다. 이런 파당은 세상 사람과 다를 바 뭐가 있겠습니까?


고린도 교회는 끊임없이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라고 하면서 분쟁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복음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예수를 믿고 성령은 받았지만, 시기하고 파당을 짓는 것은 바로 육신에 속한 신자들에게서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부정적으로 ‘육신적인 자들’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직도 시기하고 분쟁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받고 성령에 따라 사는 ‘영적인 자’가 아닌 ‘육신적인 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그 정신으로 자기반성을 해야 합니다. 이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후회의 차원이 아닙니다. 철저한 마음 중심으로 우러나오는 회개는 나의 삶을 변화시켜 줍니다. 변화의 힘은 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때 믿음과 성숙한 삶은 우리를 복되게 할 것입니다. 이제 악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내가 선한 영향력으로 행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김포시에서 재난 지원금을 각 종교단체에 지급ㄹ한다고 합니다. 코로나19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예방 용품 구입비로 일관적으로 교회에 75만 월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특정 개인이 이런 지원비를 받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 기관으로부터 이런 비용을 받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교회의 방역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의 방역 활동을 교회가 앞장서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의 이웃 사랑의 실천과 국가와 정부, 국가 기관을 향하여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과연 가톨릭교회가 과연 이런 비용을 신청하겠습니까? 


교회가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교회가 국가의 행정관청으로부터 구제를 받아야 할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이웃들이 코로나의 확산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행정관청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종교단체에 제공할 그런 예산이 있다면 어려운 우리 이웃을 도우라고 말할 수 없습니까?


교회가 세속적인 육신적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면 교회는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교회이든 교회 구성원이든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아야 성숙한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을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신앙 수준은 세속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회 내 분파는 상당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누구와도 같이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의 공적인 일은 사심이 개입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직분으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공적인 직무에 있어서 언제나 객관적이어야 하며,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월권 해서도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것처럼 그것은 곧 복음의 초보적인 단계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초보적인 어린 단계에서 아이와 같이 젖을 먹는 단계가 아니라 단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는 단계로 성장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배우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분파는 결국 세속적인 인성과 가치관을 따르게 되므로 일어난 현상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2-14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육신적인 행실을 멀리하고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성령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로마서 8:15절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라고 합니다.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그것을 한번 묵상해 봅시다. 그리하면 감사가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하나님은 절대로 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께 충성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사람으로는 교회에서 올바른 신앙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파당을 지어 자신들의 존재감이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태도는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대로 그것은 육신적인 자의 세속적인 모습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 이런 세속적인 가치관이 침투해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분쟁이 발생합니다. 서로 사기하고 질투합니다. 이제 이런 옛 모습으로부터 탈피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는 하나입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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