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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어제와 오늘(6) 조선신학교의 직영 인준과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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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어제와 오늘(6) 조선신학교의 직영 인준과 취소

조선신학교는 총회 직영신학교 승인, 총신대의 전신일 수밖애 없다.


조선신학교 (1940) -승동교회 안.png
조선신학교 설립시 승동교회 (1940)

 

역사는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고 한국에 주재한 해외 4개의 선교부 선교사들은 강력히 항의 하며 반대했다. 선교사들은 1939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자진 폐쇄했다.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기 이전에 일제의 핍박은 극에 달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본국으로 출국했으며, 남궁혁, 박형룡, 박윤선 박사 등의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모두 외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일제의 외국인 선교사들의 강제 출국지시로 한국교회를 지킬 수 있는 선교사들도 없었고 한국인 보수신학자들도 없었다.


그동안 보수주의 신학의 위세에 눌려 뜻을 펴지 못하고 있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운 신학교의 설립 명분을 찾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김재준 박사였다. 


그는 일찍 일본 청산학원을 나와 도미, 1929년에 프린스턴신학교를 수학했으며 1932년 미국 웨스턴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 1933년 이후 산정현교회, 오윤선 장로, 조만식 장로가 세운 숭인상업학교에서 교목 및 교사가 되어 가르쳤다.


그는 당시 평양신학교 교수로 들어가지 못하고 중학교 교사로 있었던 그는 평양신학교 폐교와 함께 신학교는 서울에 있어야 한다면서 “한국의 신학교육은 한국인에 의해서”라는 자치권을 명분으로 내세워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1939년 3월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 13명이 서울에서 조선신학교 설립위원회를 조직하고 학교 설립 추진 작업을 송창근 박사에게 일임하고 있었을 때 백방으로 독지가를 물색하던 중,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와 제휴되어 쾌히 학교의 재단 설정을 위해 거액의 재산을 희사하기로 하고 설립재단과 운영비로 30만 원 상당의 부동산과 헌금을 내놓았다(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새역사 50년사」, 59.). 


김대현 장로는 1893년 경북 영일 태생으로 어릴 때 유교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여생을 주로 교육 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부동산 소개업에 종사하면서 승동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으며, 1923년에 장로 장립을 받았다.


서울에 세우기로 했던 조선신학교는 당시 서북 교계 지도자들이 평양신학교를 평양에다 재건키로 함으로써 본래의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신학 노선에 대한 쟁점 때문이었다. 서울에 조선신학교 설립을 추진하던 위원이 아빙돈 주석 사건에 관여했던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등등의 인사들이었기에 교계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설립위원장으로 있던 채필근은 평양신학교가 다시 문을 열게 되자 평양신학교로 가버렸다. 


총회는 후 평양신학교를 총독부 인가를 받게 하고 총회 지정신학교로 결정하였다. 조선신학교는 겨우 경기도지사의 사설 강습소 인가만 받아 1940년 4월 19일 조선신학원으로 개교하였다. 이때 송창근은 일제 경찰의 강압으로 신학원 일을 볼 수 없게 되자 김대현 장로가 부득불 신학원장이 되었다. 


제28회 총회에서 서울에다 신학교 설립 허락을 받은 서울 조선신학원 기성회는 제29회 총회에 올린 신학교의 목적을 “장로회 목사 양성”에 두었으나 평양신학교 측의 반대로 “장로회 교역자 양성”으로 수정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제29회 총회는 “신학교육부 부장 조희염 씨가 여좌히 보고함에 조선신학원 보고 중 ‘장로회 목사 양성’을 ‘장로회 교역자 양성’으로 개정하고 채용하기로 가결”하였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9회 총회 회의록」(1940), 42.). 

 

제29회 총회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신학원 함태영 이사장 이름으로 총회에 보고된 조선신학원 설립에 관한 보고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8회에서 조선신학교 설립 경영의 인정을 얻고 그 설립위원으로 승인을 받은 설립 기성회 실행위원 13명은 이사회를 조직하여 그 설립 사무를 일임한바 이사회에서는 경기도 지사의 인가를 얻어 신학 전 과목을 교수하여 장로회 교역자를 양성하는 조선신학원을 설립”을 보고하였다. 


조선예수교 장로회 조선신학원 일람에 설립목적은 “본 학원은 복음적 신앙에 기(基)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충양유위(忠良有 爲)한 황국(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하였다. 


조선신학교의 설립목적은 우선 민족을 위한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충성스럽고 나라(일본)를 위하는 일본 교역자 양성이 목적이었다.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앞장서는 신도주의 교회사(敎悔師) 양성이 그 목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를 이어받은 한국기독교 장로회 한신대학교는 「한신대학 50년사」(1990)에서 조선신학교 설립목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복음적 신앙에 기초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현 조선교회가 요구하는 건전한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함.”(「한신대학 50년사」, 13)

 

이것은 객관적 사실의 역사 기록과 거리가 먼 역사 날조에 불과하다(최덕성,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본문과 현장 사이, 2000), 303-313). 이사장 함태형 목사가 총회에 보고하여 총회록에 실린 조선신학교원의 설립목적은 “충양유위(忠良有爲)한 황국(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신대학 50년사」는 이것을 “현 조선교회가 요구하는 건전한 교역자 양성”으로 바꾸었다(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제29회 총회 회의록」(1940), 42-45).


조선신학원의 첫 학원장에 김대현 장로가 취임했다(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9회 회의록」(1954), 44.). 1943년 첫 학기는 감리교신학교 교사에서 양교 합동으로 학업을 실시했다. 일제의 요구에 따라 양교의 병합이 추진되었으나 1943년 5월에 원상으로 회복되었다. 


이어서 김재준 교수의 원장 취임과 더불어 일본인 미야우찌 아끼라가 교수로 취임했다. 전임강사로 한국인 전성천, 강자회, 유호준, 일본인 하나무라 요시오(花村芳夫), 무라기시 세이유, 야먀구찌 다로 등이 가르쳤다(“한국신학대학 35년의 발자취”, 「신학연구」16(1975), 335.). 


학생들은 학도 동원령에 따라 1945년 4월에서 광복까지 전교생이 평양 선교리 소재 종연화학 공장에서 일제를 위한 노동을 제공했다. 조선신학교는 1942년 3월 31일 제1회로 11명 배출을 포함해서 1945년 해방 전까지 4회에 걸쳐 9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대한기독교장로회 총회,「호헌사」(1959), 97.)


해방 직후 조선신학교는 한국에서 유일한 신학교육 기관으로 되어 있었다. 평양신학교, 봉천신학교 등은 공산지역에 들었으므로 말할 것도 없었고, 감리교신학교, 서울신학교(성결교) 등도 다시 개교하기에는 상당한 정비기간을 요구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 만주, 중국, 일본 등지의 각양 신학교육 기관에 재학 중이던 신학생들이 조선신학교에 모여들어 학생이 360여 명에 달했다(한국기독교장로회, 「韓國基督敎長老敎會 十五年 略史」(1965), 31.).


조선신학교는 광복 후 미 군정청으로부터 학교 인가를 받았다. 교장 김재준, 전임강사 송창근, 한경직이 취임했다. 1946년 3월에 송창근이 교장직에 취임했고, 한경직, 최윤관, 서고도(William Scott)가 전임 교수로, 전성천, 정대위, 조선출, 공덕귀, 이영회, 김관식, 김정준, 박봉랑, 차보은 등이 전임강사와 강사로 임명을 받았다. 


1946년에 남부대회(제32회 총회)에 의해 장로교단 직영신학교로 인정을 받았고, 1947년에 대학 인가를 받았다. 1946년에 학장으로 취임한 송창근 박사는 동란 중에 납북되었다. 함태영, 김관식, 오건영, 조희염, 김길창, 김영주, 김영철, 한경직, 윤인구 등이 이사와 강사로 활약했다(김재준, 「한국신학대학의 역사적 위치」(한국신학대학보) 3(1957), 5.). 채필근은 이 학교 초창기에 교수로 일하다가 얼마 후 평양신학교의 교장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선신학교는 1951년에 한국신학대학으로 개명하게 되었다.


조선신학교는 해방 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2회 총회로 기록된 1946년 남부총회에서 총회의 직영신학교로 인준을 받았다. 


제36회 총회가 1950년 4월 21일 대구제일교회에서 회집되었다. 이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총회 직영 취소와 총회신학교가 설립을 승인받는 총회였다. 남산 장로회신학교는 조선신학교의 직영 취소를 전제로 함께 취소하기로 하고 새로운 단일 총회 직영신학교인 총회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 측은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무장 경찰관까지 동원되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조선신학교 측의 강원룡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동창생들과 총대들의 폭력과 난투극으로 총회가 수라장이 되었고 무장경찰 관의 출동으로 제지하고서야 평정되는 사태까지 오고 말았다.


제36회 총회는 임원 개선도 하지 못한 총회는 비상 정회를 하고 말았다. 속회 총회는 1950년 9월 1일이었지만, 전쟁으로 인하여 정한 날짜에 속회하지 못하고 다음 해인 1951년 5월 25일에 제36회 총회가 부산중앙교회에서 모였다. 


특별위원회는 6·25동란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신학교 문제가 지난번 총회 결의대로 실행할 수 없었음을 보고하고 각 노회의 수의는 거치지 말고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신학교를 신설하자는 안을 총회에 제출하여 가결하였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는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 직영신학교를 신설하기 위하여 과도이사를 총회에서 선정하되 과도이사는 각 노회 대표 2인과 각 선교회 대표로 한 신학 위원으로 하기로 가결하였다(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제36회 회의록(1950), 105.).


총회는 신학교 문제 특별위원의 보고를 정식 제안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동 안을 거수 표결에 부친 바 53:3이라는 압도적인 표로 가결하였다(김양선, 「韓國基督敎解放 十年史」, 252) 가결 표수는 총회록에 기록되지 않음. 


이렇게 하여 1952년 9월 18일 대구에서 새로운 총회신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새로 신설된 총회신학교의 교수진은 교장 : 감부열(甘富悅, Archibald Campbell) 선교사, 교수 : 박형룡, 한경직, 권세열, 명신홍, 김치선 등이었다.


필자는 이 부분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박형룡 박사는 신사참배 문제로 한국장로교회가 고난과 환난이 닥칠 때 주기철 목사와 다툰 후 일본을 거쳐 만주로 망명을 했다. 해방 후 고려신학교 학장으로 취임하는 계기로 입국했다. 그러나 고려신학교 교장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장로회 총회의 목회자 양성은 사설신학교로는 안 된다는 소신에 따라 서울로 상경하여 남산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했다. 이 신학교 역시 사설신학교였다.


그러나 자신이 외국에 망명가 있는 동안 한국장로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신학교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며, 후 평양신학교, 조선신학교로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는 길을 목표로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결국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두 신학교의 직영이 취소되기 이전에는 전혀 다른 신학적 입장에 따른 두 개의 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둘 수 없었다. 남산 장로회신학교를 폐교하는 정면 승부를 걸어 조선신학교의 직영을 취소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조선신학교의 총회 직영 취소에 성공했으며, 새로운 보수신학의 요람으로 총회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조선신학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직영신학교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신학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절 총회직영신학로서 조선신학교는 총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제32회 총회(1946)부터 제36회 총회(1950) 때까지 총회 직영신학교였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총신대학교의 전신인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신학교 졸업생들은 총신대학교 졸업기수에서 제외되었다. 역사의 연혁에서도 제외되었다. 역사는 거짓이 없어야 하고 사실대로 기술해야 한다. 총신대학교가 교단 직영신학교이기 때문에 과거 평양신학교로부터 조선신학교를 포함하여 금년에 120주년이라는 계산이 니온다.


비록 조선신학교가 오늘날 총신대학교와 총회의 신학적 입장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오늘의 총회가 있기까지 그 총회의 직영신학교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다음은 '남산 장로회신학교 편'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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