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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어제와 오늘(5) 후 평양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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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어제와 오늘(5) 후 평양신학교

한국장로교회의 최초의 신학교 운영의 자치운영, 그러나 어용신학교였다.

후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식(1941. 3. 12.).jpg
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식(1941. 3. 12.) 졸업식장 정면에 일본기가 보인다. 일제의 지배를 받는 신학교가 되었다.

 

1938년 평양신학교가 스스로 학교 문을 닫은 다음 해인 1939년에 와서도 선교부가 신학교를 개교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평양과 서울에서 개교 또는 신설을 위한 움직임이 일게 되었다. 평양에서는 1939년 3월 3일에 총회 신학교육부가 평양 서문 밖 예배당에서 모여 회의를 하여 총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본부가 지난 3월 3일에 평양 서문밖예배당에 회집하여 현 신학교는 본 총회에서 직영키로 결의하고 기본금 50만 원을 모집키로 하였사오며, 현 신학교 인계 청원을 재 조선 4미션회와 선교연합공의회와 4미션 선교본부에 발송하였던바 남장로 미션 본부에서는 선교 연합공의회에 일임하겠다 하였사오며 캐나다 미션 본부에서는 조선총회가 경영함을 찬성하였사오며 재조선 캐나다 미션회에는 금번 총회 후에 토의하기로 보류하였다 하오며 선교사연합공의회에서는 인계할 수 없다 하였사오며 호주 미션 본부에서는 재조선 미션회 의견을 들은 후에 회답하겠다 하였사오며 호주 미션회에서는 신학교로서 8월 31일에 개학 통지를 받았으니 그 일은 다시 고려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제28회 총회 회의록」(1939), 65.)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28회 총회(1939)는 “① 현 신학교는 총회에서 직영하며 ② 기본금 50만 원을 모금키로 한다”라고 결의하였다. 이 같은 내용을 네 선교부에 청원하였으나 선교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유는 신사 참배한 장로회 총회에 신학교를 넘겨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총회 신학교육부 부장 김선환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8회 총회(1939년)에서 “현 신학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로 본 총회와 선교회가 협동 경영하여 오던바 선교회가 만 1개년이나 자의로 개교치 아니하고 또 연기하오니 본 총회가 직영으로 금추에는 당연히 개교하실 일”(제28회 총회록, 66.)이라고 보고하여 총회가 허락하였다.


총회 결의에 따라 1939년 10월 17일에 (후) 평양신학교 설립 신청을 평남도청에 제출하였고, 1940년 2월 9일 자로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 이것은 조선총독부가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해 준 것에 대한 답례와 같은 인상이 짙다. 1940년 4월 11일에 신학교를 개교하고 이 신학교를 ‘후 평양신학교’라 칭하기도 하고, “전 평양신학교”로 칭하고 있다(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9회 총회의록」(1940), 45).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작년(1939년) 총회 결의로 평양신학교를 설립고자 인가신청을 소화 14년(1939년) 10월 17일에 평남도청에 제출하였던바 본년 2월 9일부로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서 동 4월 11일에 개교식을 거행하였사오며.”라고 보고한다(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9회 총회 회의록」, 45).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평양장로회신학교는 스스로 문을 닫은 이후 총회가 중심이 된 후 평양신학교는 1940년 2월 9일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1940년 4월 11일에 개교한 신학교는 채필근이 교장으로 한 후 평양신학교이다. 합동 측 총회 신학교인 총신대학교는 바로 1901년에 설립되어 1938년에 스스로 문을 닫은 평양신학교와 1940년에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다시 조선총독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아 개교한 후 평양신학교(교장 채필근 목사)를 그 역사적인 뿌리로 하고 있다. 


그러나 후 평양신학교의 부끄러운 역사 때문에 총신대학교의 역사적 뿌리에서 이를 제외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된 시기의 조선신학교는 총신대학교의 역사적 뿌리에서 제외했다.


선교부가 전 장로회신학교의 건물과 시설들을 넘겨주지 않음으로 임시교사로 최억태 씨가 소유한 옛 동덕학교 교사를 사용하다가 1940년 가을부터 마포기념관과 서문밖교회의 아래층을 사용하였다


“작년 총회 결의로 평양신학교를 설립코자 인가신청을 소화 14년(1939년) 10월 17일에 평남도청에 제출하였던바 본년(1940) 2월 9일부터로 조선 총독의 인가를 받아서 동 4월 11일에 개교식을 거행하였사오매 인가받기 전에 재래 신학생의 사정을 고려하여서 소화 14년(1939) 10월 25일부터 익년 3월 9일까지 사경반 형식으로 교수하여서 9명에게 졸업증서를 수여하였사오며 임시교사는 최악 태 씨의 소유인 전 동덕학교 교사를 사용하다가 금추기 부터 마포기념관과 서문 외 교회 하층을 임시교사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9회 총회 회의록」(1940), 45).


1940년 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자는 9명으로 김용국, 김성규, 고봉윤, 소연수, 유동만, 조상원, 이정현, 이순도, 조상필 등이다. 이들은 후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이면서 평양신학교 제34회(1939)에 이어 35회가 되었다. 후 평양신학교는 1949년 제44회에 29명의 졸업으로 평양신학교 이름으로 졸업은 종결되었다.


후 평양신학교는 채필근이 교장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전 평양신학교가 문 닫은 것과는 달리 신사참배를 결의한 총회의 뜻에 따라 일제 조선총독부의 인가로 복교된 학교이기 때문에 친일적인 성향이 농후할 수밖에 없었다(김인수, “일제 말기의 기독교 탄압과 교회의 이용에 대한 소고”, 교회와 신학」 19 (장로회신학대학교, 1987), 246.) 후 평양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출발하여 일본 황도정신(皇道精神)에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공산주의에 이용되어 마침내 사멸되었다.”(김양선 「韓國基督敎解放 十年史」, 195)


1940년에 세워진(복교) 후 평양신학교(교장 채필근)는 해방을 맞이한 1945년 12월 1일에 이북에 있는 5도를 중심으로 연합 노회를 구성하여 총회를 대리하게 하고(남쪽은 남부총회) 이 연합 노회에서 후 평양신학교를 직영하기로 하고 김인서 목사를 교장으로 세웠다. 


해방과 함께 북한지역에 찾아온 것은 해방의 해 8월 20일 소련군이 원산에 상륙하였고 24일 그들은 마침내 평양에 진주하였다. 소련군은 8월 26일 정치 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입회하에 민족진영과 공산 진영을 같은 비율로 하여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하고 나아가 “5도 인민위원회”를 장악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1946년 11월 3일 공산당 정부수립의 골격인 입법부 구성을 목적으로 도ㆍ시ㆍ군 인민위원회 선거가 치러졌다. 김윤찬 목사 등 여러 목회자가 ‘평양 신앙동지회’를 구성하고 이 이름으로 인민위원회 선거에 대항했다. 이때 동지회가 결의한 내용은 “우리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평양을 사수한다. 우리는 신앙을 위하여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성을 위하여 이 작은 몸을 주님의 제단에 바치기로 한다.”라는 내용이었다.


1947년 1월에 후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이성휘 목사가 취임했다. 당시 북한에 두 곳의 신학교가 있었는데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와 감리회 계통의 성화신학교였다. 1948년에 공산정권은 어용단체인 기독교연맹을 발족하였는데 1949년 겨울방학 이후 평양신학교를 장악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기독연맹 서기인 조택수 목사는 평양신학교 현관에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걸어놓고 신학생들에게 사상교육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1학년에 재학하여 수업을 받는 신학생 중에 이종겸(성북교회 원로 목사), 이규일(장충교회 원로 목사)은 계속 수업할 수 없어서 수업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북한에 들어선 공산정권은 두 개의 신학교를 합병하여 공산 정책을 따르는 120명을 제외한 600명 정도를 중도 하차시키고 말았다. 이때(1950년 봄)의 교장은 기독연맹 부위원장이었던 김응순 목사가 되었다(김요나,「총신90년사」, 290-191). 이렇게 하여 1901년에 세워진 평양신학교는 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가 있자 선교사들이 폐쇄하게 되자 1940년에 신사참배를 결정한 장로회 총회(친일 인사들이 중심)가 다시 복교시켰다. 그 후 “후 평양신학교는 1950년 봄에 그 종말을 보게 되었다.


후 평양신학교는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자체적으로 설립하여 운영한 직영신학교이다. 이 신학교는 총회가 설립한 신학교이지만 평양장로회신학교와 오늘날 총신대학교의 설립이념인 신학적 입장이 다른 신학교이다. 현재 졸업기수로 후 평양신학교 제1회(1940)에서 제10회(1949)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총신대학교의 역사에서는 후 평양신학교를 배제했다. 이 신학교는 이미 평양신학교 교수인 선교사들과 참여했던 한국인 교수들은 다 강제 출국 및 망명으로 일본이나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유주의자들이 주관한 신학교였다. 특히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답례로 인가한 후 평양신학교는 평양장로회신학교와 현 총신대학교의 신학적 정체성을 유지ㆍ계승할 수 없는 신학교이다.


후 평양신학교가 오늘날 총회를 계승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설립한 직영신학교였다는 점에서 총회와 총신대학교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계승한 신학교로 삼기에는 부담이 된다. 그래서 총신대학교의 역사에서 후 평양신학교의 흔적 지우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후 평양신학교 역시 총신의 전체 졸업 기수에 포함하여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으니 딜레마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 후 평양신학교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싶다. 한국에 주재한 외국 선교부는 한국교회의 독립된 자치권을 위해 외국 선교본부의 승인으로 독립된 독노회를 설립했다. 소위 네비우스 선교 정책 가운데 자치권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에 대한 자치권을 한국교회에 넘기지 않았다.


한국 주재 각 선교부가 직접 평양신학교를 운영했다. 이 신학교를 조선총독부로부터 일본 민사령에 의해 ‘재단법인 재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유지재단’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각 선교부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1938)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는 이유로 신학교와 재단을 한국교회에 넘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폐쇄해 버렸다. 신학교와 신학교 재산을 한국교회인 총회에 귀속시킬 수 없다는 의지가 강했다.


이 시기는 적어도 보수적인 신학자인 남궁혁, 박형룡, 박윤선 등은 총회가 신사참배를 하기 전에 이미 망명으로 한국에는 없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자치적으로 신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길이 없어져 버렸다. 이제 총회는 일제에 아부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사람들이 조선총독부에 신학교 설립 허락을 받아 최초로 한국교회 자치권에 의해 운영된 신학교가 바로 후 평양신학교였다. 이 신학교는 그동안 유지해 온 평양장로회신학교의 보수적인 신학과는 정반대의 신학적 입장을 갖고 있는 자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총신대학교는 이 후 평양신학교가 교단 신학의 정통성에 반한 신학교로 평가한다. 엄연히 총회가 결의하여 운영한 교단신학교를 역사에서 삭제 또는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은 모순이다. 평양신학교와 남산 장로회신학교가 폐쇄됐다. 그리고 새로운 총회신학교를 설립했다. 총회신학교가 교단에서 운영한 신학교이기 때문에 평양신학교를 계승한 학교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떤 신학교는 배제하고 어떤 신학교는 계승한다고 하는 이 모순적인 딜레마를 안고 지금 총회(합동)와 총신대학교는 운영되고 있다.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조선신학교 편’


소재열 목사(한국교회법연구소, 한국교회사 Ph.D., 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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