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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국 선교 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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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국 선교 32년

25세에 한국에 파송되어, 1916년 10월 12일 미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32년간 봉사한 후 57세에 소천했다.


언더1.png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1892), 원 안은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


고종 12년 때인 1876226일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일본과 맺은 최초의 근대 조약이다. 공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이며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강화도조약 이후 점차 서구열강과의 문호가 개방됨에 따라 기독교회(개신교)의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1884년 9월 20일 중국에서 활동했던 알렌(H.N.Allen, 安連)은 제물포를 통해 입국했다. 알렌은 한국에 상주하는 최초의 개신교 의사 선교사가 되었다. 이 날을 한국선교 사발점을 삼고 있다. 이듬해인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는 미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G.Underwood, 元杜尤), 미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G.Appenzeller, 亞扁薛羅)가 제물포항에 도착하여 최초의 상주하는 목사 선교사였다. 

 

영국성공회에서 1889년 코르프(C.J.Corfe, 高要翰) 신부가 초대 한국주교로 도착하였고, 호주장로회는 선교 준비차 1889년 9월 메리 데이비스(Mary Davies)를 파송한 데 이어 1891년부터 본격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미국 남장로회가 1892년 전라도를 대상지역으로 한국선교를 시작했디. 1895년에는 미국 남감리회가, 1898년에는 캐나다장로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이후 1907년에는 한국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는 해에 한국인 전도자에 의해 성결교의 모체인 동양선교회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1908년에는 구세군의 한국선교가 착수되었다. 이렇듯 한국에 진출한 선교사들은 전도 및 의료·교육사업에 매진하는 한편 선교를 위한 관련서적을 편찬하였다. 특히 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이를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조선말기 개화 정책으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의 조약 체결했다. 가톨릭교회와 기독교와 정부, 가톨릭교회와 기독교회와 비종교인들과의 분쟁이 외교적 타협과 중재로 해결되기도 했다. 1876년(고종 13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개화 시대로 나아 갔다. 


한미 수호통상.png
「1882년 9월 2일 조선관리와 조약 체결」을 제목으로 영국 화보신문에 보도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면

 

조미 통상조약이 이후 1883~1884년에 보빙사 사절단이 미국을 순방하고 돌아온 이후 조선의 미래를 좌우는 중요한 일들이 결정되었고 진행되어 갔다. 전통적인 왕조 국가의 제도를 근대 민족 국가 체제로 바꾸기 위한 급진 개화파가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갑신정변이었다. 보빙사 사절단이 귀국한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 조선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급진 개화파가 온건 개화파를 상대로 정변을 일으켰는데 이를 갑신정변이라 한다. 조선의 온건 개화파는 청나라의 양무(洋務)운동을 모델 삼아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근대화로 나아 가야 한다는 온건 개화파와 일본 메이지 유신의 방식으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급진 개화파로 나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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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방문한 보빙사사절단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 개혁파는 내각제 국정 운영과 인민 평등권 제정, 문벌 타파를 목표로 하였다. 결국 김옥균, 박영효 등 20~30대 젊은 급진 개화파가 근대 자주 국가 수립을 목표로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청나라의 신속한 개입과 일본군의 철수로 개혁 구상은 ‘삼일 천하’로 끝났다. 이때 온건 개화파인 민영익은 큰 부상으로 알렌 의사 선교사가 이를 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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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고종, 우측 위 미국 보빙사절단, 아래 민영익(온건 개화파), 김옥균(급진 개화파)

 

갑신정변(甲申政變)은 김옥균(金玉均, 33세), 박영교(朴泳敎, 35세)와 박영효(朴泳孝, 23세) 형제, 서광범(徐光範, 25세), 홍영식(洪英植, 29세), 서재필(徐載弼, 20세) 등 급진 개화파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대부분 서울 지역의 양반 가문 출신으로 1870년대 말 세력을 형성해 스스로 개화당(開化黨)이라고 부르며 세력을 키워왔다.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실패한 후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조선 조정은 선교사들에게 여행허가서인 ‘호조’(護照)를 발행하여 자유로운 선교활동이 가능해졌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한 1884년과 1885년은 선교를 금지하는 마지막 어두움의 밤이었다. 

 

100년 동안 선교의 박해를 받아 왔으며 1만여 명에 육박한 참형과 순교를 당한 가톨릭교회는 정부의 박해정책 완화는 새로운 질서를 요구했다. 가톨릭교회와 1884-5년에 입국한 기독교회의 공격적인 선교활동과 일부 지혜롭지 못한 행동으로 교인과 민간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치외법권적 지위를 가진 선교사들의 월권행위에 대한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유교적 전통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에서 신교자유정책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혼돈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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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護照)는 외국인들에게 국내여행을 허가하는 증명서로 행장(行狀)이라고도 한다. 이 호조는 선교사 마펫(S.A.Moffett, 馬布三悅)에게 1893년 12월 9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발급한 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의 지역에 대한 여행 허가서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조를 발급하는 것은 미국인 선교사 마펫이 전에도 각 도 지방을 여행하였으므로 호조를 발급함이 마땅하니, 연도(沿道)의 각관(各官)들은 호조를 살펴 여행을 막지 않도록 하라. 본인 역시 쓸데없이 머물다가 조사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

 

 가톨릭교회 신부와 기독교 선교사가 여행허가증을 받은 상태에서 선교 활동을 자유롭게 하는 가운데 지방민들과 유교 사상이 굳어진 양반 가문들로부터 배척당하거나 폭행과 추방이 발생한 사건으로 인한 종교적 분쟁이 일어났다. 특히 가톨릭교회의 신부들과 기독교회(개신교) 선교사들의 갈등도 있었다. 신부들과 함께 교회와 관련된 일을 했던 지식층 인사들이 선교사들에게 갈아탔으며, 이들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어학 조사로 활동했으며, 여러 서적출판에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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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교회 순교 기념, 절두산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하는 해는 한국 가톨릭교회는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100년 동안 박해와 순교 속에서 갖게 된 한국 선교의 경험들은 선교사들에게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다. 박해와 순교로 지켜온 100년 역사가 종결되고 이제 조선에서 선교의 자유가 보장된 역사적인 상황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했다. 

 

선교사들이 병원과 교육기관 설립은 이 땅에서 복음이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료사업인 병원 설립과 교육기관을 통한 복음 전도는 이 땅에서 찬란한 복음을 꽃피우게 했다. 이 땅에서 32년간 한결같이 선교사역을 완주한 언더우드는 마치 이방인에게 사도 바울을 보내주셨던 것과 같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바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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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네비우스, 로스 선교사

 

그는 1886년부터 네비우스와 로스로부터 자급, 자전, 자치의 3자 원칙을 배우고 익혔다. 그는 이를 한국에 적용했다. 모든 신자는 자신의 일터에서 자원하는 평신도 전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모든 신자는 빚진 자라는 바울의 원리에 충실한 결과였다. 한국교회는 바울과 언더우드의 모범을 따라 ‘날 연보’를 드리며 ‘빚’을 갚아 나갔다. 그것이 한국 초대 교회가 근대 선교사상 가장 빨리 성장한 첫째 이유였다. 이러한 선교의 방법과 열정은 한국교회가 시험하고 증명한 ‘자급의 원리’였다. 

 

1898년 뉴욕에 있는 형의 언더우드 잉크와 타자기 회사가 세계 제일의 회사로 발돋움할 때, 형이 미국으로 와서 사업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내한한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 의사 등을 데리고 함경도 탐사 여행을 하던 어느 날 한 시골 들판에서 그 편지를 보여준 뒤 그리어슨 의사가 보는 앞에서 편지를 찢어버리면서 “뉴욕에서 백만장자로 사는 것보다 한국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사로 사는 것이 더 멋진 삶이 아닌가!”라고 본인의 의지와 결단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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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언더우드 선교사가 최초로 세례를 준 노춘경, 우측, 1889년 한국에서 결혼한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는 신혼여행을 겸한 서북지방 일대의 답사에 나섰다. 사진은 선교여행을 떠나는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왼쪽 세번째와 다섯번째)와 짐꾼들.

 

일본 초기 선교에서 첫 개종자의 세례까지 10년이 걸렸고, 6명의 교인으로 첫 교회를 조직할 때까지 12년이 걸렸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내한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1886년 7월 18일 노춘경에게 첫 세례를 베푼 후 언더우드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가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국을 가로막았던 법적인 장애물을 깨트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셔서 우리를 수용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경청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첫 열매들을 바라보고 있다.”라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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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목사 기념 제막식(1927. 9. 21.) “출처 : 사진으로 본 새문안교회 100년”

 

언더우드는 “가라!”고 명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마 28:19-20)과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확신했다. 따라서 그의 표어는 “전진! 앞으로!”였다. 그는 본국 교회에 추가 선교사를 끊임없이 요청하면서 “우리가 중단해야 합니까, 아니면 전진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했다. 내한한 첫 개신교 목회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 7. 1. ~ 1916. 10. 1.) 목사는 1859년에 태어나, 25세에 한국에 파송되어, 1916년 10월 12일 미국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32년간 봉사한 후 57세에 생을 마감했다. 개척 선교지의 열악한 환경에서 40대에 백발이 되었으나, 늘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을 가진 청년으로 살았다. 한국 장로교회는 많은 빚을 졌다.

 

소재열 박사(한국교회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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