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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5]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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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5]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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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전서 1:26-31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지난 시간에 1:18-25절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무능과 패배의 상징으로 보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최고의 힘보다 강합니다. 인간의 최상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서 고린도 지역의 그 어떠한 철학적 지혜보다 우월함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그 어떤 지혜의 힘이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임을 말씀합니다.


바울은 1:18-25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의 지혜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미련함과 무능의 상징인 그리스도의 십자를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본문 말씀을 통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이 편지를 읽을 때 그들의 시선을 한 곳으로 주목하게 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바라보면서 “나와 우리를 구원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실제적인 상황을 예로 들면서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 없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26)


본문 26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합니다.  

 

26절은 명령형의 문장이 아니라 직설법입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도록 부르셨음을 살펴보면 내가 여기서 말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일부 부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가이오, 그리스보, 에라스도(롬 16:23) 등 소수의 부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고전 11:17-34). 그러나 대부분 교인들은 노예나 노예였던 자들, 수공업자들이나 소상공인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 즉 본문에서 언급한 대로 ‘육체를 따라’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혜있는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부를 가졌거나 관직을 가져 힘있는 자들도 아니었습니다. 무슨 가문을 자랑할만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미련한 자들”, “무지한 자들”입니다. 천민 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 구성원들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육체를 따라”, 즉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많은 학식에 의한 지혜로운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힘있는 권력을 가졌거나 그렇다고 가문이 좋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하시고 부르셨습니다. 부자들이나 학자들이 아니라 무식하고 연약한 천한 자들을 부르셔서 은혜로 구원을 얻도록 하여 교회 일원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들을 거룩한 성도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노예나 천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거룩한 자녀로 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구성원들, 성도들의 현 상태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세상적인 지혜나 힘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나의 세상적인 지위나 학식,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고린도 지역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출생신분, 즉 유대인으로 출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인간적인 조건을 내걸어 그것이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착각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 선민이라는 우월의식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또 다른 형태의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역설적인 선택(27-29)


첫째, 미련하고 약한 자들을 택하신 이유를 설명합니다(27).


본문 27절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여줍니다. 그 부르심은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 둘째는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런 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첫째, 세상의 “지혜있는 자들”과 “강한 것들(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적인 것들, 본문에서 말씀한 지혜나 힘있는 어떤 능력이 인간을 구원하는 데 아무런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세상적인 가치인 지혜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그것들을 자랑합니다. 이런 형태의 생각은 서로의 파당을 만들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등으로 파당을 지었습니다. 상대를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분쟁이 찾아온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되어야 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식과 성령의 은사로 받은 언변 즉, 말 잘하는 은사 등을 세상적인 관점으로 평가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을 자랑합니다. 이런 식으로 고린도 교회에 분쟁과 분파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잘못된 신앙을 바르게 잡아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말씀합니다. “지혜있는 자들”, “힘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지혜가 없고 힘이 없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셨다고 강조합니다. 이렇게 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자기 정체성을 확립케 하고 있습니다. 삶의 가치관을 복음에서 찾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어떤 지혜나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우리를 부셨음음을 의미합니다. 남들과 비교하여 남다른 특별한 어떤 조건 때문에 우리를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마치 그러한 세상적인 지혜나 힘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착각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서로 파당을 지어 싸우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으로 서로 하나될 것을 말씀합니다. 파당을 짓는 것이 복음 안에서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둘째, 천하게 출생하고 멸시받은 자들을 택하신 이유를 설명합니다(28).


본문 28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세상의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셨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을 택하신 목적은 “있는 것들”을 패하려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힘 있다고 자랑하며, 잘난 체하는 자들을 낮추시고 무력하게 하시기 위해 역설적으로 세상의 비천한 자들, 업신여김을 받은 자들을 택하셔서 은혜로 구원하셨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택하셔서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의 지혜, 능력, 문벌 등을 “폐하려”하십니까? 그것은 이것들이 마치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처럼 환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환상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 저변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결국 하나님을 오해하게 합니다. 잘못된 신앙을 갖게 합니다. 교만하게 합니다. 자기 자랑에 빠지게 합니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서로 비교하고 이런 것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싸웁니다. 서로 파당을 짓습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29).


본문 29절에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28절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육체라도”, 즉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믿음의 대상이 될 때 서로 파멸에 빠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랑은 언제 나옵니까?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무엇인가 더 낫다라고 할 때입니다. 그래서 자랑거리가 됩니다. 내가 너보다 모든 면에서 더 낫다고 할 때에 우월의식이 생깁니다. 자랑거리가 있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이런 자랑거리가 대단했습니다. 고린도 지역의 주류인 헬라철학과 지혜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차등적가치관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이는 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복음은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께 구원을 받습니다.


차별없이 누구든지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차별없이 믿는 자에게 주어진 구원을 말하자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할말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들은 이러한 복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세상적인 지혜와 힘을 최상급으로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허물고 있습니다. 오직 겸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잘났다고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못났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면 됩니다. 여기에 진정한 삶의 능력이 있습니다.


자기가 드러날 때, 세상적인 지혜와 우월적인 힘을 자랑하는 자들은 겸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지혜와 힘은 복음을 위한 사용되지 아니하면 그것이 오히려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최상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들의 본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3. 고린도 교회의 유일한 자랑, 오직 예수(30-31)


첫째,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30).


본문 30절에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합니다. 사도는 이제 본문의 결론적인 말씀으로 본문 30-31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각종 파벌과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세상적인 지혜, 힘, 자기 자랑은 결국 그리스도인이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모든 분쟁을 피하고 하나되기 위해서는 오직 복음밖에 없습니다. 그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은혜입니다. 이 구속은 나를 대신하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였습니다. 그 십자가 보혈의 피는 우리의 범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받으시고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본문 30절에서 말씀한 복음의 증거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깨닫지 못할 때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가문이나 학벌을 중시합니다. 오로지 자기 자랑을 하지 아니하면 살맛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분쟁을 일으킵니다. 끼리끼리 파당을 지어 하나됨을 파괴 시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것들은 무익하다고 합니다. 오직 은혜의 복음이 우리의 존재를 더욱 빛나게 할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느냐에 따라 감사로 충만할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자신이 받은 은사로 이웃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둘째,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31).


본문 31절에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나의 가문과 학벌, 그리고 세상적인 지혜로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의 복음으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칭찬하고 자랑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통해 내 죄가 사해졌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우리의 지혜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 죄값을 지불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한 것같이 자랑하는 사람은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합니다. 여기 기록된 말씀은 예레미야 9: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렘 9:23)


우리는 구원과 모든 은사를 선물로 주신 ‘주’만 자랑하여야 합니다. 


교훈과 적용


말씀을 증거하다 보면 때로는 역설적으로 설명해야 할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유대인들에게 마태복음 5장에서 “마음으로 욕만 해도 이는 살인죄로 지옥 불에 들어간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악합니다. 그렇다면 모두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 없습니다. 아것을 강조하기 위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5장은 예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부자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습니까’라고 물을 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 19:23-25)


이 이야기는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혹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로 읽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부자가 천국 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천국 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부자는 천국에 가지 힘들다고 말씀한 것은 결국 자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은 세상에서 미련한 자를 택하여 지혜 있는 자를, 세상에 약한 자를 택하여 세상에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셨다고 합니다. 세상에 천한 자들, 멸시받은 자들, 없는 자들을 택하사 있는 자들을 폐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천한 자들, 멸시받은 자들, 없는 자들이 구원받은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이런 자들만을 구원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천한 자, 멸시받은 자든 아니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구원을 받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현 상황을 예로 들면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땅에는 다양한 교회 구성원들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면서 가문, 학벌, 권세 등을 자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런 사람이 교회의 하나 됨을 훼손합니다. 이는 아직 은혜의 복음에 대한 본질을 외면한 결과입니다. 바른 복음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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