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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강론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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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고전 강론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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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전 1:18-26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1:10-17절 말씀을 통해 “고린도 교회 분파들”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나는 바울을 따른다.”, “나는 아볼로를 따른다.”, “나는 베드로를 따른다.”, 심지어 “나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라고 말하면서 서로 파당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파당으로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경우 서로 분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하나같이 복음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분쟁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신앙의 공동체에서 제명과 출교를 당할지라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나와 다른 성도들도 같은 주님의 지체입니다. 지체는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싸매어 줍니다. 분파로 분쟁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여러 갈래로 찢은 행위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와 세례를 통한 연합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우리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인 고린도전서 1:18-25절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의 지혜나 능력(힘)으로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미련함과 무능함의 상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18)


본문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이미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고린도 교회에 보내주신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는 본문 18절 말씀을 통하여 십자가만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지혜”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십자가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그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두 가지 형태로 적용되어 나타납니다. 첫째는 멸망할 사람들이요, 둘째는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멸망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말씀이 “어리석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전해질 때 갈라지는 심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만 멸망할 자들에게는 멸망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이 전해지면 이 두 부류가 그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사울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쓰임 받은 사울은 선하게 등장하면 안 됩니다. 악하게 등장해야 합니다. 사울이 악하게 등장해야만 이스라엘에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사울 왕은 소위 버림으로 쓰임을 받은 전형적인 경우입니다. 


블레셋과 전쟁에서 패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합니다(삼상 8:5).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장로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인간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을 통해 이를 확인해 주었습니다(삼상 8:7).


삼상 8:7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 사울을 왕으로 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삼상 16:1). 결국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삼상 31:4).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은 자들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것처럼 이들은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미련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다 드러납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아닌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심판의 도구가 아니라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바로 이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다윗이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 사명은 전도였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반대한 자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도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계시가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이야기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하면서 이를 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 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도 온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의 원천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격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유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복음입니다. 고린도 지역의 지혜, 철학적 사고와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고린도 지역의 세상 지혜, 사람의 말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 해야 합니다. 이런 복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생각과 사고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달라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가 나를 힘있게 세상을 살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알고 성육신 교리를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단순히 안다는 것으로 모든 신앙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나는 너보다 이러한 지식을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의 능력,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의 은혜를 우리의 삶 가운데 능력으로 보여주는 존재여야 합니다.


2.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를 구원(19-21)


첫째, 세상을 향한 심판입니다(19).


본문 19절에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사도는 18절에서 언급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에 대해 설명을 해 가고 있습니다. 그 설명은 구약 이사야서를 인용하므로 시작합니다. “기록된바”, 즉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지혜로운 사람들의 지혜를 멸하고, 지식 있는 사람들의 지식을 물리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29:14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 13절부터 읽어보면 14절 말씀이 이해될 것입니다. 13절 말씀에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습니다. 속과 겉이 다릅니다.


14절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 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 중에 기인한 일을 다시 행한다고 합니다. 그 기인한 것은 곧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라고 합니다.


가장 무서운 심판 중의 하나는 물리적인 심판도 있지만, 영적인 심판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는 어두움으로 인해 혼란이 찾아옵니다. 분쟁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구체적인 놀라운 일이란 지혜로운 사람들은 지혜를 잃게 될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총명함도 잃을 것입니다. 진정한 지도자가 없어져 버립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세상 지혜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지혜는 무너집니다. 그 지혜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 지혜로 인한 총명함 역시 사라질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의 현장은 혼란과 어두움이 가득할 것입니다. 진정한 희망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세상의 미련한 지혜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말할 때 우리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미련한 세상 지혜의 영향을 받아 거기에 굴복합니다. 거기에 희망을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에게 임했다고 고백하면서 좋아합니다. 이는 고린도 지역에 철학적인 지혜에 근거한 또 다른 형태의 말장난으로 경계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의 차이입니다(20-21).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를 비교한 것처럼 무모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런 비교를 통해서 고린도 지역의 세상 지혜를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자들을 경계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문 20절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지혜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학자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어서 이 시대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 유대와 헬라인의 지혜있는 자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질문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셨다고 합니다. 미련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를 무시한 미련한 자들은 멸망의 사람들입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싶어 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고린도 지역에서 전했던 그 복음에 관심을 가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1절에서부터 자신은 사도라고 강조합니다. 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고린도 지역에서 전했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고린도 지역의 철학과 수사학에서 언급된 세상의 지혜와 사람의 말과 비교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어서 본문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합니다. 세상이 자기의 지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는 전형적인 사도의 가르침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계시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도, 즉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어리석어 보이는 말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언제나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제아무리 자신이 잘못했을지라도 대단하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세상에 온갖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칭찬합니다. 설교자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이용합니다. 설교가 온갖 세상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세상적인 이야기를 정당화 시켜주기 위해 성경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구분해 주는 척도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합니다. 또한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복음이 증거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아닌 세상적인 지혜와 지식으로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22-25)


첫째,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22-23).


본문 22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합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찾습니다. 예수님께 유대들이 표적을 구하나 이를 거절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막 8:11-13)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과 지혜를 찾는 헬라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들의 표적과 지혜에 의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참된 구원과 지혜를 찾아야 하는데 그들은 이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23절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둘째, 하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24).


본문 24절에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합니다. 유대인이 되었든지 그리스인이 되었든지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말씀한 내용을 설명하면서 24절에 와서 결론과 같은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 것 없이 누구를 막론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성령을 통해 나타납니다.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회개하게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합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독생자는 하나뿐이라는 의미보다 독특한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적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의 독특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게 됩니다.


유대인들만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의 자긍심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야 하고 율법을 소유한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긍심이 대단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개, 돼지 취급합니다. 이방인은 절대 구원이 없다고 합니다. 유대 랍비들은 이방인의 존재 자체를 지옥의 땔감을 위해서 준비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방인 중에는 유대인이 그렇게 이방인을 절망적으로 말한다고 할지라도 일부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공경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이 등장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이 임한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이야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사도 바울을 집으로 초청하여 이러한 복음을 더 듣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의 복음 전도 핵심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인들의 철학적 지혜가 아닌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계시가 곧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셋째,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25).


본문 25절에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 바울의 이러한 논리 전개에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영원하시며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대신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피조물의 지혜를 비교할 수 있습니까? 비교 불가입니다.


그럼에도 바울 사도는 교린도 교회 성도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강하다”라고 합니다. 인간과 그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세상적 지혜로 볼 때 미련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는 인간의 최상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판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패망의 상징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는 인간의 최고의 힘보다 더 강합니다. 이로써 바울은 하나님 무한한 능력과 지혜의 우월성을 표현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지혜와 힘이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임을 말씀합니다.


교훈과 적용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세상의 지혜의 일종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오해하다 보니 서로 자신들의 지혜를 자랑합니다. 그 자랑이 지나쳐 분쟁으로 이어집니다. 교회 분쟁은 아직도 복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세상적인 지혜와 그 힘 등에 대한 세상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는 이런 이유로 세상의 지혜와 십자가를 극단적으로 대립시켜 양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과 지혜로 자신의 행복과 생명을 도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혜로는 자신의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더욱 인간은 소외되고 불안한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희망과 구원, 그리고 생명은 우리가 만든 지혜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초월자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러나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초월적인 신은 존재하지만, 인간과 함께하는 신은 말하지 못합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신을 찾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구원이란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우리 함께 해야 구원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통해 구원이 가능하도록 하셨습니다.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이 임했습니다. 기쁜 소식인 복음은 십자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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