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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6장 강론4] 바울의 동역자들의 인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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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칼럼

[로마서 16장 강론4] 바울의 동역자들의 인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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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6:21-23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롬 16:24) (없음)



지난 시간에 로마서 16:17-20절 말씀을 통하여 사도의 경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사도는 긴 문안 인사를 끝낸 후 이방 교회에 침투해 들어온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주의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당장 로마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다는 사실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장차 얼마든지 침투해 들어올 것이다. 미리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왜 이들을 배격해야 하는지를 로마서 서신 말미에 적고 있다.

 

사도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은 진리와 거짓 진리를 분별하지 못한 순진한 신자들을 유혹할 것이다. 그들은 부드러운 감언이설로 마치 거짓 진리를 참 진리인 것처럼 포장한다. 그러한 거짓 진리에 대한 경고와 이들을 주의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번에는 본문인 로마서 16:21-23절 말씀을 통하여 ‘바울의 동역자들의 인사말’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려 한다. 동역자란 참 좋은 단어이다. 실제적으로 동역자는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 서로 뜻이 같지 않고서는 동역자가 될 수 없다. 복음으로 하나될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동역자가 된다.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동역자들은 누구였는가를 살펴보자.


나의 동역자

 

1. 바울은 동역자들의 문안 인사를 전한다(21).  

 

본문 21절에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첫째, 나의 동역자 디모데의 문안을 전하고 있다.

 

본문은 바울과 함께한 동역자들과 지역교회 신자들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바울과 함께 로마 교회에 문안 인사를 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남자이다. 로마서는 바울이 대필자인 더디오에 의해 기록되었다. 본문 21절에는 “나의 동역자”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대필자인 더디오가 임의로 기록에 첨가한 것은 아닌 듯하다. 

 

시도는 본문에서 디모데를 ‘나의 동역자’라고 한다.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였다. 디모데후서 1:5절에 보면 그는 루스드라 출신의 유대인이다.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어머니 유니게는 유대 기독교인이었습. 디모데는 바울의 2치 선교여행 초에 남갈라디아에 있는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합류했다(행 16:2-3). 또한 바울의 제3차 선교여행에도 동참했다.

 

로마서는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저술했다. 디모데는 바울의 서신에서 자주 등장한 사람이다. 그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은 바울의 서신중에 여섯 서신에서 동동 저자로 이름을 등재하고 있다. 사실 로마서 서두 인사말에서도 디모데를 서신의 공동 저자로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정확히 추론할 수는 없지만 이방교회인 로마 교회에 유대 기독교인인 디모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의 문안을 전하고 있다.

 

사도는 이어서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도 문안한다는 인사를 전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누기오(루기오)는 수리아 안디옥교회 선지자인 ‘구레네 사람 루기오(행 13:1)’라고도 한다. 또한 복음서 저자인 누가와 동일 인물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다.


셋째, 야손과 소시바더의 문안을 전하고 있다.

 

여기 야손은 사도행전 17:5-9절 말씀에서 사도가 데살로니가에 잠시 머물 동안 바울을 자기 집에 모셔 들여 환대한 일로 폭도들의 공격을 당했던 그 야손일 가능성이 크다. 

 

소시바더는 사도행전 20:4절에 “(행 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라고 했다.


넷째, 나는 동역자인가, 방해자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자들과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언약의 백성들과 언약 밖의 백성들과의 갈등과 투쟁을 기록하고 있다. 언약 밖의 백성들로부터 끊임없는 도전 속에서도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통해 어떻게 주도적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지을 보여준 역사이다. 우리는 이 역사를 구속의 역사라고 한다. 

 

출애굽기서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모세와 태양신의 대리자로서 바로와의 갈등과 싸움은 치열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가 태양의 사람인 바로를 어떻게 극복하고 승리하는지를 보여줌으로 하나님 구원의 능력과 위대함을 보여준다. 하나님 여호와를 알지 못한 바로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여호와’를 보여주기 위해 10가지 재앙을 보여준다. 그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 여호와가 어떠한 분이심을 보여준다. 구약 성경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어떠한 분이심을 보여준 동시에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주권적인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시는지를 보여준다.

 

구약의 역사서나 선지서, 예언서들을 통해 볼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반대하고 거슬리는 대적들을 어떻게 심판하시는지를 보여준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그 능력을 보여준다. 반대자들, 대항자들이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므로 하나님의 주도권을 행사하셨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위하여 같은 마음과 생각을 갖고 서로 위로하고 협력하며 사역에 임한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 속에서도 반대자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선교활동, 전도 활동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동역자로 붙여 주셨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증거한다. 교회를 섬긴다. 

 

우리는 복음의 동역자들인가, 아니면 훼방꾼들인가, 비방하고 방해하는 자들인가? 하나님께서 비방하게 하여 버림으로 악하게 사용된 자들은 아닌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늘 회개해야 한다. 나는 교회와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방해꾼이면서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기를 동역자라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를 살펴보자. 


대필자

 

2. 이 편지를 기록한 더디오의 문안을 전하다(22).

 

본문 22절에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라고 한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로마 교회에 보낸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으로 분류한다.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을 전제한다. 반대로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을 전제한다. 구약과 신약을 결정짓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다. 이를 옛 언약이라 한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우리와 함께한다. 그 언약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약속한다. 그래서 구약은 옛 언약이라고도 한다.

 

신약은 구약이 예언하고 약속한 대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새 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셨다. 약속의 성취자로 오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이라는 의미에서 신약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이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약을 인정하지 않는다. 역시 구약 성경이라는 말도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이라 하지 않고 히브리어 성경이라 한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성경은 우리 기독교가 사용한 구약 성경과 같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말한다. 똑같은 창세기에서부터 말라기서까지를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지만 유대인들과 우리 기독교는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우리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를 말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하나님 여호와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 성경을 이해할 때 유대인들처럼 이해하면 안 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거짓 교사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통해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방법은 할례를 행해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 성경으로 성경을 이해한 우리는 구약 성경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로마서는 신약 성경에 속해 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로마서에서부터 빌레몬서에 이르기까지 13권은 사도 바울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로마서 역시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라는 사신을 통해 전달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즉 신약 성경이다.

 

본문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로마서를 써서 보낼 때 이 서신의 대필자인 더디오를 언급한다. 사도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 서신의 대필자인 더디오도 주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한다. 바울이 구술한 내용을 받아서 적게 했다. 이런 형식의 편지는 당시 고대 사회에서 얼마든지 있었던 일이다.

 

당시 구술자는 대필자에게 어느 정도 권한을 위임했다. 더디오는 바울이 불어준 내용을 단어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단순히 받아 적는 대필자였는지, 아니면 편지의 문체나 문맥을 어느 정도 책임을 지고 스스로 작성했는지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로마서의 바울의 문체나 어휘 내용 등이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전서 등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서는 대필자의 참여로 완성되었지만, 이는 순순히 사도 바울의 서신이다.

 

대필자인 더디오는 대필자로서 사도 바울의 구술 내용을 작성하면 본문에서 “나 더디오도 주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한다”라고 전하고 있다.

 

교회 돌봄

 

3.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의 문안 인사(23)

 

본문 23절에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라고 말씀한다.

 

가이오는 신약에서 세 명 정도 다른 이름들이 등장한다. 더베 사람 가이오(행 20:4, 19:29). 바울이 세례를 베푼 고린도 출신 가이오(고전 1:14), 소아시아의 교회 지도자였던 가이오(요삼1)가 있다. 보편적으로 본문의 가이오는 바울이 세례를 베푼 고린도 출신 가이오로 본다. 가이오는 바울의 전도와 세례로 그리스도인이 된 자로서 고린도 교회의 지도급 인물로 본다. 

 

또한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는 바울의 제삼차 선교여행 중에 바울을 돕는 사람으로 언급되던 에라스도와 동일 인물로 본다(행 19:21-22, 딤후 4:20). 재무관이란 보통 고린도의 지방정부에서 재정을 담당한 관리를 뜻한다. 고린도는 로마의 식민지였으므로 에라스도는 어느 정도의 부와 사회적 신분을 지닌 로마 시민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구아도’는 노예이거나 노회 축신 지유민들 중에서 더디오 만큼 흔한 이름이다. 그는 ‘형제’로 묘사되지만 형육의 형제가 아니라 동료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본다. 구아도는 신약 그 어느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이름이다. 구아도가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진 인물이었기에 마지막 부분에 그의 아름이 등장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의 문안인사를 대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인물들은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름을 거명하며 문안 인사를 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교훈과 적용

 

바울은 지금까지 긴 로마에 보낸 편지를 썼다. 더디오가 바울이 요구한 대로 썼다. 쓰고 나서 더디오가 읽어 주었거나 바울이 직접 읽었을 것이다. 이제 내용을 작성한 후 마지막으로 동료들의 문안 인사를 썼다.

 

사도 바울은 혼자 사역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동역자가 있었다.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복음을 전했다. 그 동역자들 역시 로마 그리스도인들과 한 형제이다. 한 식구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혼자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명을 감당한다. 서로 돕고 격려하면서 사명을 감당할 때 더욱 힘을 얻는다. 더욱 적극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주도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돕는 사역으로 사명에 참여할 수 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할 때에도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라고 했다(고전 1:10).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더불어 함께 일하는 법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분쟁하고 다투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뜻”으로 하나가 될 때에 갈등과 분쟁이 사라진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마음으로 서로 문안하고 격려하며 사명을 강당해야 한다.

(위 내용은 지적 소유권에 의해 보호되는 글입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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