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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전래 전 최초의 소래교회와 언더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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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전래 전 최초의 소래교회와 언더우드

소래교회 1895.jpg

 

한국에 최초로 복음의 전래는 1884. 9. 20. 알렌선교사의 입국을 그 시점으로 잡는다. 개신교 복음이 최초로 전해지기 전인 1883516일에 황해도 장연군에 소래교회가 세워졌다. 평안도 의주 출신의 서상륜은 인삼장사로 만주를 오고 갔는데, 영국 개신교 선교사 존 로스 목사를 만나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경번역을 도왔다.

 

그의 동생 서경조와 서상륜은 황해도 장연구 대구면 송천리의 소래마을의 한 초가집에서 1883516일 한국에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전래되기 이전에 한국인이 스스로 개신교 교회가 바로 소래교회이다. 소래교회를 솔내교회(松泉敎會)로 부르기도 했다.

 

언더우드(Underwood, H. G.) 선교사는 1894년 캐나다 감리교 매켄지(W. J. Mckenzie) 선교사가 자신은 오로지 언어를 배우고 사람들을 알며, 또 거기서 가능한 모든 면에서 조선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는 것이 좋겠다고 결심하자 소래로 가라고 추천하자 매켘지 선교사는 소래에서 선교사역을 했다. 소래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교인들이 있었다.

 

1895년 동학도들이 몰려와 교회가 위험하기도 하였지만, 캐나다의 선교사 매켄지(Mckenzie, W. J.)와 한국교인들의 복음증거로 1만여 동학도와 우호적 관계가 맺어져 이 지방의 난을 모면하게 할 수 있었다.

 

그후 18958칸의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18968칸을 증축하였다. 이후 소래교회는 신임 서양선교사의 한국어 교육장소로, 동학농민혁명 기간에는 동학군의 피신처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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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소래교회

 

소래지역의 기독교 신자들이 소래에 방문한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교회를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결국 신자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소래 마을 근처에서는 높은 지대가 있었는데 그곳에 숲이 있고 숲 가운데는 마을 신위가 숭배되는 사당이 수년 동안 있었고, 이곳은 오래동안 돌보지 않아서 못 쓰게 되었으므로 여기에 새로운 교회를 직기로 결정했다. 이교도인 건축업자도 절반 값으로 건물의 설립을 감독하기로 약속했다.

 

이 예배당은 그곳에서 가장 훌륭한 건물이었다. 가없은 사람들은 그 교회에 열렬한 기도와 함께 그들이 가장 좋은 목재와 돌, 기와 그들 자신의 손이 주는 충실한 노동을 쏟아 넣었다. 교회가 완성되었을 때 딸린 빚은 전혀 없었으며, 인간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않는 하나님은 온순하게 그의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으로 왔던 단순하고 진실하며 열정적인 사람들을 충만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축복하고 영광을 주었다(언더우드 아내 릴리아스 H. 언더우드’, 상투의 나라중에서)

 

소래교회는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교회로서 서상륜(徐相崙)이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고향에 세운 것이다. 건립과 운영을 자급자족하였고, 건축양식도 기와집의 전통적 가옥이었다.


서 장로 가족.jpg

소래교회 서경조 장로 가족

 

1895년 초여름에 매켄지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새로 건축한 교회의 헌당식을 거행하고 세례 지원자를 받아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해 7월에 결국 매켄지 선교사는 머리의 통증으로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매켄지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자살했다는 설도 있음,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연세대학교 출판사, 1993), 155).

 

언더우드 선교사는 매켄지 선교사의 죽음을 통보받고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인 웰스(James H. Wells)와 함께 소래를 방문하여 그이 죽음을 확인하고 조선 신자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방문하였다. 그리고 헌당식도 하였다. 헌당식 때에는 문가와 창가에 들러서는 군중들로 거의 질식할 정도로 꽉 찼다. 언더우드는 그날 명 명에게 세례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예비신자들을 받아들였으며, 매켄지 선교사(아래 사진)의 추도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소래교회 맥켄지 선교사.png

1896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소래에 방문했을 때 동학군의 지휘관급 2명이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교회는 처음으로 한국인들 손에 의하여 세워지고, 최초의 장로 장립, 동학과의 해후 등이 이루어진 역사적 교회로서, 김명선(金鳴善노천명(盧天命김필례(金弼禮양주동(梁柱東) 등이 이 곳 출신이다.

 

소래교회는 최초로 조선 사람들이 지었고 그들이 운영비를 지불했으며, 사실상 조선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장로교회였다. 서울에서는 언더우드 선교사 자택에서 시작된 교회(현재 새문안교회) 역시 선교자로서 소래교회의 선례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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