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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기념, 어제와 오늘(1) 마포삼열 선교사 입국

기사입력 2021.12.02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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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더우드와 형제자매.png
    마포삼열 형제와 자매(1889), 앞쪽 두번째가 마포삼열

     

    오늘날 총신대학교(합동)와 장로회신학대학교(통합)는 같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뿌리로 하고 있다. 이 신학교는 1901년에 선교사 공의회의 결정으로 마포삼열 선교사 자택에서 시작하였다. 따라서 총신대학교 120주년 기념은 1901년으로 시작한다. 이런 이유로 총신대학교의 역사적인 과거의 발자취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선교사 공의회와 마포삼열 선교사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46년간 한국에서 사역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32년이다. 총신대학교의 120주년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새뮤얼 오스틴 모펫(Samuel Austin Moffett, 1864. 1. 25.~1939. 10. 24.), 그는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이면서 교육자다한국 이름은 마포삼열(馬布三悅)이다인디애나주(매디슨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1884년 하노빌대학을 졸업하고, 1889년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하였다하노버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대학원에서는 화학을 전공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1889415일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1890125일에 인천 제물포를 거쳐서 서울 마포강변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한국에서 46년간 선교사 사역을 하였다. 언더우드는 32년간 사역했으므로 언더우드 선교사보다 14년 더 사역하였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일본 요코하마에 교사 도티 양과 함께 도착하여 그곳에서 2주 동안 체류하였다. 도티 양은 나중에 밀러와 결혼을 했다. 2주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에서 일부 선교 사역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그때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와 만났다. 그곳에서 한국 선교 사역의 과거와 현재 상황, 그리고 미래의 전망에 관해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1864년생이었고 언더우드 선교사는 1859년생으로 마포삼열 선교사보다 5살 위였다. 그는 일본에서 체류하는 동안 여러 신학교와 학교를 방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서 한국어를 접하여 공부하기 시작했다.

      

    마포삼열 목사는 26세 생일이 되던 1890125일에 인천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입국하였다. 한국에 입국한 3일 후인 128일에 미국 북 장로회 해외 선교부 총무인 엘린우드 박사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한국의 첫인상은 한국인에게 복음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라고 했다.

     

    마포삼열 선교사가 입국하여 선교상황을 지켜보면서 헤론 의사의 과중한 업무를 보았다. 헤론 선교사 부인은 매주 일요일 저녁에 그녀의 집에서 20~30명의 여자가 모이는 성경공부반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는 조용하게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친구이며 8년간 대학과 신학교를 함께 다닌 베어드 목사가 한국에 파송해 주기를 간청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이 나라의 미래에 위대한 가능성이 있다라고 믿었다. 그리고 한국인은 지적이고 매력적이며, 관리의 수탈에서 벗어나고 노동이 천하다는 생각을 버리면 강한 민족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크기변환]헤론과 부인.png
    헤론 선교사와 부인인 헤리어트 깁슨(1860-1908), 깁슨은 남편인 헤론이 세상을 떠나자 1892년 게일과 재혼하여 ‘게일부인’이 됐다.

     

    의사인 헤론 선교사의 위독을 미국 선교 본부에 가장 먼저 알린 선교사는 마표삼열 선교사였다. 189078일 경부터 헤론(1856.6.15.-1890.7.26.) 의사가 이질에 걸려 위독하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 이질이 간염으로 발전되었다. 마포삼열 선교사에 의하면 그는 과로로 기력이 너무 쇠약해졌기에 병의 공격을 견딜 수 없는 상태였다. 이미 입국해 있던 미국 북감리회의 두 의사가 지속적으로 돌보아 주었다. 기도하고 있지만 불확실하다는 소식을 전했다.

     

    결국 헤론 의사는 1890726일 토요일 아침 8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주일 오후에 그의 집에서 장례예배를 드렸다. 묘지는 한국 정부가 별도로 지정한 외국인 묘지에 안장했다. 한국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선교사의 무덤이 되었다. 이 묘지가 양화진 선교사의 묘지이다.

     

    알렌 의사 선교사는 정부의 임명을 수용했다. 이제 선교부 내에는 의사 선교사가 없었다. 헤론은 언더우드보다 3살 위였고, 마포삼열보다 8살 위였다. 헤론 선교사 부인은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고인이 된 헤론 사진을 보냈다. 그 사진이 오늘날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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