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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소천시 추도사에 언급된 김포

기사입력 2020.07.31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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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4월 2일 부산을 경유하여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조선에 첫 목사 선교사였다. 직전해 인 1884년 9월 20일에 일렌 선교사가 입국했지만 목사가 아니라 의사로서 의료선교사였다. 그것도 선교사로 입국한 것이 아니라 미국 공관 공의로 입국했다. 

     

    그가 1916년 10월 12일에 미국  뉴저지 애틀랜틱 시티(Atlantic City)의 한 병원에서 향년 57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한국에서 32년 동안 선교사로 사역하였으며, 그의 선교는 한국의 근대화와 기독교 복음화를 위해 엄청난 선교의 열매를 맺었다. 교육, 의료, 문화 등에서도 많은 성과를 가져왔다.

     

    그의 소천시  에비슨과 게일 선교사가 작성한 추도사에 언더우드의 선교사역에 대한 열매로 김포를 거명했다. 결국 언더우는 한국 선교를 마치고 미국에서 1916년에 뉴저지 애틀랜틱 시티(Atlantic City)의 한 병원에서 19161012일 오후 3시에 소천했다. 추도식 때 에비슨과 게일이 쓴 추도사 서문은 다음과 같다.

     

          

    내한한 첫 개신교 목회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7.1.- 1916.10.1.) 목사는 1859년에 태어나, 25세에 한국에 파송되어, 19161012일 미국에서 소천할 때까지 32년간 봉사한 후 57세에 소천했다. 개척 선교지의 열악한 환경에서 40에 백발이 되었으나, 늘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을 가진 청년으로 살았다. 한국인은 행동주의자요 열정가인 언더우드를 두 가지 별명으로 불렀다. ‘넓은 날개’(wide wings)불 동가리’(a bundle of fire) ‘넓은 날개의 측면에서 보면 사실 그는 한 사람이 감당했다고 보기에는 엄청난 양의 다양하고 폭넓은 활동을 했다. 10년만 보아도, 제중원의 진료실 조수, 의학교 교사, 최초로 조직된 장로교회인 정동의 새문안교회 목사, 정동 고아원(경신학교의 전신) 원장, 전국을 부빈 순회여행 전도사, 서울의 새문안-독립문-여의도-김포-행주에서 황해도의 장연-소래-봉천-은율-곡산으로 이어지는 구역의 담당 목사, 선교회, 회계, 사택과 학교 건물의 현장 감독, 신약 번역자회 회장, 전도문서 번역자, 찬송가 편집자, 사전과 문법서 편집자. 개인 인쇄소 운영자, 선교 전략가, 선교기금 모금인, 선교사 모집자 등의 일을 했다. 그는 또한 선교사 학자로서 한국학 연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언더우드가 불굴의 선교 열정으로 한국 교회를 타오르게 한 불 동가리의 측면은 사역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는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며 불타는 인생으로 살았다. 그가 무엇을 했는가라는 업적과 함께, 그것을 가능케 한 그가 누구였는가라는 사람됨의 측면을 살펴보아야만 우리는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의료선교사인 알렌에 이어 한국의 첫 목사 신분의 선교사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의 기틀을 잡아 주었고, 한국 장로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실로 놀라운 열정으로 선교의 모든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고 그 업적은 한국 교회 역사에 길이 보존될 수 있는 기념비적인 것들이다. 그의 18888월에 쓴 편지에 한국 같은 곳에서 선교사가 되려면 만물박사(Jack of all trades)가 되어야 한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는 정말로 한국에서 선교하면서 만물박사와 같았다.

     

    소재열 박사(김포 언더우드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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