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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기념, 어제와 오늘(3)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의 전후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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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개교 120주년 기념, 어제와 오늘(3)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의 전후 역사적 배경


[꾸미기]평양신학.jpg
평양신학교(1905년) 재학생들과 교수들. 맨 앞줄의 한석진이 태극기를, 길선주가 성경을 들고 있다

 

오늘날 총신대학교(합동)와 장로회신학대학교(통합)는 같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뿌리로 하고 있다. 이 신학교는 1901년에 선교사 공의회의 결정으로 마포삼열 선교사 자택에서 시작하였다. 따라서 총신대학교 120주년 기념은 1901년으로 시작한다. 이런 이유로 총신대학교의 역사적인 과거의 발자취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선교사 공의회와 마포삼열 선교사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46년간 한국에서 사역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32년이다. 총신대학교의 120주년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선교사들의 한국선교의 중요한 핵심 전략 가운데 하나는 사경회를 통한 성경공부였다. 선교사들에게 사경회는 사역의 주요 버팀목이며, 교회를 부흥시키고 강화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런 형식의 사경회가 진행되면서 성경 공부를 하였는데 이 성경 공부는 성경의 각 권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형식을 통해 성경 공부와 더불어 구체적인 각론으로 신학반을 운영하였다. 신학반을 통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통해 성경과 신학 공부를 하였다. 1893년에 평양선교지부가 개설되면서 1894년부터 마포삼열 선교사 중심으로 평양 지역에 신학반이 조직되었다.


선교사들이 진행한 저녁 전도 집회에 통해 결신자와 결신자들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믿는 자들에게 학습과 세례 문답을 통하여 모든 모욕과 박해를 견디고, 교회 건축과 운영을 위해 스스로 헌금했으며, 엄격하게 주일을 지키고, 속죄(贖罪)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한국교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게 하였다.

 

사본 -마포삼열 결혼 사진 부부.jpg
1899. 6. 1. 12시 정각에 평양에서 그레이엄 리 선교사(한국명: 이길함)의 주례로 결혼식을 가졌다(아내 앨리스 피시 마페트)

 

1898년 12월에는 마포삼열 선교사에 의한 신학반(神學班)은 100~200명이 참석하였다. 이들 중에 50명은 전체 선교지부에서 선발된 조사와 영수였다. 1899년 6~7월에는 20명에 대한 조사를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사경회가 평양선교지부에서 실시되었다. 


지난 8년간 선교지부 전체에서 일어난 결과보다 더 많은 열매가 맺어지고 있었다. 이쯤 하여 평양선교지부는 세례교인이 1,000명이 넘었고, 학습 교인이 3,500명 이상이었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한국교회에 어울리는 학교를 계획하여 추진하였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1899. 6. 1. 12시 정각에 그레이엄 리 선교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가졌다(아내 앨리스 피시 마페트). 결혼식에 쓸 케이크를 미국에서 공수해 오기도 했다.


1900년에 이르러 선교사들은 자전(自傳), 자급(自給)에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자치(自治)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가 선교부로부터 독립한 자치를 위해 1900년에 2명인 소래교회 서경조와 평남 평양의 김종섭에게 안수하여 장로로 세웠다. 또한 공의회로부터 추가로 세 명에게 안수하여 장로를 세우는 문제를 허락받아 장대현교회 길선주와 방기창이 1901년 5월 15일 평양을 방문한 선교부 총무 브라운 목사에게 안수를 받았다. 선천교회 양전백은 1902년 2월로 안수받아 장로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장로에 대한 성경적인 자격 요건을 강조하고 가르쳤을 뿐 선출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한국인 교회 신자들에게 맡겼다.

 

신학교 첫 건물.png
위 사진은 평신학교 최초의 건물이다. 밑에 사진은 멀리서 바라본 신학교 교사와 각종 기숙사이다. 1908년 5월에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에 학교 교사(校舍)의 정초식을 하였고, 이어서 건물을 지었다.

 

1900년 선교사 공의회에서 목회자 후보생으로 2명을 관리하겠다고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 2명은 장로로 안수를 받아 현재 부목사 일을 하고 있는 김종섭 장로였으며, 다른 한 명은 아직 장로로 피택을 받았을 뿐 장로 안수를 받지 않는 방기창이었다. 방기창은 3년간 베어드(배위량) 선교사와 헌트 선교사의 지방 사역을 도운 조사이다. 


선교사들은 이들이 목사안수를 받기 전에 몇 년간 교육 과정을 이수할 계획을 세웠다. 목사 안수는 그들이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여겨질 때 결정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한국교회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게 될 경우, 이들에게 전적인 책임과 특권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의회는 장로로 안수받은 자 10여 명을 선발하여 공의회에서 투표권을 부여하고 나머지에는 발언하는 발언권, 즉 언권을 부여하기 위해 한국어 공의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한국인 목사에 의해 독립된 교회의 자치를 위한 노회가 출범할 때까지 노회에 들어갈 사람들을 훈련하였다. 그 결과 1901년부터 ‘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는 ‘영어로 쓰는 공의회’와 ‘조선어를 쓰는 공의회’(장로 3인, 조사 6인 참석)로 진행하였다. ‘조선어를 쓰는 공의회’는 독노회가 조직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선교사들은 “처리를 엄하지 않게 하는 것이 허약한 교회를 세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의 하나”라고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잘못한 자에게는 모든 친절과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어떤 죄도 간과해서는 안 되며, 어떤 원칙이나 성경적 행동 기준을 타협해서도 안 된다”라고 하며 이 원칙을 지켜나갔다. 특히 제사, 일부다처제, 음주, 도박 등의 문제에 대해 높은 도덕적 기준과 확고한 견해를 밝히게 하여 강한 교회, 교회 지도자는 일반 교인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은 조선에 선교의 문을 여는 데 필요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진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교회설립보다 앞설 수 없으며, 뒤따라 가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은 교회와 선교를 위한 목적사업이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1892년에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할 무렵 국내에 외국 선교사들은 무려 40여 명이 육박했다. 1893년 1월 미국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사이에 장로회 정치형태를 보유하는 선교부끼리 ‘선교사공회’라는 협의기구를 구성하고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 선교부와 캐나다장로회 선교부 등이 참여했다. 이렇게 되자 이듬해인 1893년 1월 28일에 선교사 공의회를 조직할 필요를 느껴 경성 빈톤 의사 집에 모여 영어를 사용한 ‘선교사 공의회’(宣敎師公議會)를 조직하였다. 이 공의회는 1893~1900년 말까지 진행되었으며, 제1회 회장은 이눌선 선교사와 제8회를 끝으로 오웬 선교사가 회장이었다.

 

북장로회 1893.jpg
평양북장로회 선교지부 선교사들과 그 가족(1893)

 

1901년 1월 28일 평양 선교부 선교사 공의회 평양위원회는 선교사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교회 자치(自治)를 준비하기 위한 하나로 목사 후보생 2인을 선발하여 교육하기로 하였다. 이 2인을 선발하기 위해 조사 2인의 문답을 시행하였다. 이 문답은 목사 후보생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렇게 하여 이 두 사람은 1901년 2월 6일 조선의 최초의 목사가 되기 위한 목사 후보생으로 선정하였다.


김종섭은 장로이면서 조사이며, 방기창은 장로 임직 이전의 피택장로(선출장로)였다(방기창은 1901. 5. 15.에 장로로 임직). 목사 후보생 문답 때 방기창은 아직 장로가 아닌 상태였다. 마포삼열 선교사와 베어드 선교사는 이들을 5년 동안 교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들이 만족할만한 교육을 받고 자격이 갖추어졌다고 생각할 경우, 공의회에 청원하여 목사로 안수하여 한국교회 자치를 위한 노회 조직을 위해 계획하고 있었다. 


1901년 선교사 공의회는 신학교육위원회(Committee on Theological Education)를 선정했다. 그 이듬해(1902)에 위원회는 신학교육을 위한 5개년 교과과정을 제안했고, 이 제안이 1년 동안 임시로 받아들여졌다. 이 임시교과과정을 갖고서 평양공의위원회는 1903년부터 6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마포삼열 선교사가 「코리안 필드」(1903. 11.) 140~141페이지에서 1903년 6월 평양의 상황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공의회는 4명의 목사 후보생을 추가로 공의회 평양위원회의 관리하에 두도록 허락하여 총 6명의 목사 후보생이 탄생하였다. 6명의 목사 후보생은 5년 과정의 첫해인 1903년에 수업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해 1월, 4월, 7월에 세 학기가 개강하였다. 이는 여름과 겨울 정기 사경회에 출석하는 일과 함께 학생들에게 약 3개월간 강의가 제공되었다. 학생들은 나머지 시간에 스스로 공부하고 실제 현장에서 봉사하면서 보낸다. 

 

제1회 졸업생으로 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린서,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 등 7명을 내다..jpg
제1회 졸업생으로 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린서,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 등 7명을 내다.

 

6명 중 4명은 장로이며, 여기에 서경조 장로는 목사 후보생으로 허락받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교사, 조사, 또는 조력자의 직무를 감당했고 6-10년 동안 선교사와 밀접한 관계 속에 있었다. 모두 한문 문헌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도록 해주는 한국 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7년에서 11년 동안 선교사들이 인도하는 사경회 참석하였다.


1903년 첫해 신학반은 조직신학과 소요리문답(모펫, 한국명: 마포삼열 박사), 구원론(베어드 박사, 한국명: 방위량), 유대 역사(스왈른 목사. 한국명:소안론), 설교학(리 목사, 한국명: 이길함), 마태복음과 고대사(헌트 목사, 한국명:한위렴), 모세오경 연구(베어드 박사와 스왈론 목사), 산수 수업(번하이젤 목사, 한국명:편하설) 등이었다. 

 

1903년 12월 사경회로 모일 때 2년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양전백 장로는 33세로 1893년에 세례를 받았다. 김종섭 장로는 41세로 1895년에 세례를 받았다. 나이가 가장 많은 방기창 장로는 41세였다. 1895년에 세례를 받았다. 송인서 조사는 34세로 1895년에 세례를 받았다. 이기풍 조사는 35세로 1896년에 세례를 받았다. 길선주 장로는 34세로 1897년에 세례를 받았다. 길선주 장로는 거의 시각장애인이지만 뛰어난 설교자요 심오한 사상가이며 보기 드문 뛰어난 판단력과 영적인 감각을 갖춘 인물로 평가되었다.


전술한 대로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공의회를 조직하였다. 선교사들만의 공의회는 1893~1900년에 8회기에 걸쳐 운영하였으며, 북장로회 선교사와 남장로회 선교사가 교차적으로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이 선교사 공의회에서 장차 한국 장로교회의 자치를 위한 독립을 위해 목사를 세우기로 하고 먼저 목사 후보생을 2인과 추가로 4인을 합하여 6인을 승인하였다. 공의회 평양위원회는 목사 후보생을 선출하였는데 먼저는 1901년 2월 6일에 2인, 그 후 추가로 4인을 승인하였다.


미국 북장로회 헌법이나 그 헌법을 번역하여 사용한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은 신학생을 모집하여 교육한 후 목사 후보생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목사 후보생을 결정한 후에 신학 공부를 시킨다. 1901년 2월 6일은 선교사 공의회의 승인하에 공의회 평양위원회에서 목사 후보생을 심사하여 2인을 결정한 날이다.


공의회는 1903. 9. 8.에 평양장로회신학교(교장 마포삼열 선교사)가 승인되었다. 통합 측 장신대학교 “1901. 봄.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박사가 평양 대동문 옆 자택에서 방기창, 김종섭 두 학생으로 신학반을 시작하다.”라고 한다.

 

독노회.png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1907. 9.)

 

합동 측 총신대학교는 “1901. 5. 15. 대한예수교장로회 공의회가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의 설립을 결의함에 따라 평양 대동문 옆 마포삼열 선교사 자택에서 본교의 전신인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가 개교되다.”라고 역사를 기록한다.


1901년 2월 6일에 목사 후보생 2인을 선정하였고, 1903년 1월부터 신학반이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목사 후보생은 2인으로 먼저 수업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6명이 함께 첫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그 해가 1903년 1월부터이다.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설립자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아니라 선교사 공의회였다. 인준 승인권이 공의회 평양위원회도 아니며, 평양위원회에 소속된 마포삼열 선교사도 아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공의회 승인하에 실무적으로 주도적으로 이를 시행한 선교사이다. 마치 숭실대학교 전신인 평양의 숭의학당이 베어드(방위량) 선교사가 설립한 것이 아니라 북장로회 평양선교지부가 설립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1905년에 처음으로 1903-4년과 다른 방식인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 동안 한 곳에 모여 집중적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첫 신학교 교사가 1908년 10월에 완공하였으므로 정식 건축된 교사가 없었다. 1906년에는 3학급(1학년 29명, 2학년 14명, 4학년 7명)으로 확대되었으며, 재학생 수는 50명이었다. 1907년은 75명이었으며, 한결같이 목사 후보생이었다. 이들은 조사. 장로, 영수 등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선교사 공의회 평양위원회가 주도적으로 출발했지만 1906년에 이르러서는 남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캐나다장로회와 연합으로 학교를 운영하여 명실공히 한국 장로교회의 대표적 신학교로 성장했다. 1907. 6. 20. 제1회 졸업생으로 서경조, 방기창, 한석진, 양전백, 송인서, 길선주, 이기풍 등의 7명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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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노회 목사 안수 장면(1907)

 

조선에 독립된 노회가 설립되었는데 그 노회를 독노회라 한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그해 9월 17일에 조직되었다. 첫 졸업생 7명이 목사안수를 받음으로 노회적 성질인 목사와 장로로 노회가 성립되었다. 신학교의 공식 이름을 ‘조선장로회신학교’라고 하였다. 실로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선교하고 교회를 세운지 23년만에 한국에 한국인 목사와 장로 중심의 독립노회(독노회)가 설립된 것이다. 이제 선교사들이 1890년 중국선교사 네비우스를 통해 한국 선교의 중요한 정책노선으로 네비우스 선교정책 중에 자치가 이루어진 역사적인 날이었다.


1908년 5월에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에 학교 교사(校舍)의 정초식을 하였고, 이어서 건물을 지었다. 2층 한옥이었다. 상층에는 기도실과 교사실 그리고 4, 5학년 강의실이 있었고, 하층에는 1, 2, 3학년 강의실과 물건을 넣어두는 저장고가 있었다. 그리고 기숙사가 여러 동 있었는데, 4개 선교부가 각각 건축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호주 장로회, 미국 남장로회와 북 장로회, 그리고 캐나다장로회가 각각 기숙사를 지었다. 교사건축과 기숙사(2동) 건축을 위하여 미국 시카고에서 사는 매코믹 여사가 재정지원을 하였다.

 

[꾸미기]1922신축 평양신학교.jpg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사(1922)

 

늘어나는 학생들을 수용하고 새로운 현대시설의 교사가 필요함에 따라 1921년 9월 21일 옛 교사(校舍)를 헐고 새 교사를 짓기 시작했다. 1922년 5월 12일에 머릿돌을 놓았고, 9월 27일에 헌당식을 하였다. 새로 지은 교사의 시설이 매우 만족스러웠고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붉은 벽돌 3층 건물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4회 총회(1925)에서는 "본교 재단법인 인가를 엇은[얻은] 일이오며"라고 신학교육부 보고가 있었다. 이에 총회는 보고를 받았다. 평양신학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재단법인 재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유지재단’이 설립되었다. 평양신학교가 1922년에 신축한 교사는 재단법인으로 등록하게 되었다.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재산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법인을 설립하여 마포삼열 기념관 및 신학교 재산을 유지재단에 등록하여 관리하였다.

 

1925. 10. 01. 남궁혁 박사가 최초의 한국인 교수로 취임하다..jpg
1925. 10. 01. 남궁혁 박사가 최초의 한국인 교수로 취임하였다(남궁혁 교수의 강의)

 

1925년 10월 30일 제1대 교장인 마포삼열 션교사가 사임했다. 제2대 교장 라부열의 취임했다. 1925년부터 가을부터 졸업생인 남궁혁(제15회 춘기 졸업생) 교수가 한국인 최초의 조교수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1926년 김선두 목사에 이어 박형룡 교수가 1928년 봄학기에 임시 교수로 취임하여 총회의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기 1년 전인 1937년 9월 7일 정교수가 되었다.


제27회 총회(1938)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았다. 1938년 9월 29일로 예정되었던 가을학기 개학은 없었다. 개학하지 못하고 통신수업이 진행되었다. 1939년 4월 13일 오전 10시 학교 대강당에서 제34회 졸업식이 개최되었다. 교장 라부열이 사회하였고 교수 남궁혁이 ‘진(眞) 종교의 본질’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54명의 졸업생에게 졸업증서를 수여하였다. 이것이 평양신학교 졸업식을 끝으로 신학교는 폐교되었다. 학교 재산은 적산 재산이 되어 총독부에 귀속되고 말았다. 

 

필자는 본고에서 "총신대 개교 120주년 기념, 어제와 오늘(3)" 를 연재하면서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의 전후 역사적 배경"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총신대학교(합동)와 장신대학교(총합)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자신들의 역사적인 정통성과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2021년을 개교 120주년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120주년은 상당히 인위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여야 한다. 최초의 장로회 조직이 1907년 독노회이며, 치리회인 독노회는 선교사 공의회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총신대학교는 공의회에서 설립한 평양장로회신학교를 그 근원지로 삼고 있다.

 

후평양신학교는 평양신학교와 총신대학교의 신학적 정체성에 반한다는 이유로 총신 기수에는 포함되나 역사의 연혁에는 삭제했다. 조선신학교는 아예 총신 기수나 역사에서 삭제했다. 제105회 총회에서는 신학적 정체성 때문에 역대 총신 기수에 포함되지 않는 조선신학교 졸업생인 한 인물을 영웅화 시키는 작업을 했다. 1948년에 남산에 세워진 장로회신학교는 설립후 총회 인준을 받는 직영신학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신 기수에서 삭제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일들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 이 문제가 고민일 뿐이다. 사실 불편한 진실 앞에 우리들의 수치만 드러난 역사 회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픔일 수밖에 없다. 세워진 신학교는 폐기 되고 다시 새로 세워진 신학교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120주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앞으로 이러한 부분을 계속 추적해 보려 한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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