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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약속된 선교의 땅 '1897년에 최초 교회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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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약속된 선교의 땅 '1897년에 최초 교회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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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의하면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승동교회는 전신인  곤당골에서 교회가 설립되어 1894년에 승동교회가 인사동으로 옮겨 승동교회가 됐다. 승동교회 설립자는 사무엘 포먼 무어(Samuel Forman M00re) 선교사이다. 무어 선교사의 한국이름은 모삼열(毛三悅)이라고 했다. 그러나 묘비명에는 모삼율(毛三栗)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 북장로교선교사로 1892. 9. 19. 부산을 거쳐 제물포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하였다. 승동교회는 1894년에 인사동에서 승동교회 이름으로 교회를 설립했으나 승동교회는 설립일을 1893년인 곤당골교회로 출발하고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기록은 다음과 같다.
  
1894년 (갑오) 시년 공의회 회장은 배위량이라
시년에 선교사 원두우난 전도의 방침을 확장하야 서상륜 김흥경 박태선 유흥렬 등으로 경성 근방에 전도케하고 신화순 도정희 이춘경등으로 고양 김포등지에 전도케 하니동시에 4, 5처 교회가 신설되고 의사 혜론은 동현에 병원을 설립한 후 일변으로 질병을 구료하며 일변으로 복음을 선전하야 은연히 교회를 성립하엿더니 기후 병원 이전시에 교인은 남문외와 승동교회로 분하야 각기 대회를 의성하니라.
 
위의 기록에는 1894년에 김포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기록은 아니다. 당시에 김포에 복음이 전해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포읍에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 시기는 1897년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1897년 (정유) 시년 공의회 회장은 최의덕이라
고양군 행주교회와 토당리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선교사 원두우의 파송한 전도인 도정희 신화순등의 전도로 신자 초진하야 교회가 설립되얏고 초에난 양처 교우가 1처 에 회합하다가 지시하야 신자 점흥함으로 분립하야 각기 교회를 완성하니라
김포읍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고양군 세교교인 고군보와 기처 박살라미가 당지에 도하야 열심 전도함으로 본읍인 천덕현 이봉춘과 걸포리인 유공선 박성삼 황춘근이 시신하고 유공선 사저에셔 회집 예배하더니 지시하야 신자가 일증하야 3백여인에 달한지라 동심협력하야 본읍 서리에 16간 가옥을 매수하야 예배당으로 사용하니  당시 조사난 홍성화(추후 타락함)러라.
 
김포읍교회 설립은 1897년 선교회 공의회 시대이다.  이 기록를 뒷받침한 기록이 언더우드선교사 부인인 릴리이스 H. 언더우드(Lillias H. UnderWood, M. D.)의 저서 「상투의 나라」(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or Life in Korea)에 김포에 대한 기록이 있다(신복룡, 최수근 역주, 「상투의 나라」(집문당, 1999), 251).
 
언더우드 아내는 1897년 “우리는 다시 한법 내륙으로 긴 영행을 떠났다. 이번엔ㄴ 우리와 동반자들과 캐나다에서 새로 도착하여 선교 방법을 배우고자 했던 몇 명의 선교사들도 동행했다. 이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언더우드 씨는 그의 관할의 기록됴인들이 살고 있는 강변 마을을 다시 방문하여 평소와 같이 어디서나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계속하여 “행주에서 널찍한 새 교회가 세워져 선교단을 놀라게 했다. 그가 전에 그곳을 방문했을 때와 다름 없이 새로운 신도들이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포의 전도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김포(金浦)에서의 선교의 시작은 신 씨와 관련된 것으로서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다. 신 씨의 말에 따르면 어느날 밤 그가 자고 있을 때, 한 목사가 긴 지팡이를 짚고서 그에게로 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목사가 손에 가지고 있는 지팡이는 지방을 여향할 때 사용하는 것이았다. 그 지팡이로 목사는 잠자는 그를 힘껏 깨우면서 “자, 여보시오. 일을 하러 가야 되지 않겠소.” 그리고 강 건너 김포를 가리키면서 “일어나 저곳으로 가서 말씀을 전하시오”하고 말했다. 신 씨는 잠이 깨어 일어났으나 곧 다시 잠에 빠졌다. 그러자 그 목사는 다시 와서 더욱 다급하게 그를 깨우며, 복음을 들고 김포로 가라고 했다. 그는 다시 잠이 깼고 세 번째도 다시 점이 들었으며, 전과 똑같은 꿈을 꾸었다. 그는 김포에 사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으며, 그것이 다른 어느 곳보다도 복음 전하는 데 희망 있는 곳이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 꿈은 그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주어, 그곳에 가야겠다고 느끼게 했다. 그가 김포에 도착했을 때, 한 두 가정이 몇 권의 책을 통해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누군가가 그들에게 와서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 때는 억세고 악명 높은 싸움꾼이었던 그 남자는 이제 이 부근의 기독교인들 중에서 지도자가 되었고 강변 마을에 빛나는 등불이 되었다. 그리고 이오하 같은 김포는 가장 약속된 선교의 땅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분명한 것은 김포지역에 선교는 1894년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김포읍교회는 1897년이라 할 수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는 당시 교회 설립 역사를 기록한 장로회 총회의 공적 기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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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는 상·하 2권. 노회에서는 1916년 2월에 개최된 제5회 총회에서 사기(史記)를 편찬하기로 결정하였다. 편찬위원으로 모펫(Moffett, S. A., 馬布三悅)·함태영(咸台永) 등 여러 명을 위촉하고 각 노회(老會)의 편찬위원으로 하여금 노회 안의 사료들을 수집, 총회에 보내도록 하여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다.
 
처음의 편집책임자는 호주 선교사로 1918년부터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교수한 엥겔(Engel, G., 王吉志)이었는데, 편찬 작업이 지연되자 1924년에 편집부장에 차상진(車相晉)을 임명하여 1926년에 편집이 끝났다. 그러나 총독부의 검열로 간행이 지체되다가 1928년에 창문사(彰文社)에서 1만 부를 간행하였다. 그것도 총독부의 간섭으로 총회 명의로 발행한 것이 아니라, 총독부와의 교섭위원으로 나섰던 차재명(車載明)의 명의로 상권만을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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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은 초기부터 1911년까지의 사료를 총망라하여 수록한 것인데, 그 내용은 서두의 총론에 이어 장로교회의 발전사를 공의회시대(公議會時代)와 독로회시대(獨老會時代)로 각각 나누어, 각 대리회(代理會:老會의 전신) 관할 내에 있는 교회들의 조직·전도·교육·진흥 등 항목들을 따로 정리하여 수록하였다. 즉, 교회 설립자와 인도자, 교회 설립과 교육에 관한 일, 치리회(治理會)가 조직된 일, 교회직원과 집사·장로 등의 인사, 전도사업 등이 항목별로 수록되어 있다.
 
한편, 하권은 1965년백낙준(白樂濬)이 일본 동경의 한인교회 목사인 오윤태(吳允台)가 그 고본(稿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내어, 404장을 사진 복사하여 7권의 사진첩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1968년에 한국교회사학회에서 다시 편집, 활자화하여 간행하였다. 하권에는 1912년부터 1923년까지의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소재열 박사(한국교회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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