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맑음속초11.5℃
  • 황사9.5℃
  • 맑음철원6.7℃
  • 맑음동두천6.6℃
  • 맑음파주5.9℃
  • 맑음대관령3.9℃
  • 맑음춘천9.7℃
  • 맑음백령도5.3℃
  • 황사북강릉11.8℃
  • 맑음강릉11.9℃
  • 맑음동해11.9℃
  • 황사서울7.6℃
  • 맑음인천7.0℃
  • 맑음원주9.2℃
  • 황사울릉도11.6℃
  • 맑음수원6.6℃
  • 맑음영월9.2℃
  • 맑음충주9.3℃
  • 맑음서산5.9℃
  • 맑음울진12.9℃
  • 연무청주9.8℃
  • 박무대전8.4℃
  • 맑음추풍령9.8℃
  • 황사안동11.0℃
  • 맑음상주11.0℃
  • 황사포항15.6℃
  • 맑음군산7.1℃
  • 황사대구15.0℃
  • 박무전주8.7℃
  • 맑음울산14.9℃
  • 연무창원13.6℃
  • 박무광주10.5℃
  • 연무부산13.8℃
  • 맑음통영13.2℃
  • 박무목포9.8℃
  • 박무여수13.4℃
  • 박무흑산도8.9℃
  • 맑음완도12.7℃
  • 맑음고창7.1℃
  • 맑음순천11.2℃
  • 박무홍성(예)7.0℃
  • 맑음8.4℃
  • 연무제주14.8℃
  • 맑음고산13.1℃
  • 맑음성산12.9℃
  • 박무서귀포13.6℃
  • 맑음진주14.4℃
  • 맑음강화6.5℃
  • 맑음양평9.0℃
  • 맑음이천7.6℃
  • 구름조금인제10.0℃
  • 맑음홍천8.9℃
  • 맑음태백5.6℃
  • 맑음정선군7.2℃
  • 맑음제천8.0℃
  • 맑음보은9.4℃
  • 맑음천안8.8℃
  • 맑음보령5.1℃
  • 맑음부여6.5℃
  • 맑음금산8.5℃
  • 맑음8.7℃
  • 맑음부안7.9℃
  • 맑음임실8.0℃
  • 맑음정읍7.8℃
  • 맑음남원9.8℃
  • 맑음장수9.0℃
  • 맑음고창군6.4℃
  • 맑음영광군7.0℃
  • 맑음김해시13.8℃
  • 맑음순창군8.9℃
  • 맑음북창원14.1℃
  • 맑음양산시14.6℃
  • 맑음보성군11.8℃
  • 맑음강진군12.9℃
  • 맑음장흥12.6℃
  • 맑음해남12.2℃
  • 맑음고흥12.7℃
  • 맑음의령군14.4℃
  • 맑음함양군11.9℃
  • 맑음광양시12.3℃
  • 맑음진도군11.3℃
  • 맑음봉화10.0℃
  • 맑음영주9.8℃
  • 맑음문경10.2℃
  • 맑음청송군11.3℃
  • 맑음영덕13.4℃
  • 맑음의성11.8℃
  • 맑음구미13.0℃
  • 맑음영천13.1℃
  • 맑음경주시16.1℃
  • 맑음거창11.6℃
  • 맑음합천14.0℃
  • 맑음밀양15.6℃
  • 맑음산청12.9℃
  • 맑음거제13.7℃
  • 맑음남해13.9℃
  • 맑음14.2℃
[해석학] 유대인의 성경해석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설교⦁칼럼

[해석학] 유대인의 성경해석

탈무드는 히브리 사람들이 이룩해 놓은 구약성경의 주석

2019020823105950.jpg

 

오늘날 이 지구상에서 유대인을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 과연 누가 객관적으로 유대인들을 무시할 수 있을까? 2000여 년간이나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아무도 무시 못 할 실력과 경제력을 소유한 민족이 되었다. 우리가 이러한 유대인의 성경해석을 살펴야 하는 이유는 일단 성경해석에 있어서 유대인의 성경해석의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성경해석의 역사에 유대인보다 앞선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떤 면에서 유대인의 저력은 성경해석의 능력에 있다고 해도 사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성경해석의 핵심은 무엇일까? 우리는 유대인의 성경해석의 핵심은 탈무드의 이해에 있다고 보고 탈무드에 주목할 것이다. 왜냐하면 탈무드는 유대인의 구약성경해석이기 때문이다.

 

1. 탈무드(תַּלְמוּד; Talmud)는 히브리 사람들이 이룩해 놓은 구약성경의 주석이다.

 

이 책은 주전 3백년부터 주후 5백년에 이르는 800년 어간에 가록되었다. 탈무드는 미쉬나(משנה)와 게마라(גמרא)라는 부분으로 되어 있다. 탈무드의 부피는 소가 끄는 우차에 가득가득 실어서 열두 우차가 될 정도로 굉장한 것이다. 미쉬나는 구약성경의 주석이고, 게마라는 미쉬나의 주석이다. 다시 말해서 게마라는 구약성경의 주석을 다시 주석한 것이다.

 

(1) 미쉬나

 

1) 미쉬나의 뜻
미쉬나(משנה)는 "둘째 번" 비파라는 뜻을 가진 미쉬네(משנה: mishne)에서 왔다는 말과, “반복하다, 말하다, 가르치다, 입으로 전하다”라는 뜻을 가진 샤나(shana)에서 왔다는 말이 있다. 미쉬네에서 왔다면 미쉬나는 “두 번 째”라는 뜻이겠고, 샤나에서 왔다면 미쉬나는 “입으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두 가지 말이 다 무방하다. 이유는 히브리 사람들은 탈무드를 “성경 다음 가는 책”이라고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2) 미쉬나의 내용

 

미쉬나는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이 부분은 「론」이라고 부른다.  각 론이 다시 분할되어 63부분이 된다. 이 부분을 「부」라고 한다. 각 「부」가 다시 분할되어 「장」으로 나누어진다.

 

3) 미쉬나가 만들어진 기간

 

미쉬나는 에스라 시대부터 만들어져서 주후 220년까지 이른다. 처음에는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미쉬나의 부피가 증가하자 기억에 담기가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문서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문서화 작업은 헤롯 왕 때 활동하던 힐렐(Hillel)이 시작하였다. 이 기간에는 예수님의 지상생애가 포함된다.  힐렐은 대학자로서 방대한 미쉬나를 여섯 부분으로 나누었으며, 산헤드린의 의장이며 장로였다. 이 문서화 작업은 힐렐의 제자 아키바(Akiba)가 이어 맡았고, 다시 그의 제자 메이르(Meir)가 이어 맡았고, 다시 그의 제자 유다-하나시 (Jehuda Hanasi)가 계승하였다. 유다 하나시가 문서화 작업을 완성하였다. 때는 주후 220년경이다. 

 

4) 미쉬나의 목적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은 변한다”는 생각을 꿈에도 가져보지 못하였다. 그들의 머리에는 그와 같은 생간이 날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성경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지금, 그리고 언제나 계시기 때문에 옛날에 주신 명령은 오늘도 효력이 일고 지켜야 한다고 히브리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마라”고 명령하신 그 하나님은 오늘도 계시므로, 그 명령은 오늘도 그대로 효력이 있는 명령이고, 지켜야 하는 명령이다(출 23:19, 34:26, 신 14:21). 이 명령은 히브리 사람들이 농사에 종사하고 있을 때에는 지키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어느 것이 어미 염소인지 어느 것이 새끼 염소인지 쉽게 식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이 농사일을 그만 두고 상업이나 그 밖의 사업에 종사 하면서부터 이 명령은 지키기가 어렵게 되었다. 자기 손으로 염소를 기르지 않기 때문에 정육점에서 사온 고기와 가게에서 사온 우유와의 촌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삶의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데 어려움이 생겨났다. 이와 같은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 미쉬나가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미쉬나는 순수한 학문적 해석이기 보다는 삶의 상황에 직면하여 그 말씀을 실천하려는 의도로 적용적인 해석을 한 것이다. 변천하는 삶의 상황에 맞도록 미쉬나를 만들어낸 실례 중의 하나가 바로 염소 새끼와 그 어미젖에 대한 구절이다. 


“염소새끼와 그 어미 젖”에 관한 성경 구절을 변천하는 삶의 상태에서도 지킬 수 있도록 다음 네 단계로 주석하였다. “염소새끼를 그 어미젖으로 삶지 말라”는 명령은, (1) “가축의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는 뜻이고, (2) 이것은 곧 “고기와 젖을 함께 요리하지 말라”는 뜻이다. (3) 이것은 곧 고기와 젖을 함께 먹지 말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주석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세칙이 생겼다. (4) 우유를 섞어서 만든 과자와 고기를 함께 먹지 말 것이다. 우유제품과 고기를 함께 먹지 말 것이다. 버터를 갖고 고기를 요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고기를 먹은 뒤에 우유를 마시려면 두 식사시간에 해당하는 시간 뒤 곧 6시간 뒤에야 마실 수 있다.


이러한 실례는 얼핏 보면 너무나 형식에 얽매인 것 같이 느껴진다. 미쉬나를 만들어 낸 동기와 목적을 모른다면 그야말로 너무나도 형식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어김없이 지키고자 하는 일념으로 미쉬나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안다면 히브리 사람들의 성경관에 경의를 표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5) 미쉬나와 신약성경


신약성경 여러 곳에 미쉬나가 언급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아니하고 떡을 먹는 것을 본 바리재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 행하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빵을 먹습니까?”라고 물었다(막 7:1-5, 8-13). 여기의 “장로들의 전통”(thn paradosin twn presbuterwn)이 미쉬나를 말한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형을 위하여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을 빙자해서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들 생각으로 “칠 형제가 자식 없이 모두 죽고 그들이 한 여자와 차례로 결혼하였는데 부활할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라고 예수께 물었다. 이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부할할 때는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다. 너희는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털기에 대한 글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라고 대답하셨다(막 12:20-26). 예수님의 대답에 나오는 “모세의 책 가운데 가시나무 떨기에 대한 글”은 미쉬나에 있는 글을 가리킨다.


미쉬나에서는 자식을 믿음으로 양육하는데 어머님의 힘이 아주 크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잘 믿으면 그 자식들은 온전한 신앙인이 되지만, 아버지는 잘 믿지만 어머니가 믿지 아니하면 그 자식들는 온전한 신앙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믿지 않지만 어머니가 믿으면 그 자식들은 온전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미쉬나는 말하고 있다. 어머니의 힘이 크다는 미쉬나의 내용이 디모데후서에 다음과 같이 반영되어 있다.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 확신하노라"(1:5).

 

(2) 게마라

 

1) 게마라의 뜻


게마라(גמרא)는 “완성하다, 끝맺다, 배우다, 가르치다”는 뜻을 가진 가마르(גמר)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게마라는 “미쉬나를 완성하다” 혹은 “미쉬나를 보충하다”는 뜻한다.

 

2) 미쉬나와 게마라와의 관계


이스라엘 본토에서 완성된 미시나의 사본이 바벨론에 있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바벨론에서는 그곳 사정에 맞도록 미쉬나를 해석하였고, 본토에서는 본토 사정에 맞게 해석 하였다. 따라서 미쉬나의 종류는 하나지만, 게마라의 종류는 두 가지가 되었다. 바벨론에서 만들어진 게마라는 바벨론 게마라라 부르고, 본토에서 만들어진 게마라는 예루살렘 게마라라고 부른다. 예루살렘 게마라에는 미쉬나 63부 가운데 39부에 대한 게마라만 있고, 바벨론 게마라에는 37부에 대한 게마라만 있다. 아마도 바벨론에서도 본토에서도 미시나를 모두 주석하였으나, 전해 내려오는 동안에 천재지변이나 전쟁 또는 보관 소홀로 그 일부가 소실되었다고 생각된다.
  
3) 게마라의 내용


게마라는 그 내용을 성격에 따라서 할라카와 하가다로 나눈다. 할라카는 성경과 직접 관계되는 것이고, 아가다는 성경과 직접관계 없는 것으로 전설, 비유, 윤리 도덕에 관한 교훈, 그리고 성경을 영해한 것이다. 요즈음 대학원에 해당하는 학교에서 선생들과 학생들이 미쉬나를 토론 연구하였다. 미쉬나를 토론하는 일은 때로는 선생과 학생들을 피로하고 지루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할 때마다 미리를 식히기 위해서 이런 기록, 저런 기록을 하였다. 그 기록은 속담, 통속의학, 귀신학, 전설, 인물전 등이 있다.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탈무드는 지루함을 덜기 위해 선생과 학생들이 주고 받은 기록 가운데서 유머스러운 것과 격언 따위를 골라서 편집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들을 진정한 탈무드가 아니다.

 

4) 게마라가 만들러진 기간


게마라는 미쉬나와는 달리 처음부터 문서로 옮겨졌다. 게마라는 주후 222년부더 500년에 이르는 동안 기록된 주석이다.

 

2. 탈무드의 주석방법

 

탈무드에 따르면 성경주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페샤(פֶּ֫שַׁע; Pesha)라는 주석이고 다른 하나는 데라쉬(פֶּ֫שַׁע; Pesha)라는 주석이다. 페샤는 단어와 문법구조와 전후관계에 근거하여 해석하는 방법이고, 데라쉬는 단어와 문법구조와 전후관계를 벗어나서 인위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당시 유대인의 성경 해석은 일반적으로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문자적 해석 방법(literal interpretation), 둘째, 미드라쉬 해석 방법(Midrashic interpretation), 셋째, 페샤르 해석 방법(Pesher interpretation), 넷째, 풍유적 해석 방법(Allegorical interpretation)이다.

 

(1) 문자적 해석

 

문자적 방법은 다른 해석 방법의 기초 역할을 했다. 샴마이 학파(the school of Schammai)는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신 6:7)를 문자적 의미로 해석하여 “율법을 암송할 때 저녁에는 기댄 자세로 암송하고 아침에는 선 자세로 암송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힐렐 학파(the school of Hillel)는 “길에 행할 때에든지”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자신의 좋은 방법으로 암송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물론 힐렐의 가르침이 바른 것이지만 샴마이학파는 과격한 문자적 해석의 맹점을 나타냈다. 그래서 랍비 힐렐은 성경의 해석의 일관성을 위하여 7가지 해석 규법을 제시하였다.

 

1) 경중의 법칙 (קל וחומר: Kal ve-Chomer: the rule of ‘light and heavy’,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 혹은 불명확한 것으로부터 명확한 것으로 해석하는 경중해석법). 2) 동등의 법칙(גזירה שוה: Gezerah shawah: the rule of ‘equivalence’, 유추 및 비교법) 3) 특별에서 일반으로 연장하는 법칙 (בנין אב מכתוב אחד: Binyan ab mikatub ehad: Building up a ‘family’ from a single text: 한 구절에 의한 일반화 방법). 4) 두 구절의 해석을 제3의 구절에 사용해서 설명하는 법칙 (בנין אב משני כתובים: Binyan ab mishne ketubim: Building up a ‘family’ from two or more texts: 두 세 구절에 의한 일반화 방법). 5) 일반적인 것에서부터 특별한 경우로 추론하는 법칙 (כלל ופרט ופרט וכלל: Kelal u-ferat u-ferat u-kelal: The general and the particular: 일반적인 것에서부터 특별한 원리를 끄집어내는 방법). 6) 다른 구절의 유추를 사용하여 설명하는 법칙 (כיוצא בו ממקום אחר: Ke-yotse bo mi-maqom aher: Analogy made from another passage: 제3의 구절들로부터 유추비교법). 7) 자명한 추론을 적용하는 법칙 (דבר הלמד מעניינו: Dabar ha-lamed me-inyano: Explanation obtained from context: 전후문맥 유추법).

 

(2) 미드라쉬 해석

 

미드라쉬 (מדרש)해석 방법도 랍비 힐렐이 발전시켰다. 미드라쉬는 고대 팔레스타인의 랍비학교에서 기원된 성경주석에 붙여진 명칭으로서 '찾다 조사하다'를 의미하는 '드라쉬' (דָּרַשׁ)에서 유래된 말로 성경의 해석방법과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목적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밝혀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간파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율법과 원리를 이끌어내고 그와 관련시켜 권위 있는 종교적 윤리적 교훈을 세우는 것이다.


힐렐이 발전시킨 미드라쉬의 기본적인 법칙은 (1) 여러 본문에 나오는 사상, 용어, 구절을 비교하는 것이며 (2) 일반적인 원칙을 특별한 경우에 적용시키는 것이요, (3) 또한 해석에 있어서 문맥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에스라에게서 비롯된 미드라쉬는 성경의 율법 부분을 다룬 할라카나 비율법적인 부분을 다룬 학가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수많은 개작과 확대를 거쳐 독립된 수집본들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미드라쉬 해석 방법은 건전한 면으로 흐르기보다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서 처음에는 문법적인 해석을 했으나 나중에는 문맥을 뛰어넘는 해석적 의미를 부가하게 되었다. (1) 본문, 구절, 용어와 문맥에 관계없는 뜻을 부여하게 되었으며, (2) 같은 용어나 구절이면 그것들이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같이 혼용하게 되었으며, (3) 사소한 문법적 문제에 해석적인 의미를 부가시키게 되었다. 미드라쉬 해석은 표면적으로는 그 출발점이 성경 본문이지만, 성경에 감추어진 뜻을 설명함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당시대의 백성들에게 맞도록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습은 후대에 성경 본문을 상상적으로 또한 창조적으로 취급하고 건전한 범위를 넘어 지나친 해석으로 흐르게 되었다.


이처럼 미드라쉬해석은 문자적인 해석을 하기보다는 문자적인 해석을 넘어 인위적인 해석을 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해석의 방식은 오랫동안 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3) 페샤르 해석

 

페샤(פשר: Pesher) 해석 방법은 쿰란 (קומראן: Qumran) 공동체의 해석이다. 쿰란 공동체가 필사한 사본은 소위 사해사본이라 한다. 이 사본들이 근래에 발견되어 성경무오성을 증거할 수 있게 된 것은 쿰란공동체의 큰 공헌이다. 그런데 그들의 해석방법인 페샤는 아람어에서 왔으며 “해결” 혹은 “해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쿰란공동체의 해석방법에 따르면 고대 선지자가 기록한 모든 것은 감추어진 예언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 예언들이 자신의 언약 공동체를 통해 곧 성취되게 되어있는 것으로 믿었다. 페샤 해석 방법은 미드라쉬 방법에서 대부분 빌린 것이지만 종말론적 강조가 내포되어 있다.


쿰란 종파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단체로 종말의 완성 이전에 고통을 겪는 최후의 공동체로 임박할 메시야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인 것으로 믿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구약의 어떤 예언이 자신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종말론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이 현재의 현상은 저 고대 예언의 성취이다”라는 의미의 “이것은 저것이다”라는 표현으로 페샤 해석 방법이 설명된다.


이 페샤 방법은 사도 바울이 구약을 인용할 때 활용하는 방법이다. 바울은 구약의 내용을 신약에 인용할 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정점으로 이룩된 구속 성취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바울은 신약의 맥락에서 구약을 해석한다. 예를 들면,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을 할 때 데살로니가에서 이 페샤 방법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역사적 예수가 성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는 것이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행 17:3)고 말함으로 “이것은 저것이다”의 페샤 해석 방법을 사용했다. 베드로도 행 2:16에서 그렇게 해석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사도가 쿰란 공동체의 해석 방법을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고, 그 방법을 자신의 방법으로 활용하여 메시지의 내용을 자신의 형편에 맞게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그래도 바울의 구약 해석은 영감된 해석이다.

 

(4) 풍유적 해석


풍유적 해석 방법은 성경이 문자적 의미 이상의 참뜻을 지니고 있다는 사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풍유를 뜻하는 알레고리(Allegory)는 다른 것(Allos)을 말한다(agoreuein)는 것이다. 풍유적인 해석은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행위이다.


풍유적 방법의 기원은 헬라인들이 그들의 종교적 신화의 전통과 헬라적 유전 사이에 나타난 상충을 해결하기 위해 발전시켰다는데 있다. 즉 신화를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문자 속에 더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는 모세의 전통에 충실하기를 원하면서도 헬라 철학을 용납하는 유대인들이 그 둘 사이의 긴장을 해소시키기 위해 모세의 전통을 풍유화시켰다. 필로(Philo, 주전 20년경-주후 50년경)가 이런 해석 방법을 사용하였다. 필로는 구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해석가들의 긴 계통에 우뚝 서 있다. 이 관습은 하나의 학문이 될 정도이다. 필로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그 이해의 단계가 미완숙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믿었다. 그는 풍유적 의미가 보다 완숙한 단계의 의미로 생각했다.


1세기의 유대교 해석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에는 의견을 같이 했다. 그들은 이 말씀들이 현재의 사람들을 위한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문자적 해석은 법정적이거나 실제적 관심의 분야에서 사용되었고 대부분의 해석가들은 힐렐의 영향으로 미드라쉬 방법의 해석을 했다.


그리고 그 당시 대부분이 온건한 풍유적 해석 방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구전을 성경에 더 밀접히 관련시키기 위해 미드라쉬 해석을 발전시켰다. 반면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이 성실한 “남은 자”들이라고 믿는 나머지 미드라쉬 방법과 페샤 방법을 이용하여 성경을 해석했다. 필로와 그의 동료들은 성경과 헬라 철학을 조화시키기 위해 풍유적 해석 방법을 사용했다.

 

3. 유대인 성경해석의 문제점

 

이상에서 살펴본 유대인의 성경해석은 우리가 참고하고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노력 때문에 세계에 뛰어난 민족이 되었다. 유대인의 탁월성의 이유는 구약성경과 토라에 대한 열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통하여 토라와 구약성경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적용을 표현하였다.

 

탈무드는 그들의 신앙의 요체요 자긍심이라 할 수 있다. 구약성경의 첫 번째 해석인 미쉬나와  미쉬나의 해석인 게마라를 통하여 구약성경에 대한 그들의 신앙과 실천을 표명하였다. 우선 문자적 해석으로 경중의 법칙, 동등의 법칙, 특별에서 일반으로 연장하는 법칙, 두 구절의 해석을 제3의 구절에 사용해서 설명하는 법칙, 일반적인 것에서부터 특별한 경우로 추론하는 법칙, 다른 구절의 유추를 사용하여 설명하는 법칙, 자명한 추론을 적용하는 법칙을 적용하였다.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문자적인 해석 외에도 힐렐이 발전시킨 미드라쉬의 기본적인 법칙으로 여러 본문에 나오는 사상, 용어, 구절을 비교하고, 일반적인 원칙을 특별한 경우에 적용시키고, 또한 해석에 있어서 문맥의 중요성을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미드라쉬해석은 문자적인 해석을 하기보다는 문자적인 해석을 넘어 인위적인 해석을 했다. 유대인들 중 쿰란 (קומראן: Qumran) 공동체는 페샤(פשר: Pesher) 해석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풍유적인 해석을 많이 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유대인들의 성경해석은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1) 먼저 유대인의 성경해석의 핵심인 탈무드의 해석방법은 적용에 강조점을 둔 결과 문자적인 해석을 뛰어넘는 풍유적인 해석에 치중했다는 점이다. 


(2)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해석이라는데 제일 큰 문제가 있다. 유대인의 성경해석은 학문적인 측면과 실행을 전제한 적용적인 측면에서 탁월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특히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과 그의 구원사역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약점이다.


(3) 미드라쉬 해석은 문자적 해석을 너무 뛰어넘었다. 이 해석이 큰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 해석에서 페샤르 해석과 풍유적 해석이 도출되어 적은 긍정과 많은 부정의 유산이 되었다.


(4) 신약 성경의 마가복음 7:3, 5에 등장하는 ‘장로들의 전통’ (thn paradosin twn presbuterwn)은 탈무드 가운데 미쉬나를 가리키는데(윌리암 레인, 「마가복음 상」, 이상훈 역, 뉴 인터내셔널 성경주석, 서울: 생명의말씀사, 1983, 307-313.) 예수님은 장로들의 전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다.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 (thn paradosin twn anqrwpwn)을 붙들고 있다. 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무시하는구나...너희는 너희가 전하여 준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며, 또 이와 유사한 것들을 많이 행하고 있다” (막 7:8-13).


(5) 결과적으로 유대교의 성경해석은 반기독교적이다. 유대인 성경해석의 최고봉인 탈무드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고 폐하는 ‘사람의 전통’과 ‘사람의 계명들’(entalmata anqrwpwn, 막 7:7)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책망을 받는 성경해석이라면 궁극적으로 무슨 유익이 있을까?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고 십계명을 철저하게 실천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유대인들처럼 구약성경만 믿고 율법 토라에만 열심 내고 신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으로 말미암는 오는 세상에서의 축복은 결코 누릴 수 없을 것이다.


(6) 율법 곧 토라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며, 우리를 순종의 삶에로 이끌지만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적용을 위한 성경해석의 장점을 본받을 수 있지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고 언급하지도 않는 최대의 약점을 벗어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성육신이고 그의 구원사역을 통해 사람들이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에 성경해석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정규철 목사(총신대학교 대학원에서 “성경무오교리에 대한 역사적 증명”이란 제목으로 신학박사(Ph.D.)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계약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와 교목실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