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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로주의, 구원론적 능동주의를 경계하라

기사입력 2019.02.19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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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사 4장에 ‘나의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천사도 저주를 할 자라고 한다. ‘나의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 구원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거짓복음은 그리스도의 구원 가지고는 안된다. 할례를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장로의 유전을 준수해야 된다는 것이다. 거짓복음은 인간 능동주의를 말한 것이다. 구원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능동주의는 부패한 인간에게 호소력이 강하다. 인간은 교만한 정신에 인간 능동주의는 쉽게 공조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자랑스럽게 만들어 줄 것처럼 사람들에게 속이는 것이다.

    기도해야 한다. 금식해야 한다. 헌신해야 한다. 공적을 쌓아야 하다고 한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심성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구원받으려면 무엇인가 해야 되는데 그냥 앉아서 살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원은 절대 그렇지 않다. 애굽에서 노예생활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오른팔과 권능으로 구원해 내었다고 하였다. 그들이 한 것이 전혀 없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애굽 땅에서 건져내어 광야 40년간 지내고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였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이 원인이라는 것을 구원 역사속에서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계속 가르쳤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을 가공해서 넣어 오류를 범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공부에는 적용이 된다. 그러나 구원에는 절대로 적용될 수 없다. 인간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역사하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복음이다.

    그런데 이런 류의 격언을 설교할 때나 상담할 때 종종 사용한다. 하나님께 구하지 않으면 받지 못한다고 강화할 때,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 결단을 촉구할 때 이런 식의 논조로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마1:26절에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고하면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우리를 구원할 자로 오신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 이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것을 받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구원은 원래 이렇게 간단하다. 인간이 교만하여 하나하나 붙여서 훼손되고 혼합된 것이다.

    인간의 공로주의, 구원론적 능동주의를 경계하라. 핵심은 스스로 자신의 구원에 관한 노력을 기울일 때 하나님께서 자발적인 노력에 상응하는 구원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구원에 관해서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하나님도 우리에게 결코 우리를 돕지 않는 다는 사고로 신자들의 의식에 뿌리를 내리게 만든다는 것이 이 사상의 위험한 점이다.

    가톨릭은 수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데리고 간다. 어떤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데, 수녀는 침묵기도를 하라고 하였다. 새벽마다 나와서 7년째 침묵기도 하고 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했더니,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천국에 갑니까’라고 말한다. 이 대답은 공로주의를 뜻한다.

    가톨릭은 공로주의의 대표이다. 로마교회는 무엇을 하든 공로가 아닌 것이 없다. 공로주의의 총합(기도, 헌금, 봉사 등)이구원에 공적에 이르지 못하면 구원에 못 들어 간다.

    구원의 공적을 채우기 위한 두 번째 기회가 연옥이다. 부모, 형제, 성인의 공덕으로 공적을 채울 수 있다. 그래서 ‘살아 있을 동안에는 구원의 확신이 있을 수 없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내가 쌓은 공덕이 구원이 이르는지 이르지 못하는지를 알 수 없고 죽어봐야 안다는 것이다. 교리서에 나와 있다. 그들이 공로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논하지 말라고 한다.

    그들은 영세를 받을 때 성자의 이름으로 바뀐다. 그 성자의 공덕이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도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덕을 누군가에게 나누어 준다. 시성식 하게 되면 공적을 받을 수 있는 순위가 일순위이다. 그래서 최근에 새롭게 성자가 된 사람의 이름으로 세례명을 갖는다.
     
    개신교 안에도 공로주의가 들어온다. 공로주의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든다. 가슴에 달린 뱃치처럼 주렁주렁 달리게 한다. 이런식으로 공로주의는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에 건전하지 못하다.

    금식하고 나면 뿌듯하는 것, 자부심으로 가득한 것, 밥 먹는 사람 보면 천하게 보이는 것은 금식하고 죄를 짓는 것이다.

    무슬림은 성지순례가는 것이 공로이다. 우리 개신교 안에도 공로주의가 많이 들어온다. 공로주의는 인간을 교만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공로주의는 신앙을 훼손할 수 있다.

    공로주의로 인한 논쟁,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 어거스틴은 전적인 은혜, 은총을 강조했디. 펠라기우스는 신인 협력설을 주장했다. 성화에서도 인간의 노력이 필요한데, 인간의 노력이 구원의 원인은 아니다. 인간의 노력이 결정적이지 않다.

    빌립보서에서 “너희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도 일하시고, 우리도 소원을 두고 일한다. 하나님도 일하고 우리도 일하지만, 여기서는 성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우리가 성화되고자 하는 소원을 두고 성령이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 소원을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일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행하는 것과 인간의 행하는 것이 등가로 교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일차적인 것이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결과로 우리가 일하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면 우리는 일할 수 없다. 우리가 일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일한 것의 결과이다.

    우리가 일하는 것은 피동적인 노력이다. 기차의 기관차가 객차를 달리게 하는 것이다. 성화를 이루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결국에는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라는 사실에서 우리가 어떤 능동주의공로주의를 표방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가 일하는 것은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힘써 이루라는 것은 구원을 이루는 자가 우리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이다.

    구원을 이루는 자와 함께 보조를 맞추라는 것이다. 구원론을 가르칠 때 어떤 식으로든 구원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을 실패하면 잘못된 것이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구원의 절대적이고 충분한 원인으로 설명해야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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